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유년 시절의 이미지 하나가
각인된 한 남자의 이야기다.”
크리스 마커의 유일한 픽션 영화 [환송대]의 ‘영화-소설’
단 한 장면을 제외하면 전부 사진으로 이루어진 SF 영화의 전설
세계영화사의 전설로 회자되어온 <환송대>(1962)의 ‘영화-소설’이 출간되었다. 단 한 장면을 제외하면 전부 사진으로 이루어진 이 영화는, 정치적·미학적으로 획기적인 영상작업을 선보여온 프랑스의 영화감독 크리스 마커의 유일한 픽션 영화로, 영화예술의 새로운 차원을 제시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제3차 세계대전으로 파괴된 세계에서 한 남자가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실험대상으로 선택되어 낯선 시간으로 보내지는 이야기를 담은 이 영화의 파급력은 엄청났다. 테리 길리엄 감독이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았다고 밝힌 <12 몽키스>(1995)를 비롯해, 미래에 대한 디스토피아적 전망을 담은 많은 SF 영화들이 <환송대>의 자장 안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SF 작가들 역시 이 영화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않았다. “보는 즉시 그토록 강력한 충격을 불러일으킨 예술 작품은 이제껏 없었다. […] 그 순간 SF에 대한 내 감각이 완전히 뒤바뀌었음을 깨달았다.”(윌리엄 깁슨) “이 영화는 사이언스 픽션이 번번이 실패했던 지점에서 영광스러운 승리를 거둔다”(제임스 G. 발라드)
<환송대>는, 실험적인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지적인 감독 크리스 마커를 단번에 영화사의 기념비적인 인물로 만들어버렸다. 이 영화는 발표된 지 5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SF 영화의 원풍경으로, 정지 이미지를 탁월하게 실험한 작품으로, 이미지와 기억의 관계를 탐구하는 예술의 주요 참조목록으로 끊임없이 소환되며 재해석되고 있다.
이 책 『환송대』는 영화 <환송대>에 사용된 사진과 내레이션을 담은 ‘영화-소설’로, 마커가 ‘정지된 이미지’를 활용하여 ‘움직이는 이미지’의 영화로 만들어낸 것을 다시 종이 위에 ‘고정’시킨, 어떤 의미에서 역설적인 결과물로, 강력한 폭발력을 지닌 이 영화의 아름다움을 다른 방식으로 경험하게 해준다.
기억의 불가능성, 혹은 시간의 현기증
“인간은 시간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_『환송대』
“사랑은 시간에 대한 유일한 승리”_크리스 마커
제3차 세계대전으로 인류가 쌓아온 모든 것이 파괴된 파리. 살아남은 자들은 시간여행을 통해 인류의 생존에 필요한 물품들을 구해올 방법을 모색한다. 이를 위해 과거의 기억이 강하게 남아 있는 한 남자가 실험대상으로 선택된다. 극한 실험 속에서 그는 어린 시절 기억의 파편들, 전쟁 전 오를리 공항의 ‘환송대’에서 보았던 이미지를 떠올린다.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 죽어가는 남자, 그리고 한 여인의 얼굴…
<환송대>는 한 남자가 유년의 기억 속에 마치 ‘흉터처럼’ 남아 있던 이미지 하나를 추적해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갔다가 자기 자신의 죽음을 마주하게 되는 이야기이다. 시작과 끝이 만나는 순환 구조를 지닌, 28분에 불과한 이 단편영화는 우리를 끝없이 매혹시키며 다양한 형태로 변주되어왔다. 하지만 마커 자신은 <환송대>가 히치콕의 <현기증Vertigo>(1958)의 ‘리메이크’라 밝힌 바 있다. <환송대>에서는 남녀 주인공이 삼나무 앞에 서서 역사적인 날짜들이 새겨진 나이테를 가리키는데, 이는 <현기증>에 나오는 장면을 참조한 것이다. <환송대>는 <현기증>의 모티프, “한 사람의 정신 속에서 일어난 시간의 현기증”을 공유한다. “<환송대>의 사랑은 애초부터 현실의 시간 저 너머, 요컨대 불가능성의 영역에 있다.”(이윤영) 남자는 죽음의 순간, 시간을 넘어서고자 했던 자신의 시도가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한편 이 영화에서 사진은 줌인, 줌아웃, 페이드인, 페이드아웃, 몽타주 등의 영화적인 기법을 통해 시간과 운동 속에서 다시 태어난다. 마커는 여기에 성찰적이고 시적인 내레이션을 덧붙여 사진을 새로운 차원으로 이끈다. 롤랑 바르트를 따라, 사진이 찍히는 순간과 보는 순간 사이에 항상 건널 수 없는 시간의 심연이 자리한다고 할 때, 사진을 보는 행위 속에 이미 과거 속으로 돌아가는 시간여행이 내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이 영화를 ‘이중의 시간여행’ 이야기로 독해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겨난다. 가닿을 수 없는 기억의 이미지를 찾아가는 이 영화는 사진 자체가 만들어내는 멜랑콜리와 결합되어 더욱 절절한 감정을 만들어낸다.
이 영화를 전사한 이 책 역시도 영화에서 실현된 사진의 운동을 종이 위에서 복원해낸다. 영화적으로 처리된 이미지들이 이 영화-소설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등장하는지, 특히 영화 속 단 하나의 움직이는 장면이 어떻게 재현되는지 확인하는 것도 흥미로울 것이다. 이 책을 옮긴 영화학자 이윤영은 마커의 내레이션에 담긴 ‘시차’를 세심하게 포착하여 번역함으로써 이야기의 복잡한 차원을 드러내 보여준다.
크리스 마커, 새로운 영상미학의 선구자
<환송대>는 마커가 평생토록 탐구해온 이미지와 기억의 문제에 깊숙이 연결되어 있는 작품이다. 그는 사진에서 다큐멘터리, 텔레비전 영화, 비디오 설치작업, 유튜브 영상에 이르기까지 매체와 장르를 가리지 않고 이미지의 정치적·미학적 가능성을 실험해왔다. 마커는 이 영화를 통해, “우리의 개인적 기억이 역사에 대한 우리의 이미지를 ‘지배’하는 […] 방식에 대해 질문한다. 이 영화는 우리가 우리 삶의 사건들을 경험하면서 기억으로서 선별하는 것들에 대해, 그리고 우리가 다시는 생각하지 않는 어떤 순간들에 대해 질문한다.”(키아 린드로스) 이 영화가 나온 1962년, 아우슈비츠와 히로시마를 기억하고 재현한다는 것에 대한 치열한 논쟁이 펼쳐지던 그때와는 달리, 오늘날에는 이러한 질문이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무언가를 기억하고 지우고 역사화하는 일을 멈출 수 없으며, 따라서 <환송대>가 던진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책으로 재탄생한 『환송대』를 통해 시간과 기억에 대한 마커의 풍요로운 성찰을 만나보길 바란다.
※ 환송대로 번역된 ‘jetée’라는 말의 일차적인 의미는 “공항 터미널이나 그 부속 건물을 비행기 정차장으로 연결하는 야외의 넓은 통로”다. 파리 남쪽의 오를리 공항과 달리 한국의 공항에는 이러한 공간이 없고 또 환송대라는 말 자체도 흔하게 통용되는 말이 아니지만, ‘환송대’라는 단어 외에 영화의 무대가 되는 공간을 달리 지시할 방법이 없어서 이를 제목으로 쓴다.
[보도자료 참고 자료]
이윤영, 「크리스 마커의 <환송대>에 나타난 ‘불가능한 기억’의 문제」, 『문학과영상』,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