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제공 책 소개
19세기 산업사회의 이념을 정면으로 비판한
찰스 디킨즈의 문제작
19세기 영국을 대표하는 작가 찰스 디킨즈의 장편소설 『어려운 시절』이 출간되었다. 이 책은 디킨즈 전문 연구자인 울산대 장남수 교수가 이십여년 전 처음 번역한 것을 영미문학연구회와의 공조 속에 몇가지 오류를 수정하고 다듬어 새로운 장정으로 펴내는 것으로, 충실한 고전연구의 보기 드문 성과라 할 수 있다. 빅토리아 시기 영국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을 담은 디킨즈의 여러 작품 중에서도 특히 『어려운 시절』은 당시 산업사회의 이념을 정면으로 비판한 대표적인 문제작으로, 비판과 풍자의 신랄함과 날카로움뿐 아니라 화려한 수사와 흥미진진한 전개 등 뛰어난 대중성과 예술성의 결합이라는 측면에서도 디킨즈 예술세계의 중심에 놓이기에 손색이 없는 작품이다. 작품의 세세한 표현에 담긴 의미까지 정밀하게 짚어내는 디킨즈 전문 연구자인 역자의 해설도 디킨즈 작품세계의 본령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작품의 무대인 영국의 공업도시 코크타운은 자욱한 연기를 뿜어내는 공장 굴뚝과 덜컹거리며 단조로운 운동을 반복하는 증기기관의 도시이자, 좁은 골목에 밀집한 열악한 집에서 생활하는 노동자들이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일을 되풀이하는 노동의 도시, 수치화할 수 있는 효용만이 절대적인 가치인 이른바 공리주의 이념이 지배하는 도시이다. 소설은 공리주의를 대변하는 인물인 국회의원 그래드그라인드가 교실에서 아이들에게 상상을 억압하고 오직 사실만을 강조하는 그의 교육철학을 장황하게 늘어놓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의 딸 루이자와 아들 톰 역시 아버지의 엄격한 원칙에 따라 모범적인 학생으로 길러지는데, 그러나 이상적인 인간으로 자랐어야 할 자녀들의 인생은 이념과는 거리가 먼 방향으로 전개된다. 상상과 애정을 억압당한 채 자란 딸 루이자는 아버지의 친구이자 자신과 스무살 넘게 나이 차이가 나는 자수성가한 자본가 바운더비와 애정이 뒷받침되지 않은 결혼을 하고, 아들 톰은 누나 덕분에 바운더비의 은행에서 일하게 되지만 방탕한 생활에 빠져 도박빚을 갚기 위해 은행의 돈을 훔치기에 이른다. 이처럼 그래드그라인드의 자녀들이 받은 공리주의적 교육과정과 그것이 이들의 삶에 미친 영향이 소설 플롯의 한 축을 이룬다.
그리고 이야기의 다른 한편에는 공리주의에 희생당하는 노동자계급의 비극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스티븐 블랙풀이라는 인물이 있다. 오직 성실함만을 지닌 그는 불행한 결혼생활로 인해 고통을 받으며, 노동자총연맹에 가입하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동료 노동자들로부터 배척을 당하고, 또 공장주인 바운더비로부터도 해고를 당한다. 결국 코크타운을 떠날 수밖에 없게 된 그는 나아가 톰 대신 은행 도난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누명까지 뒤집어쓰게 되는데, 결국 그 누명을 벗기 위해 코크타운으로 돌아오던 중 사고를 당해 목숨을 잃고 만다. 그럼에도 그는 끝까지 지배계급의 횡포에 대한 분노를 감추지 않는 동시에 동료 노동자들에 대한 신뢰를 저버리지 않으며, 디킨즈는 그를 노동자이자 자율적인 일개인으로서 연민을 담아 묘사함으로써 획일적인 이념에 따라 환원되지 않는 노동자 개개인의 존엄을 옹호한다. 이는 공리주의 비판과 관련하여 “엔진에는 신비가 없지만 일손들은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에게도 헤아릴 수 없는 신비가 존재한다”라는 표현에서 선명하게 드러나듯, 노동자계급에 대한 디킨즈의 태도를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디킨즈의 이러한 산업사회 비판이 소설에서 가장 극적으로 형상화되는 것은 코크타운의 공장과 대비되는 곡마단의 존재를 통해서이다. 곡마단은 소설의 처음과 끝에서 중요한 무대로 등장해 이야기에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할 뿐 아니라 소설 곳곳에 등장하는 민담과 민요 등의 의미를 부각시킴으로써 ‘사실’의 세계와 대비되는 ‘상상’의 세계를 대변하고 ‘노동’의 원리와는 다른 ‘놀이’의 가치를 웅변한다. 또한 곡마단의 단원들은 학식은 보잘것없지만 ‘놀랄 만한 부드러움과 천진함’을, ‘서로 돕고 동정하려는 지칠 줄 모르는 열성’을 지닌 존재로 그려지며 계산적인 개인의 이윤 추구와 대비되는 공동체적 가치를 드러낸다. 특히 곡마단 출신으로 그래드그라인드에 의해 거두어져 교육받는 씨씨 주프는 소설에서 가장 정이 넘치고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인물로 소설에 등장하는 다채로운 인물들의 관계 속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이 학급이 오천만 파운드의 돈을 가진 국가라고 가정한다면 이 국가는 부유한 국가인가?’라는 선생의 질문에 ‘누가 돈을 갖고 있는지, 그중 얼마라도 자기 돈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면 그 국가가 부유한 나라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고 대답하고, 길에서 굶어죽는 사람의 비율이 많든 적든 굶어죽는 사람 자신에게는 똑같이 고통스러운 일이라고 말함으로써 공리주의 교육의 헛점을 극적으로 드러내기도 한다.
19세기 자본주의의 이념으로서의 공리주의가 포섭하지 못하는 삶의 다양성과 민중적 덕목을 옹호한 디킨즈의 문제의식의 강렬함은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한 생명력을 지닌다. 더구나 그의 장기이기도 한 흥미진진한 이야기 전개와 생생한 묘사는 그가 당대에 획득한 대중적 인기를 오늘날에도 쉽게 공감할 수 있게 한다. 『어려운 시절』은 디킨즈가 고전 중의 고전으로 평가받는 까닭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고전의 현재적 가치를 되새길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