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제공 책 소개

출판사 제공 책 소개

“가난한 개인이 그 자체로 세계가 되는 문화기술지에서 빈곤은 부단한 과정이자 고된 분투로 등장한다” 당연한 의존을 문제 삼고 삶을 끝없는 불안으로 포위하는 빈곤 통치에 가려진 세계와 가능성을 찾아서 ―인류학자가 동행한 빈곤의 과정과 확장되는 빈자의 외연 지구상의 모든 생명은 빈곤과 연결되어 있다. 그것은 우선 나와 내 가족의 삶에 달라붙을 수 있다. 배고픈 삶, 전망 없는 삶에서 기어 나오는 공포, 분노, 무력감이 자기비하로, 피붙이에 대한 폭력으로 치닫는다. 쪽방촌, 고시원, 다세대주택, 임대아파트 단지에 살면서 지척의 가난을 보고, 듣고, 냄새 맡는다. (…) 어디 인간뿐인가. 자연에 대한 수탈과 착취에 따른 비인간 생명의 아우성은 전염병, 홍수, 산불 등 인간이 포착 가능한 형태로 번역되어 극히 일부분일지언정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이 책은 인류학자인 내가 경험적 연구를 통해 빈곤을 학술적·실천적 주제로 등장시켜온 과정에 대한 기록이다. 지난 20여 년간 한국과 중국의 여러 현장을 기웃거리면서, 나는 우리가 주목해야 할 빈곤을 새롭게 발견하고 쟁점화하는 작업에 노력을 기울였다. 무허가 판자촌, 공장지대, 슬럼화된 노동자 거주지 등 빈곤의 전형성이 도드라진 현장에서 전형적이지 않은 빈곤의 역사성과 관계성에 주목했고, 대학 수업, 이주자들의 공간, 국제개발과 자원봉사 무대처럼 서로 이질적인 현장에서 빈곤이 실존의 불안으로 현상하는 공통성을 포착했다. (…) 인구 다수가 불평등 구조의 피해자를 자처하는 ‘경계 없는 불평등’의 시대, 다른 한편에선 금융자본주의와 팬데믹을 거치면서 부의 양극화가 가파르게 진행 중인 시대에 빈곤을 긴요한 정치적·윤리적 의제로 소환하려면 어떤 접근이 필요할까? _「서문」 과정으로서의 빈곤 ―미궁과 진창 속 자기 자리를 찾아서 이 책은 빈곤을 과정으로 본다. 그 과정 속에서 ‘빈곤이란 무엇인가, 빈자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언제나 미결인 상태로 남는다. “어디에나 있다”고 했던 빈곤은 주변을 둘러보면 다시 “어디에도 없는” 것이 된다. 돈 없고 집 없고 먹을 것도 없고 돌봐줄 이도 없는 상태, 물질적 결핍과 경제적 고립, 약자, 피해자, 수급자, 의존자 따위의 전형적 분류로 답변되어왔던 이 질문에 간단히 답하기를 부러 실패하고 내려진 답을 거듭 번복하면서, 빈곤은 빈자에게 그렇듯 독자에게도 과정이 된다. 그것은 어떤 과정일까? 도시 빈민, 공장노동자, 수급자, 불안한 청년, 농민공, 이주자, 여성, 토착민, 노예, 그리고 역사 이전부터 착취당해온 비인간까지…… 이 책에 소환되는 빈자에는 경계가 없다. 빈자의 외연은 이 사회의 통치 방식과 그에 연루된 사람들의 관계 속에서 계속 확장된다. 가난한 이의 생활을 일정 기간 지켜보고 그의 생애 발걸음에 보폭을 맞추다 보면 물질적 궁박함으로 표상된 빈곤이란 상태가 실은 실존의 결핍을 메우려는 끝없는 분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주어진 조건이 어찌됐건 취약한 존재가 세계 속에서 진정한 자기 자리를 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과정, 그것이 빈곤이라고 20년간 빈곤을 연구해온 저자는 이야기한다. “이 나라는 내가 진정으로 어떤 인간인지 알려고 하지 않는다.”(117) 이 책의 문화기술지에 등장하는 어느 청년 노동자의 말은 빈곤 과정의 본질을 정확히 꼬집는다. 이 사회에서 누가 빈자인지를 가려내고 그의 빈곤을 처리하는 것―그의 의존을 자립 상태로 만드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그가 어떤 인간인지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빈곤 과정에의 동참은 거기서부터 시작되며, “별 볼 일 없는 일상을 함께 견디며, 그럼에도 누구든 지금보다 더 나은 세계-내-자리를 확보할 자격이 있음을 서로 배우는” 것이 인류학자인 저자가 빈곤과 동거하고 빈곤을 정치적 의제로 소환해온 방식이다. 