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자에게 유일무이한 보물은 누구의 지배도 받지 않고 아무도 지배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자유이고 진정한 자립이며 진정한 젊음이다. 하지만 무수한 욕망과 무수한 정념이 그 길을 가로막아 거기에 도달할 수 있는 자는 아주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가시밭길이다. 투쟁의 연속이며 숨 돌릴 틈도 없다. 그래서 재미있는 것이다. 사는 것의 진정하고도 깊은 맛은 자신이 확신을 갖고 설정한 목표에 도달하는 과정에 있다. -192쪽에서
당신의 젊음을 죽이는 적들은 누구인가
‘캥거루 키드’란 말이 유행했을 정도로 부모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젊은이가 꽤 많다. 이들은 직장에 들어가서도 누가 일일이 가르쳐 주고 명령하지 않는 한 자발적으로 움직이는 법이 거의 없다. 선배를 보면서 일을 배운다거나 상대가 다소 귀찮아 하더라도 따라다니며 묻는 일도 없다. 시키는 일을 타율적으로 로봇처럼 처리할 뿐이다. 마루야마 겐지가 보기에 이들은 이미 ‘젊음이 죽은 자’들이다.
연령적인 젊음이라는 말로 당신 스스로를 예찬하지 않기를 바란다. 청춘 시절과 청년기 한가운데에 있는 당신도 자립이라는 의미에 비추어 보면 이미 늙어 버렸다. 난해한 세계에는 도전하려 들지 않고, 변명과 구실로 그 길을 피하고, 노인처럼 손쉬운 즐거움에 희희낙락하는 것만 생각하고, 유아 시절의 취미에 빠지고, 그 옛날의 소녀 같은 연애를 꿈꾸고, 언제까지나 부모 슬하를 떠나지 않으면서 유유자적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당신. 조금이라도 상처 입는 것이 두려워 이런 자신을 자각하게 할 만한 일에는 접근하려 하지 않는다. 타인과의 접촉을 꺼리고, 나르시시즘의 울타리 안에 자신을 가둔다. -162쪽에서
산문집 《나는 길들지 않는다》에서 겐지는 ‘젊음’을 집요하게 문제 삼는다. 여기서 젊음이란 “단순히 육체적인 젊음이나 세포의 건강함, 신체 기능의 탁월함을 뜻하는 말이 아니다.” 젊음은 곧 자립이다. 즉 온전히 자신에만 의존해 살아가는 것을 뜻한다.
적들에 둘러싸인 현대인
그런데 우리는 젊음을 죽이려는 적들로 에워싸여 있다. 현대 사회에서는 불행하게도 태어나자마자 자립한 젊음을 박탈당하고 만다.
당신 주위에는 당신의 자립한 젊음을 죽이려는 적으로 넘쳐난다. 당신이 풍요로운 환경에 있을수록 적의 수는 더욱 많을 것이다. 사회 시스템이 편리해지고 고도해지고 복잡해지면서도 적은 는다. 그러니 어지간히 자각이 분명하고 각오가 굳지 않는 한 야생동물의 일원으로 생기 넘치는 삶을 산다는 것은 어려울지 모르겠다. 태어나기를 잘했다는, 적어도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생애를 보내기란 힘들지도 모른다. -18쪽에서
그럼, 구체적으로 어떤 것들이 우리의 젊음을 죽이는가.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에서도 신랄하게 몰아붙였던 부모, 그중에서도 어머니의 사랑이다. 어째서인가.
그녀들은 자식을 소유물로 여기면서 지배한다. 자식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앞날을 위해 자신의 분신인 그들이 사회적인 성공을 거둘 수 있도록 온갖 지원을 아끼지 않고 손발이 닳도록 뒷받침한다. 그리고 그런 자신이야말로 은혜로운 둘도 없는 존재라는 것을 자식에게 시도 때도 없이 세뇌한다. -26쪽에서
어머니가 왜곡된 애정으로 아들을 대할 때마다, 하나에서 열까지 시시콜콜 뒤를 봐줄 때마다, 고민을 털어놓고 의논할 상대도 도움을 줄 수 있는 상대도 어머니밖에 없다고 세뇌할 때마다, 아들의 젊음은 점점 더 죽어 간다. 그런 어머니 역시 오래전에 젊음을 잃어버린 상태면서 말이다. 결국 아들은 어머니의 보살핌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는 ‘어른아이’가 되어 버리고 어머니 같은 아내를 만나는 악순환 속에 갇혀 버리고 만다.
술이 없었다면 혁명은 거듭되었을 것이다
가족보다 더한 최강의 적은 바로 직장이다. 겐지는 “한 번 직장인의 세계에 몸담고 나면 젊음이 말살당해 그저 얼간이로 추락하는 도리밖에 없다.”고 일갈한다.
