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순과 미스터리로 가득 찬 과학의 속살을 들여다보다
과학과 인문학을 넘나드는 통합적 사유의 새로운 패러다임
오늘날 과학은 그 어느 때보다 첨예한 모순과 기이한 미스터리로 가득 차 있다. 지구의 위기를 주장하는 생태주의자와 과학기술의 해결능력을 믿으라는 과학자, 원자력이 안전하다고 말하는 정부와 그 파멸성을 경고하는 운동가…. 우리는 누구의 말을 신뢰해야 하는 것일까? 『브뤼노 라투르의 과학인문학 편지』(원제: Cogitamus)는 이러한 ‘논란 속의 과학’을 단순한 찬성이나 반대에서 벗어나 정치-사회적 관계까지 포괄하는 인문학의 지평에서 새롭게 바라보게 하는 책이다. 2012년 초판에 이어 2023년 완전 개정판으로 재출간되었다.
저자 브뤼노 라투르는 현재 프랑스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 영향력을 가진 과학기술학자이자 그 이론의 폭과 깊이에 있어서 철학, 사회학계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고 있는 석학이다. 철학 쪽에서는 데리다와 들뢰즈, 사회학 쪽에서는 피에르 부르디외 이후 이렇다 할 사상가가 등장하지 않는 상황에서 라투르는 ‘21세기의 헤겔’이라 불릴 만큼 총체적이고 독보적인 사유를 보여주는 학자로 꼽힌다.(『르몽드』)
이 책은 라투르 스스로 자기 사상의 요체를 편지 형식으로 소개한 것으로, 과학이 객관적이고 중립적이며 자율적이라는 통념을 뒤엎고 근대적 세계관이 만들어낸 과학과 정치, 자연과 사회의 이분법에 이의를 제기한다. 폭넓은 인문학적 시야와 도발적인 과학사 해석을 바탕으로 한 여섯 편의 편지는, 아르키메데스에서 영화 〈아바타〉에 이르는 생동감 넘치는 사례들을 통해 과학기술로 둘러싸인 현대 사회의 작동방식을 적나라하게 해부하며, 철학과 자연과학이 그간 씨름해왔던 인간-자연-사회의 존재방식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아리아드네의 실을 제시한다.
■ 과학기술은 언제나 사회적으로 ‘번역’된다 - 아르키메데스의 지렛대에서 경구피임약의 개발까지
아르키메데스가 지렛대의 원리를 발견한 최초의 과학자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가 지렛대의 원리를 응용한 최초의 전쟁기구를 만든 과학자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물리적 힘의 강-약 관계를 전복하는 지렛대의 원리는 아르키메데스에 의해 공성전에서 맞선 적대적 주체들의 힘(권력) 관계를 전복하는 데 이용되었다. 그러나 과학과 전쟁의 이런 친근성은 금세 잊혀지고 말았다. 첫 번째 편지에서 라투르는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나오는 아르키메데스와 히에론 왕의 이야기를 인용하며 과학과 전쟁의 관계에 대한 망각, 즉 과학과 정치의 이분법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보여준다.
#1. 아르키메데스는 지렛대의 원리를 발견하고 몹시 기뻐하며 시라쿠사의 히에론 왕에게 자랑을 하러 간다. 히에론 왕은 아르키메데스에게 그 원리가 실제로 유용한지 증명해 보이라고 하고, 아르키메데스는 성채 공방전에서 쓸 수 있는 전쟁기구를 만들어 시라쿠사를 공격하는 로마 군대를 홀로 격퇴함으로써 히에론 왕에게 과학의 위력을 실증해 보인다. 그러나 3세기 후 이 역사적 일화를 소개한 플루타르코스는 아르키메데스를 어떤 실용적 기술에도 관심 없는 고결한 순수과학자로 그려낸다.(26~34쪽 참조)
라투르가 지적하듯이 플루타르코스의 이야기는 모순과 미스터리로 가득하다. 아르키메데스는 지렛대의 과학적 원리를 가지고 히에론 왕에 대해 과학이 정치에 대해 우위를 점하는 ‘힘의 전복’을 몸소 실현해 보였을뿐더러, 나아가 국가 간의 힘의 관계를 전복시키고는, 다시 은둔으로 돌아가는 학자의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플루타르코스는 아르키메데스를 정치에 전혀 관심 없는 ‘고결한’ 인물로만 그려냄으로써, 이후 서양 사상에 있어서 정치와는 무관한 과학의 지고성과 고결성을 웅변하는 은유적 이야기가 정착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라투르는 이 일화에서 과학의 자율성이란 신화일 뿐이며, 실제로는 다양한 ‘번역’의 방식으로 과학이 기능한다고 지적한다. 즉 과학은 언제나 정치와 사회 등 여타 삶의 영역으로 ‘우회’하거나 그 영역들을 ‘구성’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과학과 정치가 서로 무관한 두 영역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함께 얽혀서 작동하는 두 종류의 ‘행위’가 있을 뿐이며, 이 행위들은 필요에 따라 얼마든지 결합-조립-번역될 수 있다는 것이다.
