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히의 놀이터에 어서 오세요”
국내 처음 소개되는 사이하테 타히의 3부작 연작 시집
지금 일본 현대시를 대표하는 인물을 물었을 때, 많은 이가 같은 곳을 가리킬 것이다. 시의 개념을 부수고 그 자신이 장르가 되었다고 평가받는 시인 사이하테 타히가 서 있는 곳이다. 얼굴도 본명도 알려지지 않아 수수께끼 시인으로 불리는 그는 2006년 제44회 현대시수첩상을 받으며 혜성처럼 문단에 등장한다. 2008년 당시 여성 작가 최연소인 만 21세에 첫 번째 시집 『굿모닝』으로 제13회 나카하라 주야상을 수상하며 새 시대 시인의 탄생을 알렸다.
이번에 국내 처음으로 소개되는 3부작 연작 시집 『사랑이 아닌 것은 별』 『밤하늘은 언제나 가장 짙은 블루』 『사랑의 솔기는 여기』는 각각 타히 시집 중 3, 4, 5번째에 해당하는 시집이다. 앞선 시집들이 시인으로서 확고한 자기인식이 없는 상태에서 나왔다면, 시인이라는 정체성을 분명히 인식하고 시의 윤곽을 더듬으며 써 내려간 3부작 시집은 타히 시의 정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상의 언어를 제약 없이 건져 올려 섬세하게 직조해낸 타히의 시는 독자적인 세계관과 새로운 차원의 표현, 흉내 낼 수 없는 독특한 운율감이 특징이다. 그는 죽음, 고독, 사랑, 상실, 허무와 같은 갈 곳 잃은 청춘의 감정들을 직시하고 날것 그대로의 언어로 생생히 그려낸다. 생의 감각을 온몸으로 받아들여 단숨에 발산하는 타히의 시는 무모하고, 그래서 더욱 찬란히 빛나는 젊은 날의 초상을 가감 없이 드러내 보인다
“시는 책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장르를 허물고 경계를 넘어 시의 가능성을 확장해나가는 시인
타히의 시는 책을 넘어선다. 우리는 타히의 시를 영화관에서, 전시회에서, 호텔에서, 대형 전광판에서 볼 수 있다. 영화감독 이시이 유야는 『밤하늘은 언제나 가장 짙은 블루』를 읽고 영감을 받아, 시집을 모티프로 동명의 영화를 제작한다. 한국에서는 <도쿄의 밤하늘은 가장 짙은 블루>라는 이름으로 개봉한 영화는 제67회 베를린영화제 포럼 부문에 공식 초청되며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그는 인터넷 세대를 대표하는 시인답게 디지털 환경에서 어떻게 시를 갖고 놀지 늘 궁리한다. 내려오는 시를 쏘아 시어들을 해체하는 슈팅 게임, 사용자가 지정한 인물 사진의 눈·코·입에서 시가 쏟아져 나오는 애플리케이션, 시를 음악으로 변환하는 사이트 개설 등 폭발하는 아이디어에 한계란 없다.
특히 지역 미술관과 박물관에서 모빌과 비디오 아트 등을 활용해 시 전시회를 개최하며 ‘타히 스타일’을 구축하고 있다. 나아가 호텔과 연계하여 방을 시로 꾸민 ‘시 숙박’을 기획하여 시를 읽는 것에서 몸소 체험하는 것으로 탈바꿈시키기도 한다. 한편, 2020년도 와세다대학 국제교양학부 입시 문제에 타히의 에세이가 지문으로 출제되면서 ‘사이하테 타히 현상’이 젊은 층에 국한된 한때의 신드롬에 그치지 않음을 방증했다.
장르를 허물고 경계를 넘어 시를 더 재미있고 친숙한 것으로 만들려는 다양한 시도는 사이하테 타히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 시는 일상 어디에든 우리 곁에 있는 것이라는 신념으로 계속해서 현대시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는 타히는, 다음 행보를 예측할 수 없기에 앞으로가 기대된다.
어두운 밤하늘 아래 짙게 깔린 고독과 허무의 노래
『밤하늘은 언제나 가장 짙은 블루』
영화 <도쿄의 밤하늘은 항상 가장 짙은 블루>의 원작 시집으로 화제가 된 3부작 연작 시집의 두 번째 시집 『밤하늘은 언제나 가장 짙은 블루』. 시집의 처음을 장식한 「블루의 시」의 첫 구절 “도시를 좋아하게 된 순간, 자살한 것이나 마찬가지야”는 영화에서도 맨 먼저 인용되며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도회지에서 느끼는 청년 세대의 고독감과 허무함, 우울감을 선명하고 예리한 언어로 벼려낸 시집은 3만 부 이상의 판매를 기록하며 현대시와 친숙하지 않은 젊은 독자층을 시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데 공헌했다.
재해 수준의 야경을 보고 싶다. 전 인류가 동시에 휴대폰을 켠다면, 하늘에서 사라지는 별도 있을까. 별을 죽일 수 있다면 한번 해보고 싶네. 혼자 사는 인간의 감정만큼 지루한 영화도 없다. 갑작스런 흉통과 천재지변과 분노가 늘어선 걸 고독이라 부른다면, 나를 기다리는 건 고독사뿐이다. _「어여쁜 인생」 72쪽
줄곧 “렌즈와 같은 시를 쓰고 싶다”라고 말해온 타히는 독자가 렌즈를 통해 시를 다른 빛깔로 읽고, 다시 그 렌즈를 통해 자기 삶을 바라보기를 바란다. 분노, 질투, 우울 등 부정적으로 취급되기 일쑤인 감정들조차 타히의 시 속에서는 유연하게 포용되고 긍정된다.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한 듯 투명하면서도 다채로운 문장들이 나열된 시 한 편 한 편은 감각적인 회화를 보는 듯한 심상을 선사한다.
타히의 언어는 인간 세상의 금기를 정면에서 공격한다. 터부 따위, 날려버려. 어른들은 입 밖으로 뱉을 수 없는 말. 어른들에게 꺼냈다간 혼이 나는 말. 그런 어른이 되어버렸다면, 이 세계에 영원히 발을 들이지 못한다. _「옮긴이의 말」 10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