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제공 책 소개

가장 폭력적인 시기 독일의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누군가는 반드시 잘못된 시기에 잘못된 장소에 놓인다. <슈피겔> 《안네의 일기》보다 먼저 집필된, 유대인 박해의 증언 “세상은 잊었다. 우리가 시민이던 시절을.” 1938년, 나치 돌격대와 지지자들이 유대인 상점을 깨부수고 약탈한 ‘수정의 밤’ 사건이 벌어진다. 더 놀라운 것은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재산을 뺏고 체포하는 것이 합법이라는 사실이다. 성공한 유대인 사업가인 오토 질버만은 하루아침에 도망자로 전락한다. 위험이 목전에 닥칠 때까지도 질버만은 이렇듯 야만적인 일이 20세기 유럽에서 벌어진다는 걸 선뜻 믿지 못한다. 그러다 나치 지지자들이 자신의 집에까지 찾아오자 급히 재산을 처분해 도주에 나선다. 그가 믿는 것은 유대인 특징이 거의 보이지 않는 얼굴과 여행 가방에 든 거액의 현금. 출국의 기회를 잡을 때까지 어디로도 갈 수 없는 질버만은 기차를 타면 안전할 거라는 생각에 끝없이 티켓을 끊어독일을 배회한다. 기차에서 그는 다양한 인간 군상을 만난다. 독일군 장교부터 열성 나치 지지자, 침묵하는 시민, 도주로를 찾으려는 유대인 수공업자, 혼란을 틈타 사업 기반을 마련하려는 기회주의자까지……. 결국 질버만은 사업 파트너였던 아리아인에게 배신을 당하고, 독일에 갇힌 채 서서히 미쳐간다. 사회에서 배제된 인물의 눈으로 당대 풍경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이 작품은 가치 있지만, 《여행자》의 주제의식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저자 보슈비츠는 오토 질버만을 전형적인 약자나 희생자로 그리지 않는다. 아니, 질버만이야말로 작중의 가장 입체적인 인물이다. 그는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나치의 탄압을 받지만, 박해가 시작되기 전에는 자본가로서 기득권에 속했고, 도망치는 중에도 다른 유대인들과 자신이 엄연히 다르다고 여기며 내심 그들을 책망하기도 한다. 이처럼 인간과 사회의 맨얼굴을 응시하는 시선은 《여행자》의 작가 보슈비츠 자신의 배경에서 비롯되었다. 보슈비츠의 아버지도 주인공처럼 부유한 사업가였으며, 그가 기독교로 개종한 까닭에 보슈비츠 역시 개신교 환경에서 성장했다. 유대인으로 분류되어 사회적 낙인이 찍히기 전까지만 해도 유대계라는 사실은 그의 가족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주인공 오토 질버만이 사회를 보는 시각에는 자전적 요소가 짙게 담겨 있으며, 그 덕분에 독자는 사회적 낙인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다층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집필 후 80년이 지나 비로소 모국어로 출판된 고발문학 오늘의 차별을 돌아보는 거울이 되다 독일을 탈출한 보슈비츠는 가까스로 영국으로 망명했지만, 독일 국적자라는 이유로 적국인(敵國人)으로 분류되어 오스트레일리아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었다. 수용소 생활 끝에 영국으로 돌아오는 배에 탔지만, 이 배가 독일 잠수함이 쏜 어뢰에 맞아 침몰하면서 사망한다. 《여행자》는 보슈비츠 생전에 영국과 미국에서 번역 출간되었으나 정작 저자가 모국어로 직접 쓴 원고는 수십 년간 잠들어 있게 되었다. 전후 독일에서 이 소설을 출간하려는 시도가 없지는 않았다. 소설가 하인리히 뵐이 《여행자》를 출간하고자 출판사에 추천한 적 있으나, 부담을 느낀 출판사 측에서 거절한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여행자》는 집필 후 80년이 지난 2018년에야 보슈비츠의 친척과 연락이 닿은 출판인의 손을 거쳐 독일에서 출간되었다. 이 소설은 독일의 어두운 역사를 유대인의 시각으로 담아낸 최초의 소설로서 문학성과 역사성을 동시에 인정받으며, 자국의 치부를 다룬 작품임에도 독일 언론과 독자의 찬사를 받았다. 2019년에는 보슈비츠를 기리는 걸림돌이 베를린에 설치되기도 했다. 80년이라는 시간을 지나 역사적 사실과 내재된 본질을 생생히 전하는 《여행자》를 과거의 이야기만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는 전쟁을 피해 도망친 난민이 줄을 지어 있으며, 어느 국가에도 속하지 못하고 공항에서 기약 없이 심사를 기다리는 이들도 적지 않다. 이들의 삶 역시 전쟁 전에는 지극히 평범하고 당연했으리라. 또한, 2020년대의 우리는 팬데믹 사태를 맞아 타인을 배제하고 낙인찍는 일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여행자》의 주인공 오토 질버만은 안부를 묻는 지인에게 이렇게 답한다. “생각하는 습관을 버렸어요. 그게 모든 것을 견디기에 가장 좋은 방법이지요.” 집단적인 두려움 앞에 인간은 자신과 타인을 구별해내고픈 충동을 느끼고, 그 충동은 쉬이 폭력으로 이어진다. 이 책의 옮긴이 전은경은 ‘옮긴이의 말’에서 독자에게 묻는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우리’라는 울타리와 그 너머의 타인을 어떻게 구분 지으며 살고 있을까.’ 질버만이 체포당할까 두려워하며 ‘인정 있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기를 바랐듯, 우리 사회의 약자들 역시 행동하는 양심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