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는 입과 먹는 입

김항
33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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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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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명)
저자는 이 책에서 ‘카오스모스’라는 안개에 휩싸인 오늘날의 시대가 요청하는 젊음의 사유, 민족(주의)이 아니라 글로벌한 시각에서 출발하는 폭넓은 사유를 새로운 사유의 성좌들 속에서 제시해보려고 한다. 인문학계는 1900년대 유행한 포스트모더니즘 이후 ‘인문학의 죽음’이라는 말처럼 지적 침체와 무기력증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지금은 ‘인문학’이 아니라 ‘인간’이 쉽게 쓰레기가 되며, 호모 사케르, 즉 살아 있되 죽어 있는 자가 부지기수로 양산되고 있다. 이 책은 이처럼 복잡하고 온갖 것이 뒤엉켜 있는 상황에서 ‘지금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벤야민의 용어를 빌리자면) 새로운 사유의 성좌들 속에 새로이 배치해 앞으로의 사유의 항로를 탐색하려는 진중한 고민이라고 할 수 있다. 발터 벤야민과 조르조 아감벤 그리고 칼 슈미트가 저자가 호출하는 새로운 성좌들인데, 이러한 이름만으로도 벌써 우리 지식계에서는 논란이 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자연적이고 본래적인 것을 인위적이고 비본래적인 것으로 전유하는 분할과 결정이라는 폭력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는 목소리를 언어로, 생명을 법으로 이끄는 폭력이며, 그렇기에 인간이 스스로(동물/자연)를 부정하고 스스로(인간/작위)가 되려는 운동이기도 하다. 인간을 인간이게끔 해주는 이러한 폭력이야말로 ‘정치적인 것(das Politische)’을 구성하는 최소단위에 다름 아니고 말이다. (- 저자의 말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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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역자

목차

What's up 총서를 발행하며 5 감사의 말 11 서론 13 01 새로운 성좌를 찾아서 말하는 입과 먹는 입 23 02 새로운 성좌의 좌표들 독재와 우울, ‘최후의 인간’을 위한 결정 혹은 각성 45 국가, 전쟁, 노마드 95 댄디와 주권 133 탈관계의 관계, 관계의 탈정립 157 03 몇 가지 성좌의 배치들 정치 없는 국가, 국가 없는 역사 195 홀로, 다시 또 다시, 나-서기 237 아직 사람을 먹지 않은 아이를 구하라! 271 국가의 적이란 무엇인가 295 주 316 서문