빈민을 구성하고 빈곤을 배치하는 빈곤 통치와 빈곤 산업 진짜 가난, 가짜 가난이 따로 있다는 믿음은 오랫동안 가난 논쟁의 불씨가 되어왔다. 2019년 어느 설문조사에선 “나는 가난하다”고 응답한 이의 11퍼센트가 연봉 6000만 원 이상, 자가 소유자가 52퍼센트였는가 하면, 20억짜리 집을 소유하고도 “전형적인 하우스푸어 중산층”을 자처한 글이 온라인에서 화제가 됐다. 너 나 할 것 없이 자기는 가난하다고 이야기한다. 박완서 단편소설 「도둑맞은 가난」부터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 게임」까지, 가난이 무엇인지 안다면 아는 우리에게 가공된 가난 서사에 이입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많은 사람이 세간의 가난 서사에 억울해할 수 있고,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 수 있으며, 심지어는 좌절 내지 열광까지 할 수 있다. 그럼에도 현실에 버젓이 존재하는 타인의 빈곤은 여전히 마주치고 접속하기 어려운 것으로 남아 있다. “살면서 빈곤을 본 적이 없어요.”(6) “생활고를 비관해 목숨을 끊은 가족, 엄동설한에도 전기장판을 마음 편히 들여놓을 수 없는 쪽방 주민, 코로나로 인한 봉쇄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바이러스 감염보다 굶주림에 더 시달리는 이주자의 이야기”…… 미디어를 통해 전해지는 가난은 특별할 것 없이 복잡하고 지난한 빈자의 현실과 거리를 두며 세계를 획정하고 서사를 정제해 결과로서의 빈곤으로 제시될 뿐이다. 그 결과는 가난의 당사자가 누구인지를 알려 하지 않는다. 그 하나의 세계보다는 개별 서사를 뭉뚱그린 ‘빈곤 문제’의 해결이 앞세워진다. 통치 체제가 빈곤을 분류하고 관리해야 할 문제로 삼으면서, 빈곤을 모두의 의제로 삼고 그에 맞서는 비판과 저항에 동참하는 일은 오히려 요원한 과제가 됐다. 이렇게 된 배경에는 ‘의존’이라는 당연한 존재 양태를 문제시하는 빈곤 통치, 빈곤 산업이 자리한다. “가난은 동서고금의 현상이지만, 오늘날 우리가 이를 ‘빈곤’이란 개념으로 문제화하고, 이에 개입하기 위한 대상으로서 ‘빈민the poor’을 구성하게 된 것은 근대 이후”라고 이 책은 지적한다. 가난을 물질적 결핍에 기반해 생각한다면 인류 역사는 가난의 역사이고, 가난을 벗어나 목숨을 지키려는 생존의 역사다. 약육강식의 전쟁도, 함께 살아내려는 나눔도 이 역사의 일부다. 벗어나길 갈망한다는 점에서, 가난에는 부정否定성이 짙게 배어 있다. 종교적 신념에 따른 자발적 가난이라고 예외로 봐야 할까. 중세 유럽을 연구한 학자들은 기독교의 등장이 빈곤과 자선에 종교적 가치를 부여함으로써 인식의 전환을 가져왔지만, 이 시대에도 빈곤에 대한 시선은 이중적이었다고 말한다. 종교적 실천으로서의 빈곤은 찬양받았지만, 현실에서 어쩔 수 없이 겪는 빈곤은 죄의 대가이자 신의 처벌로 여겨졌다.”(28~29) 요컨대 빈곤은 구성된다. 기초생활수급제도가 마련되고 사회보장 수준이 개선되는 와중에도 이러한 구성에 의해 가난은 ‘증명해야 하는 것’으로 남고, 실업 질병 노령화 등 취약한 삶에서 맞닥뜨리는 현실은 ‘노동능력 상실’이라는 부담이 되며, 의존은 ‘지긋지긋한 결함’으로 낙인찍히고, 변화는 ‘통제 가능한 수준’에 고착된다. 여기서 노동은 가치판단의 절대 기준이 되곤 한다. 노동 대 빈곤, 노동자 대 빈자라는 이분법은 이런 구성 속에서 “후자의 열위를 정당화한다”. 빈곤 통치의 역사는 인간에게 노동을 강제하기 위한 일련의 지식과 제도를 구축해온 과정이다.(105) “역설적으로 봉사자, 활동가, 정책 실무자, 연구자, 예술가, 기자 등 빈곤을 어떤 식으로든 재현하고 쟁점화하는 매개자・대화자 집단은 빈곤 문제의 해결이 요원해 보일수록 역설적으로 증가했다”는 점은 이런 맥락에서 주목할 만하다. 관계자, 조력자, 재현자를 자처하는 사람들도 결국은 빈자에게 의존한다는 것. 빈민이 이룬 공동체와 빈민(주민)운동은 일찍이 당연한 존재 양태로서 상호의존성을 체화하고 실천해왔다. 이렇게 모두가 빈곤의 연결망에 깊이 연루된 세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