당신이 만약 안이한 판단으로든, 숙고 끝에 내린 결정으로든 직장인이라는 직업을 선택했다면, 그 순간 자유롭게 살 권리의 90퍼센트를 포기한 셈이 된다. 즉 당신은, 누가 강압적으로 뺏은 것도 아닌데, 스무 살 전후에 일찌감치 노쇠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55쪽에서
왜 그러한가. 직장만큼 안정과 안일함과 안락에 젖어들게 하는 건 없기 때문이다. 그건 죽은 자의 상태다. “분투, 혼란, 내일 자신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두려움”이야말로 산 자의 상태기 때문이다. 또한 “젊음의 핵을 이루는 것은 그 어떤 경우에도 자신을 타인에게 팔아넘기지 않는다는 자긍심”인데, 직장이란 곳은 굴욕과 굴종을 내면화하는 곳이다.
젊음을 죽이는 근원적 적, 국가
젊음을 죽이는 더 근원적이고 거대한 것은 무엇인가. 바로 국가다. 국가는 철저히 소수 부유한 지배층을 위해 복무한다. 지배층이 남몰래 두려워하는 것은 자신들을 떠받들고 있는 그 무수한 서민이 들고일어나는 상황이다. 노력한 것 이상의 높은 지위와 풍족한 생활을 만끽하고 있는 이들은 국민의 분노가 자신들을 향하지 않도록,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분노를 해소하기 위해 고삐를 늦추는가 하면 때로 분출구를 마련해 놓기도 한다. 겐지는 그 대표적인 분출구가 술과 복권임을 일깨운다. 복권은 일확천금이란 헛꿈을 꾸게 함으로써 “노예의 처지에 이의를 제기하고 반란으로 발전할 가능성을 아예 봉쇄”해 버린다. 어디서고 마음만 먹으면 마실 수 있는 술은 더 위험하다. “노예들의 분노를 해소하기 위한 적정선의 마약, 그것이 바로 술”이다.
직장인이나 고용인이라는 노예들이 대부분이고, 그런 현실에 저항하지 않는 자들이 이렇게 많은 것은 아마 술의 마력 때문이 아닐까 한다. 아무리 굴욕적인 처사를 당하고 진저리나는 생활이 구질구질하게 계속되어도 자립과 독립의 길을 걸으려 하지 않는 것은 술이 방해하기 때문이다. 만약 이 세상에 술이 없었다면 하루가 멀다 하고 폭동과 반란이 일어났을 것이고, 혁명과 정변 역시 수도 없이 거듭되었을 것이다. 지금과 같은 비정상적인 질서는 절대 성립되지 않았을 것이다. -135쪽에서
술 앞에서는 답답함도 슬픔도 분노도 맥을 못 춘다. 술이 들어가면 그 화살은 국가와 사회를 향하는 일도 없어지고, 어쩌면 이상적인 사회와 국가를 재건하는 원동력이 될 수도 있었을 감정의 폭발도 그 기회를 잃고 만다. 정당한 권리 주장도 다음 날이면 숙취의 두통 속에 매몰되고 만다. 출근하기 위해 옷을 차려 입고 나면, 자신에게는 이 길밖에 없다느니, 이 정도가 어울리는 인생이라느니,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비인간적인 만원 전철에 몸을 싣는다. 그리고 직장에 도착할 무렵이면 이미 하루에 필요한 에너지의 절반은 소모되고 만 상태이다. -136쪽에서
기자들의 정의를 믿지 마라
국가와 마찬가지로 매스컴 역시 젊음을 죽이는 적이다. 겐지는 기자들이 “국가에서 위정자들에게 유리하도록 왜곡해서 흘리는 정보를 실로 안이하게 받아들여서는 기껏해야 비판도 못 되는 코멘트를 곁들이는 선에서 기사로 내보내고, 뉴스로 보도한다”고 비판한다. 또한 그들 역시 상부의 뜻에 복종할 수밖에 없는 고용인 신세에 불과함을 상기시킨다.
기자들이 자신들은 평범한 직장인과는 다르다, 사회의 정의를 책임지고 있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해도, 그들 역시 이쪽저쪽의 안색을 필요 이상 살피며 살 수밖에 없는 직장인이다. 상부의 뜻에 따를 수밖에 없는 고용인 신세에 불과하다.
이 때문에 날카로운 촉각을 작동시켜 시대의 심각한 전조를 감지했다고 해 봐야 글을 써 철저하게 저항하는 선까지는 가지 못한다. 이렇게 만성적인 중도 포기와 자기 몸 사리기에 바쁘다는 점에서는 다른 업계 직장인의 의식과 별 차이가 없다. 당근이나 던져 주고 먹잇감을 눈앞에다 들이밀면 입을 꾹 다물고 물러선다. 자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