출판사 제공 책 소개

여기 글로벌한 사유의 새로운 젊음이 있다. 포스트모던과 ‘탈주’를 넘어 새로운 개념들의 성좌들을 통해 지적 무기력증에 빠진 우리에게 던지는 젊은 사유의 과감하고도 지적인 도전장! 시대가 요청하는 새로운 젊음의 사유는 ‘바로 여기 오늘날의 로두스 섬에서’, 글로벌하게 그리고 생명을 둘러싼 정치를 중심으로 펼쳐져야 한다. 저자는 이 책에서 ‘카오스모스’라는 안개에 휩싸인 오늘날의 시대가 요청하는 젊음의 사유, 민족(주의)이 아니라 글로벌한 시각에서 출발하는 폭넓은 사유를 새로운 사유의 성좌들 속에서 제시해보려고 한다. 이 책은 지금까지 인문학적 담론을 이끌어온 소위 386세대가 아니라 1990년 세대, 즉 광주와 1987년 세대가 아니라 서태지와 IMF 세대인 1990년대 세대를 대표하는 신진 ‘사상가’ 중의 하나로 주목받고 있는 저자의 신선한 문제의식과 과감한 도전의식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앞으로 우리 인문학계의 새로운 풍향을 가늠하는 데 여러 가지 시사점을 준다. 인문학계는 1900년대 유행한 포스트모더니즘 이후 ‘인문학의 죽음’이라는 말처럼 지적 침체와 무기력증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지금은 ‘인문학’이 아니라 ‘인간’이 쉽게 쓰레기가 되며, 호모 사케르, 즉 살아 있되 죽어 있는 자가 부지기수로 양산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자본주의의 새로운 대두에 대해 ‘탈주’ 등의 대안이 제시되었지만 지금은 오히려 자본이 노동(력)을 체제 바깥으로 ‘탈주’시키고 있는 형국이다. 그리고 아직도 우리 지식계 일각에 공고히 자리 잡고 있는 민족주의 흐름도 자본주의의 ‘제국’화와 동요 앞에서는 비판적 예각을 잃어가고 있다. 이 책은 이처럼 복잡하고 온갖 것이 뒤엉켜 있는 상황에서 ‘지금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벤야민의 용어를 빌리자면) 새로운 사유의 성좌들 속에 새로이 배치해 앞으로의 사유의 항로를 탐색하려는 진중한 고민이라고 할 수 있다. 발터 벤야민과 조르조 아감벤 그리고 칼 슈미트가 저자가 호출하는 새로운 성좌들인데, 이러한 이름만으로도 벌써 우리 지식계에서는 논란이 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저자에게 벤야민은 ‘비평가’가 아니라 ‘정치 이론가’이며, 슈미트 역시 ‘나치즘’을 탈색한 정치이론가일 뿐이다. 저자는 이들 모두를 정치철학적으로 새로 독해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시도는 2000년도까지 한국 지식계의 주요 참조항이었던 마르크스나 포스트모더니즘 이론가들을 모두 벗어나 있다는 점에서 신선한 도전임과 동시에 새로운 논쟁을 불러오기에 충분한 입장일 것이다. 실제로 말년의 푸코가 ‘프랑크푸르트 학파를 일찍 알았더라면’이라고 회고한 바 있듯이 저자의 이 책은 프랑스 철학의 숨은 배후였던 1920~1930년대 독일 사상가들을 배경으로 우리 시대를 새로이 독해하고 있는데, 이것은 동시에 프랑스의 포스트모더니즘에 몰두해 있던 우리 사상계에 새로운 좌표축을 제시해줄 수 있을 것이다. 말하는 입에서 먹는 입으로 이 책은 자연적이고 본래적인 것을 인위적이고 비본래적인 것으로 전유하는 분할과 결정이라는 폭력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는 목소리를 언어로, 생명을 법으로 이끄는 폭력이며, 그렇기에 인간이 스스로(동물/자연)를 부정하고 스스로(인간/작위)가 되려는 운동이기도 하다. 인간을 인간이게끔 해주는 이러한 폭력이야말로 ‘정치적인 것(das Politische)’을 구성하는 최소단위에 다름 아니고 말이다. - 저자의 말 중에서 한국에서 1980년대가 이데올로기의 시대이고 1990년대가 문화의 시대였다면 오늘날처럼 일상에서 정치와 경제 또는 그와 관련된 용어들이 거리낌 없이 쓰인 적도 드물 것이다. ‘전 지구적 테러’에 맞선 테러와의 전쟁 또한 우리를 공항 검색대에서, 선진국의 도심에서 심심찮게 가로막는다. 이전의 안보 위기와 달리 경제 상황에 따른 ‘국가 위기’ 또는 그에 대응하기 위한 갖가지 조치들이 일상의 평화를 혼돈 속으로 몰고가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하지만 오늘날의 사상과 철학들에서는 그와 관련한 시원한 해답을 찾기가 그리 쉬운 것이 아니다. 