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제공 책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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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포클레스와 <안티고네> 헤겔은 아테네 역사가 아니라 <안티고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특정한 역사의 단층을 고고학적으로 발굴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의 관점에 의하면 “윤리적 사유”를 제시하는 소포클레스의 비극에 구현된 정신과 역사의 원리들을 철학적으로 조망하고자 하는 것이다. 문제는 드라마로부터 사상을 추출해내거나 드라마를 빌어 철학적 명제를 입증하기 위한 노력들은 종종 드라마 자체의 복합적인 역학을 단순화하는 경향을 띤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헤겔의 <안티고네>론에는 크레온과 안티고네만 두드러질 뿐 소포클레스의 드라마에 확연한 존재감으로 등장하여 극의 중심 갈등에 미묘한 긴장과 짙은 음영을 더해주는 이스메네와 하에몬과 티레시아스의개입이배제되어 있다. 무엇보다 드라마 전체 분량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하는 코러스의 존재가 빠져 있다. 그들의 노래가 극작가의 관점을 충실히 대변하고 있는 것이든 또는 여타 극중 인물과 다름없이 제한된 인식을 드러내는 것이든, ‘도시국가의 시민’을 표상하는 코러스의 존재와 관점을 도외시하고서는 그리스 비극에 관한 논의 자체가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장례절차를 두고 친족과 국가가 각각 권리를 주장하는 당대의 사회적 쟁점에 대한 시민들의 관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말할 것도 없다. 그렇다면 궁극적으로는 소포클레스에게 돌아가야 할 것이다. 페리클레스의 동시대인, 그 자신 전쟁터에서는 군인으로, 아크로폴리스 광장에서는 정치가로, 그리고 연극 경연대회가 벌어졌던 아테네의 디오니소스 극장(Theatre of Dionysus)에서는 극작가/ 연출가로 도시국가 아테네의 삶을 다층적으로 살았던 역사적주체. 그가 당대의현실에서 본 것은 무엇이었던가, 참전군인으로서 전몰자를 위한 국장에서 페리클레스의 연설을 들으며, 또 그에 대한 시민들과 유족들의 반응을 지켜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던가. 그 생각을 그는 어떻게 안티고네와 크레온의 대결, ‘주변인물’들의 개입, 그리고 코러스의 노래로 총체적으로 육화했는가. 무엇보다 그 현실에 대한 상념들이 그에게 어떤 철학적, 정치적, 연극적 상상력을 일깨웠는가. 그리고 그 상상력으로<안티고네>를 집필하면서, 나아가 무대 위에 생생한 형상으로 빚어가면서, 이 강력한 윤리적 충돌과 치열한 역사적 투쟁 속에 그 자신이 궁극적으로 발견한 인간의 모습은 어떠한 것이 었던가. 쉬운 답변을 허락지 않는, 해석을 위한 이 일련의 질문들을 앞에 놓고 역자의 입장에서 한 가지 앞질러 말할 수 있는 것은 소포클레스의 작품은 헤겔의 해석망을 유유히 빠져나간다는 것이다. <안티고네>는 역사의 변증법보다는 인간정신과 존재의 부정적 변증법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소포클레스가 궁극적으로 제시하는 것은 윤리적 실체를 순수하게 구현하는 존재로서의 안티고네와 크레온이 아니라 윤리적 요청의 전폭적인 담지자가 되기에는 언제나 부족하거나 때로는 과잉된 존재로서의 인간이라는 것이다.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가 당대의 사회적 과정에 대한 정치적 성찰과 도덕적 힘들의 충돌에 대한 철학적사유를 넘어 바로 그 결핍과 과잉에 우리의 시선을 이끄는 것은 드라마의 본령이 인간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마도 오늘날의 인식적 패러다임에서 헤겔의 ‘절대정신’은 정신분석학의 ‘무의식’에 그 자리를 내어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역자의 이러한 견해까지도 괄호 안에 묶어야 할 것이다.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는 독자에게 직접 말을 걸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에 적지 않은 해석적 주석을 붙인 것은 역자의 욕심이며, 그것도 이 불가사의한 작품의 총체적 이해에 도달한 일관된 해석이기보다 그러한 이해를 모색하는 과정의 단편적인 기록들에 불과하다. 이 주석들이 독자 여러분의 소포클레스와의 만남에 장애가 되지만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