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제공 책 소개

“뜨는 것은 허공과 관련한다. 우리들 세포마다 허공이다. 둘러싼 벽마다 허공이다. 앉은 곳마다 허공이다. 누운 곳마다 허공이다. 허공이 허공을 만나 말을 하다니, 허공이 허공을 만나 약속을 하다니, 허공이 허공을 만나 사랑을 하다니. 울리지 않는데 울리는 전화도, 말하지 않는데 들리는 음성도, 보이지 않는데 보이는 얼굴도 허공의 짓이다. 허공이 허공 속을 떠다닌다. 허공이 점점 크게 자란다.” “뜨는 것은 유랑과 관련한다. 비롯된 곳에 정주하지 못하는 운명이라니. 아무리 애를 써도 도착할 수 없다니. 따뜻한 곳을 찾아 밝은 곳을 찾아 일생을 떠돌아다니는 자들. 금요일 밤마다 기원을 기억해내는 자들. 미친 사랑 노래를 부른다 해도, 만취해 슬피 운다 해도, 돌아갈 곳이란 애초에 없었으니, 절망한 집시들 서로의 몸에 몸을 들여 집이라 부르기도 한다.” ― 뜨다 中. 2013년 새해를 여는 말들은 여느 때와 달리 참으로 무성했다. 경제, 정치, 실업, 온통 새해의 설계도다. 이런 와중에 기억나는 말이 2013년을 여는 교황의 “사색하라”는 말이 그것이다. 지금의 세계경제 위기는 유럽발 금융위기라는 데서 시작했다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종교적인 이유가 아니더라도 로마 교황청은 위기의 유럽 중심에 위치한다. 거기서 “사색하라”는 말이 나왔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에게는 움찔하게 하는 그 무언가가 있음을 알아챈다. 가히 선진의 동네에서나 나올 법한 범상치 않은 말이다. 그러나 이 얼마나 인간에 대한 깊은 성찰이 아니라면 할 수 없는 한없이 따스하고 고귀한 말이란 말인가. 우리도 저와 같을 순 없을까. 작지만 음미해볼 아주 소촐한 책이 한 권 나왔다. 낯선 저자의 <홀림증>이 그것이다. 리얼한 시각에 서서 따뜻하고 감각적인 시를 써온 시인 김박은경의 첫 사진 산문집 <홀림증>(케포이북스, 2012)이 출간되었다. 얼핏 보면 특이할 수도 있고 평이할 수도 있는 책이다. 그러나 한손에 쏙 들어오는 만큼 눈썰미 있는 사람이라면 편한 시간에 무심코 어느 쪽이나 펼쳐보면 되는 그런 책이다. 그리고 찬찬이 들여다보면 묘한 매력과 하찮을 일상들을 심상찮은 시선으로 꽉 채우고 있는 글과 사진, 가히 동사(動詞)들의 향연이라 할만하다. 하나하나의 글 제목에 피동형이든 능동형이든 문법적인 성질을 따지는 것은 이 책에서 별 의미가 없다. 사진이 말해주기 때문이다. 동사라는 사실만이 중요하다. 동사의 매혹과 독자를 홀리는 사진의 어우러짐, 이 책은 단지 그것뿐이다. 이 혼동의 세계에 힐링도 근사한 인문이나 교양도 아니고, 더더욱 먹고살아야할 일용할 양식에 보탬이 되는 것도 아닌, 감히 그것뿐이라니… 책을 보라. 대상에 대한 무한한 ‘홀림’ <홀림증>의 저자 김박은경은 “사진에서는 지나갔던 사람들도 곁에 서있던 나무도 발밑의 풀꽃들도 설명할 필요도 없고 부인할 까닭도 없다”고 말하며, “사진을 찍는 순간의 나와 그 사진을 바라보는 나는 서로 다른 사람인 것만 같다고 고백”한다. “지금의 ‘나’는 바로 ‘여기’에 있지만 또 다른 나는 아직도 ‘그곳’에서 한없이 셔터를 누르고 있을 것만 같은” 이질감과, “사진으로 한번 내 곁에 오면 아무데로도 사라지지 않는 온전히 내 것”이라는 나와 사진의 동일화는 저자로 하여금 찍는 행위에 매혹되게 하였다. 이렇게 서울과 인천, 동경 등지에서 찍은 사진은 <홀림증>으로 묶여 빛의 스펙트럼처럼 환하고 아름답지만, 때론 섬뜩할 정도로 직설적이고 현실적인 이야기를 펼쳐 나간다. 다채로운 31가지의 이야기들 속에서 주요하게 반복되는 모티프는 바로 ‘홀림’이다. 저자 김박은경은 “과연 지금 무엇에 홀려 살고 있는지, 무엇에 홀리고 싶은지”를 스스로에게 되묻고 싶었다고 말한다. 오랜 기간 패션계에서 활동한 저자의 독특한 이력을 바탕으로 한 감각적인 사진을 통해 일상의 모습을 보여주는 한편, 깊이 있는 단어 단어의 바닥까지 파고드는 예리한 시인의 필치는 작가의 31가지 이야기를 매혹적으로 풀어낸다. 특별한 순간과 익숙한 삶의 경계의 글, <홀림증> 저자가 일찍이 사진의 익숙한 듯 다른 그 이질성에 주목했듯이, 카메라 렌즈를 통해서 본 일상은 낯설어진다. 그렇게 들여다보는 삶 역시 낯설다. 홀림이 주는 어감 또한 그러하다. 자아의 의지나 인식과 관계없이 타자에 의해 좌우되는 홀림은 유혹보다 강하다. <홀림증>에서 ‘가다, 듣다, 먹다, 묻다, 사다, 없다, 열다, 웃다, 죽다, 크다’ 등 우리 삶의 ‘익숙’한 서술어를 통해 말하는 ‘특별’한 홀림은 그 익숙함과 낯섦의 경계에 있다. <홀림증>의 사진의 순간은 다시 시인(김박은경)의 글을 통해 이어지는데, 저자는 이러한 특별한 순간을 공유하며 “독자 역시 자신만의 특별한 장소에 이르기를 기대한다”라고 말한다. 황홀한 홀림으로의 초대 언제나 삶의 고통과 현실 속에서 살아내는 생명력에 주목하여 현실과 낭만을 동시에 그려낸 저가는 이번 사진 산문집 <홀림증>에서 역시 깊게 패인 외로움, 그리고 작은 삶의 유혹들의 ‘사이’로 우리를 초대한다. 그리고 진정으로 홀리는 그것을 향해 걸어가자는 김박은경의 목소리는 자신을 끊임없이 소비해야만 하는 이 피로사회에 반가운 화두이다. <홀림증>의 작가 김박은경은 스스로에게, 그리고 독자들에게 31가지 서술어를 통해 질문한다. 지금 제대로 가고 있는지, 듣고 있는지, 먹고 있는지, 살고 있는지 묻는다. 마음과 관계들의 진심에 대해 묻는다. 익숙한 생활 속에서 특별한 것에 매혹당하는 순간을 놓치더라도 그냥 그대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며, 어깨의 힘을 좀 빼고, 무엇이든 지나치게 애쓰지는 말자고 말한다. 삶이 아름답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