#2. 페미니스트 운동가 마거릿 생어는 원치 않는 임신에 발목 잡힌 수많은 여성들을 해방시키고자 했지만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화학자 그레고리 핀커스가 만든 스테로이드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반면 핀커스는 자신의 발명을 피임약으로 개발할 자금이 없었고, 또 자신의 연구가 여자들을 타락시킬 수 있다는 우려 또한 가지고 있었다. 이들의 고민들은 엄청난 재산을 가진 캐서린 덱스터 맥코믹을 만나면서 해결된다. 이들이 함께 손을 잡으면서 1960년에 경구피임약이 개발되기에 이른다.(41~44쪽 참조)
경구피임약은 과학의 사회적 번역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경구피임약의 발명에는 단순히 스테로이드의 과학적 발견만이 아니라 다른 수많은 사회적 ‘행위’들이 개입되어 있었다. 과학적 발견이 페미니즘 정치와 사업가의 재산이라는 ‘행위자’들과 결합됨으로써, 경구피임약이 사회정치적 관계를 재구성하는 촉매제로 기능했기 때문이다. 이렇듯 근대의 이분법적 구분과는 달리 실제 현실에서는 과학-정치-경제가 뗄 수 없이 붙어 있다. 라투르는 이러한 얽히고설켜 있는 세계를 우리가 공유하는 ‘공통세계’(코스모스)로 표현하며, 과학적 논란 속에서 길을 찾기 위해 이 공통세계를 함께 생각해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 근대화의 역사에서 생태화의 역사로 - “과학 없는 인문학은 개코원숭이들의 인문학일 뿐이다”
과학이 더 이상 자율적인 것이 아니라면 사회 역시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라투르는 두 번째 편지에서 과학과 사회, 자연과 인간 사이의 관계는 역사가 진행될수록 더욱 밀접해진다고 말한다. “시간 속에서 앞으로 나아갈수록 인간의 행위, 기술의 사용, 과학을 통한 경유, 정치의 침입을 구분하기가 ‘점점 더 불가능해집니다.’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물질화는 사회화요, 사회화는 물질화다”라는 모토가 나온 겁니다.”(76쪽) 우리는 자연의 제약조건에서 서서히 해방되는 ‘근대화의 역사’를 거쳐 온 것이 아니라 자연과 인간이 더욱 밀착되는 ‘생태화의 역사’를 거쳐 왔다는 것이다.
“오늘날에는 농업도 유전학 실험실을 거치든가 최소한 종자선별기는 경유하게 마련입니다. 사회학자나 도시계획가의 보고서에 영향을 받지 않은 도시계획과 고위공무원의 행위가 있을까요. 소아과 논문이나 심리학자의 견해에 영향을 받지 않은 초보엄마의 육아가 있을까요. 프로이트를 외면할 수 있는 사랑싸움 따위가 어디 있겠습니까.”(75쪽)
이런 점에서 라투르는 우리 시대를 ‘새로운 단계에 도달한 시대’로 일컫는다. 그러나 이런 과학기술적 우회가 과거에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산업혁명이 근대의 동역학 없이 가능했겠는가? 오늘날 우리는 점점 더 복잡해지는 과학기술적 우회들을 경유할 뿐이다. 그런데 오늘날의 과학기술적 우회들은 예전처럼 눈에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쉽게 인식하기도 어렵다. 게다가 기후 온난화 문제에서 볼 수 있듯이 과학기술의 결과는 전 지구적으로 나타나기까지 한다. 여기서 인문학적인 조건이 고려되지 않은 과학은 위험하며, 과학 없는 인문학은 원숭이 놀음에 지나지 않는다는 신랄한 비판이 나온다. 라투르가 ‘과학인문학’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이러한 문제제기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자연과 인간이 더욱 밀착되고, 과학과 사회가 더욱 얽히고설키는 우리 시대에서는 과학과 인문학, 자연과 정치를 함께 사유할 수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 과학혁명이 아니라 실험실이 있을 뿐이다 - 예기치 않은 사물과 사회의 변형은 실험실에서 시작된다
이제 라투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