게다가 지금까지 우리가 ‘정치적’이라고 알고 있던 것들은 이제 의미를 거의 상실한 듯 보이기까지 한다. 이런 상황은 ‘경제’에서도 그다지 다르지 않다. ‘경제’가 크나큰 화두였던 지난 대선이후 바로 ‘경제’는 장밋빛 꿈에서 악몽으로 바뀌어 버리고 말았다. 경제는 달콤한 과일에서 생계와 ‘일자리’ 문제로 줄어든 지 오래이며, 이 생계 문제는 용산 철거 현장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에서처럼 폭력과 함께 도심 한복판에서 아찔하게 펼쳐진다. 이제 문화나 이데올로기는 정작 종말을 고하고 모든 것이 정치화되고, 모든 사람이 ‘정치적 동물’이 되어가고 있는 듯하다. 경제 또한 ‘일상의 풍요’를 위한 달콤한 과일에서 글로벌 경제 위기와 함께 생계 혹은 생존과 직접 관련되어 있는 공포의 대상으로 바뀌어가고 있다. 이제 경제는 갈수록 초라해지고 정치화는 점점 일상적으로 첨예화되는 시대가 우리가 사는 새로운 시대의 초라한 초상이지 않을까? 이처럼 ‘말하는 입’과 ‘먹는 입’의 새로운 위상은 자본과 국가 그리고 정치와 관련해 어떠한 모습을 그려나갈까? 일상의 문제에서 거대하지 않은 담론으로 ― 정치적인 것이 일상의 핵심으로 그러나 저자에 의하면 인간은 “말하는 입과 먹는 입 어느 쪽과도 일치할 수 없으며”, 말하는 입과 먹는 입을 분할, 혹은 결정하는 것은 원래부터 정치 고유의 활동이었다. 그 분할과 결정이라는 ‘정치적인 것’을 구성하는 최소단위의 다른 이름이 폭력이고 말이다. 폴리스(도시 국가)의 성립과 함께 정치는 폴리스 바깥의 인간과 폴리스 안의 인간, 그러니까 먹는 입과 말하는 입을 끊임없이 분할하려 했다. 먹는 입은 폴리스의 탄생과 함께 폴리스 밖으로 떨어져 나갔으며, 폴리스는 이 먹는 입을 배제함으로써 폴리스 내부의 존재인 말하는 입과 함께 폴리스 자신의 존재를 유지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먹는 입이 폴리스의 성립과 함께 만들어진 이상 이 분할은 불가능한 시도이다. 폴리스 자체에 이미 이 먹는 입이 탄생한 흔적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폴리스는 애초에 나누어질 수 없는 두 요소를 ‘분할’이라는 과정을 통해 나누며 자신의 존재를 존립시켜왔던 것이다. 이런 불가능한 분할의 시도, 소위 ‘법-권리와 몸-생명, 달리 말해 말하는 입과 먹는 입을 반복해서 분할하는 것이 우리가 말하는 정치라는 것의 불가능하면서도 유일한 실천’이다. 그러나 이 둘은 둘로 분할할 수도 없거니와, 이 분할을 멈추기 위해 어느 한쪽으로 ‘결정’하는 일은 불충분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위험하기까지 하다. 정치와 폭력은 쌍둥이로 태어났기에, 그리고 정치가 시도하는 분할과 결정이라는 폭력은 종종 실제의 폭력으로 드러나기에 말이다. 저자는 그 예를 독일의 나치즘과 한국의 광주에서 찾아낸다. 순수하고 고귀한 혈통과 건강하고 아름다운 육체로 정치의 대상을 ‘결정’한 나치즘은 강제수용소를 통해 특정한 혈통과 육체를 말살했다. 따라서 법-권리와 몸-생명의, 즉 법적 주체의 가면을 벗겨 발가벗게 된 생명체가 폴리스의 주체와 대상이 되었던 것이고, 그 결과는 야수들의 올림픽이었다. - 본문 중에서 그 순간 광주는 한국 지도에서 사라졌다. - 본문 중에서 저자에 의하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결정’이 아니며 지금까지 그래왔듯 말하는 입과 먹는 입을 분할하려는 끝없는 시도를 반복하는 일도 아니다. 필요한 것은 분할과 결정을 불러오는 존재 자체, 말하는 입과 먹는 입으로 ‘분화된 인간’ 자체를 없애는 일이다. 기묘한 전도를 거쳐 모순적이게도 ‘분할로서 정의된 인간’을 없애야 한다. ‘가면과 속살을 송두리째 없애야 하고’, ‘이미 분할된 두 가지 생명을 가진 인간이라는 존재를 없애야 한다.’ 인간은 먹는 입과 말하는 입 어느 쪽과도 일치할 수 없다. 법-국가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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