“내가 아는 한 비트겐슈타인은 열정적이고, 심오하며, 강렬하고, 지배적인, 전통적 천재상에 가장 완벽하게 부합하는 사례이다.” -버트런드 러셀
30대 나이에 전설이 된 신비의 철학자
오스트리아 철강 재벌의 막내로 태어나, 실업학교에 입학해서 히틀러와 같이 공부했고, 영국에서 공학을 공부하던 중 케임브리지 대학의 러셀에게 철학적 천재성을 인정받은 후 철학으로 전공을 바꾸고, 노르웨이의 외딴 오두막에서 홀로 철학을 연구하다가, 1차 세계대전이 나자 자원입대하였으며, 전후에는 철학의 모든 문제를 해결했다며 연구를 중단하고 유산 상속도 거부한 채 산골 초등학교 교사의 길을 택한 비트겐슈타인.
사우샘프턴 대학 철학과의 레이 몽크 교수는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철학자이면서 이론과 개인적 삶 모든 측면에서 수수께끼로 가득 찬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일생을 20세기 초 유럽 사상사 속에서 하나의 연대기적 드라마로 소개한다.
천재이거나 자살하거나
철강재벌의 8남매 중 막내아들이었던 비트겐슈타인은 음악 신동으로 불리는 형제들 속에서 네 살까지 말도 못하고, 학교 성적도 좋지 못했던 평범한 아이로 자라났다. 청소년 시절 그는 《성과 성격》이라는 문제작을 남기고 베토벤의 집에서 23세에 권총 자살한 유대인 사상가 오토 바이닝거의 영향을 받아, 자신이 천재가 아니라면 죽는 것이 낫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자신이 이 세상의 ‘잉여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자살하지 못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며 괴로워하던 그는, 철학에 천재적 재능을 지녔다는 사실을 러셀에게 확인받은 뒤에야 비로소 자살 충동을 극복하게 된다.
이때부터 그는 자신이 미치거나 몇 년밖에 살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힐 만큼 극한까지 밀어붙이는 강도 높은 사유로써 철학 연구에 전념한다. 그 결과 러셀과 공부한 지 1년 만에 비트겐슈타인은 러셀의 제자에서 러셀의 선생이 될 정도로 논리학에서 스승을 능가하는 천재로 인정받는다. ‘천재의 의무’란 자신에게 주어진 철학적 충동을 완전히 따름으로써 위대한 철학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목숨을 걸고 철학하기
“이해하든가 아니면 죽어야 하는 사람”이라는 스승 러셀의 증언처럼, 비트겐슈타인은 명료한 이해를 위해 분투했다. 무자비할 정도로 밀고 나가는 그의 탐구 스타일은 다른 철학자들이 기가 질릴 정도로 압도적인 면이 있었다.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철학적 탐구 모델로 36시간 동안 방에 틀어박혀 식음을 전폐하고 작곡에 몰두한 베토벤을 꼽았고, 철학은 시적인 글로 쓰여져야 한다고 생각하여 자신의 주장을 논증으로 정당화하지 않았다. 자신이 숨 쉴 공기를 스스로 제조하는 철학자였던 그는 자신의 연구에 각주를 달지 않았고, 남의 얘기를 가지고 적당하게 이론을 만들어내는 강단 철학자들을 경멸했다. 자기 생각을 말하지 않고 남의 철학을 연구하는 철학자들은 ‘진정한’ 철학자로 간주하지 않았던 그는 심지어 아리스토텔레스를 한 줄도 읽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24세에 그는 철학에 몰두하기 위해 케임브리지를 떠나 노르웨이에서 “수행자처럼 완전히 홀로” 오두막에 살면서 오직 논리학에만 집중한다. 그리고 “모든 것이 자신에게 명료해지기를, 그렇지 않다면 오래 살지 않기를” 신에게 기도한다. 그는 노르웨이에서 한 독창적인 논리학 연구를 《논리학 노트》로 만들어 무어에게 보내 학사논문으로 인정해줄 수 있는지 문의하지만, 서문과 각주, 참고문헌이 없다는 형식상의 미비로 거부당한다. 이에 비트겐슈타인은 돼지들에게 진주(“철학의 다음번 큰 자취”)를 준 것을 후회하면서 케임브리지에서 학위를 얻으려는 계획을 포기한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러셀에게 논리학이 지적인 호기심의 대상이었다면, 비트겐슈타인에게 논리학은 “윤리학과 근본적으로 같았다.” 그것은 “자신에 대한 의무”였다. 따라서 비트겐슈타인이 1차 대전이 일어나자 탈장으로 징집 면제 대상이었음에도 수술을 받고 자원입대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죽음에 직면해서 두려워하는 것은 잘못된 인생의 징표”라고 생각한 그는 “목숨을 걸 만큼 위험한 임무”를 맡기 위해 최전방 보병 부대로 지원한다. 포탄이 날아드는 관측소에 배치된 그는 거의 매일 밤 죽을 것이라 생각하고 신에게 아무 두려움 없이 죽음을 정면에서 마주 볼 용기를 달라고 기도한다. 그리고 죽음을 무릅쓴 작전 수행의 공로를 인정받아 은성무공훈장을 받는다.
전쟁 중에도 계속된 그의 논리학 연구는 원래 논리학의 기초를 다루는 책으로 계획되었으나 생사를 넘나드는 전장에서의 실존적 체험이 반영되어 신과 인생의 의미를 포함한 세계의 본질로 확대된다. 이렇게 전쟁터에서 사선을 넘나들며 완성한 《논리철학논고》는 논리학과 신비주의가 기묘하게 결합된 100쪽도 안 되는 소책자였지만, 후대에는 현대의 고전으로 꼽히게 된다. 하지만 당시에는 작품의 진가를 알아보지 못한 출판사들의 잇따른 거절로 출간에 어려움을 겪었고, 스승인 러셀과 프레게조차 책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비트겐슈타인은 좌절해야 했다. “세계는 사실들의 총체이다”로 시작하는 이 책을 통해 철학의 모든 문제를 해결했다고 생각한 그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라며 철학을 떠난다.
“자, 신이 도착했다”
전쟁 중 톨스토이의 사상에 감화를 받은 그는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막대한 유산을 가난한 예술가들과 누이들과 형에게 나누어주고 가난한 시골 마을의 초등학교 교사로서 소박한 생활을 시작한다. 그러나 “부유하고 이상한 귀족”으로 여겨진 그는 학부모인 마을 사람들과 융화하지 못했고, 학생 체벌 사건으로 재판을 받게 되자 6년 만에 교사직을 포기하게 된다.
그 후 정원사와 건축사를 전전하는 인생의 방황기를 거치지만, 그사이 《논리철학논고》는 빈 학파에 영향을 주고 케임브리지에서 철학 논의의 중심이 되는 등 유럽 학계에서 커다란 반향을 일으킨다. 케임브리지의 천재 수학자 램지와의 만남에서 자신의 철학에 오류가 있음을 깨달은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으로 복귀한다. 케인스는 “자, 신이 도착했다”라는 말로 영국 지성계에 비트겐슈타인의 케임브리지 복귀를 알린다.
가장 실존주의적으로 산 분석철학자
대부분의 철학자들이 단지 자신의 철학을 말로 하는 것에 그치는 데 반해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철학대로 살아가기 위해 평생에 걸쳐 삶과 철학을 일치시키려 분투한 철학자이다. “윤리학과 미학은 하나”라는 자신의 명제처럼 미학적 완성도가 높은 삶을 추구하며 살았다. 자신의 힘으로 번 돈이 아니라는 이유로 엄청난 유산을 포기했고, 1차 대전은 자원하여 참전했으며, 2차 대전 때는 전쟁 환자를 돌보는 병원에서 일했다. 자신의 허영심을 버리기 위해 자신이 살아오면서 저질렀던 ‘죄’들을 글로 써서 여러 친구들에게 고백하고 수십 년 전 체벌한 학생들을 일일이 찾아가 참회하기도 했다. 철학자 박이문 교수는 이런 그를 두고 “정신적 귀족”에 속하는 인물로 평한 바 있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단순히 언어그림이론, 언어게임, 가족유사성을 주창한 분석철학자로만 알려졌던 비트겐슈타인이 여느 실존주의 철학자 못지않게, 어쩌면 더 극단적으로 삶의 의미 문제를 천착한 실존주의자였고, 과학과 이론에 대한 물신숭배를 경멸한 신비주의자였으며, 톨스토이와 러스킨의 사상에 공명했고 소련에서 육체노동자로 살고자 했던 ‘마음으로는’ 공산주의자였음을 알게 된다.
완전한 삶을 꿈꿨던 철학자의 치열한 일생
지적인 명료함이 윤리적 완전성으로 이어진다는 결벽에 가까운 철학적 신념, 러셀과 포퍼를 비롯한 당대 철학자들을 두려워하게 만든 지배적이고 예민한 성격, 젊은 청년들과의 동성애, 자신의 타락에 대한 죄의식과 참회, 직업 철학에 대한 혐오와 노르웨이와 아일랜드에서의 칩거 생활, 철학 교수직을 버리고 소련에서 육체노동자로 살아가려 했던 시도, 숨 막히는 철학적 영감의 탄생과 탈진 직전까지 가는 고통스런 사유의 과정, 러셀, 프레게, 무어, 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