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제공 책 소개

하나의 게임과 두 명의 게이머 『저주체』라는 게임의 이모저모를 살펴보자. 『저주체』는 어떤 게임일까? 게임이 곧 시작된다. 이번 게임의 참가자는 두 명, 자신들의 장난감을 가지고 공연을 펼칠 두 명의 게이머이다(혹은 두 명이 아닐 수도 있다). 게임에 입장하기 전에, 등장인물 시트를 확인해 보자. 시트 한 장에는 티머시 모턴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시트를 읽어 보면, 이 등장인물의 직업은 철학자이자 생태학자로, “객체지향 존재론”(OOO)이라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등장인물의 이력이 화려한데, 『하이퍼객체』(현실문화, 2024)라는 저서에서는 우리가 플라스틱, 방사능 물질, 자본주의, 지각판, 태양계, 지구 온난화 같은, 시간과 공간에 걸쳐 물리적으로 거대한 초객체의 시대에 살고 있음을 피력하며 어둠 속에 숨어있던 초객체들의 은신 기술을 해제했다.(모턴의 저서 Hyperobjects의 한국어판은 『하이퍼객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이 책 『저주체』에서는 ‘초객체’라는 번역어를 사용한다.) 『실재론적 마술』(갈무리, 2023)이라는 저서에서는 객체들 사이의 인과관계가 두 개의 당구공이 둔탁하게 부딪치는 것만큼 명백하지는 않다며 혼란을 퍼뜨렸다. 심지어 『어두운 생태학』(갈무리, 근간)에서는 풀 수 없는 생태학적 수수께끼를 선보이며 마술을 건다. 『저주체』에서 어떤 퍼포먼스를 보여줄지 기대되는 게이머 중 한 명이다. 다른 한 장의 등장인물 시트에는 도미닉 보이어라고 적혀 있다. 직업은 작가, 미디어 제작자, 인류학자이다. 등장인물 소개에 2013년부터 2019년까지 ‘인간과학 분야의 에너지 및 환경 연구 센터’에서 창립 디렉터로 활동했으며, 남부 멕시코에서의 풍력 발전 정치에 관한 저서를 출간했다고 적혀 있다. 또한, 이 등장인물은 씨민 하우와 함께 기후 변화로 사라진 아이슬란드의 첫 번째 주요 빙하(오케이)에 관한 (이름부터 범상치 않은) 다큐멘터리 영화 (Not Ok: a little movie about a small glacier at the end of the world)를 제작했다. 이제 게임의 규칙은 다음과 같다 : 가능한 한 많은 개념을 장난감으로 바꾸고 세계에 관해 진술하기. 그리고 장난감을 너무 깔끔하게 정의하지 않기. 그리고 두 등장인물이 대화 형식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교대로 자신을 긍정하고 자신과 논쟁하기도 하는 우리(We)로서의 나(I)를 환각적으로 사용하기(누가 무엇을 말하는지 들키면 게임 끝이다). 도래할 주체를 위하여 게임의 규칙에 따라, 이야기는 초객체로 시작한다. 초객체는 시간과 공간에 걸쳐 대량으로 분산되어 있어서 우리가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는 사물이다. 블랙홀은 하나의 초객체이고, 지구 온난화도 하나의 초객체이며, 생물권도 하나의 초객체이다. 우리는 초객체적 시대에 살고 있다. 그리고 물론, 우리는 그저 초객체적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종으로서의 우리가 시공간에 걸쳐 대량으로 분산된 사물인 한, 우리가 바로 초객체이다. 저자들의 생각에 따르면, 지구 온난화와 자본주의처럼 우리가 지구를 파괴하지 않을까 우려하는 대부분의 초객체는 인간에 기원을 둔다. 특정한 종류의 인간이 세계를 초객체적 시대로 인도했는데, 이 게임에서는 그런 종류의 인간을 초주체(hypersubject)라고 부른다. “초주체는 전형적으로는 백인이고, 남성이고, 북부의 사람이고, 영양상태가 좋고, 모든 의미에서 근대적”이다. 초주체의 시간은 끝을 맞이하고 있다. 그래서 “폐허에서 미래를 조직하여 지구로 돌아가는 길”은 저주체성(hyposubjectivity)을 배양함으로써 이루어질 것이라고 저자들은 본다. 부분적으로 “저주체는 초객체가 그 자신에 관해 느끼는 방식”이다. 이 게임에서 발견된 저주체의 특징을 몇 가지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1) 저주체는 인류세의 토착종이며, 이제야 막 자신이 무엇이고 무엇이 될 수 있는지를 발견하기 시작했다. (2) 저주체를 둘러싼 초객체적 환경과 마찬가지로, 저주체 또한 다면적이고 다원적이며, 아직-아님이고, 여기도 저기도 아니며, 부분의 합보다 작다. 다른 말로 하자면, 저주체는 초월적(관계들을 뛰어넘어 상승하기)이라기보다는 저월적(관계들을 향해 이동하기)이다. 저주체는 권력은 물론 절대적 지식과 언어를 추구하거나 가장하지 않는다. 대신 저주체는 놀고, 보살피고, 적응하고, 아프고, 웃는다. (3) 저주체는 필연적으로 페미니즘적이고, 반인종차별주의적이며, 다인종적이고, 퀴어적이며, 생태적이고, 트랜스휴먼이자 인트라휴먼이다. 저주체는 남성백색이성애석유근대성의 규칙과 그 규칙이 요약하고 강화하는, 정점에 선 종의 행동을 재인식하지 않는다. 그런데 저주체는 멸종 판타지의 축복-공포를 저지하기도 하는데, 저주체의 이전들·지금들·이후들이 넘쳐나기 때문이다. (4) 저주체는 스콰터이자 브리콜뢰르이다. 저주체는 틈과 비어있음에 거주한다. 저주체는 사물을 뒤집어 놓고 파편과 잔해로 작업한다. 저주체는 탄소 격자 생활과의 연결을 끊고, 비축된 에너지를 자기 목적을 위해서 해킹하고 재분배한다. (5) 저주체는 기술근대 레이더가 감지할 수 없는 곳에서 혁명을 일으킨다. 저주체는 자신이 현존하지 않거나 현존할 수 없다는 전문가의 조언을 끈기 있게 무시한다. 저주체는 여기에 진술된 모든 것을 포함하여 저주체를 요약하려는 노력에 대해서 회의적이다. 저주체성에 관한 고정된 정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게이머들은 아직-아닌 도래할 것 주변을 빙글빙글 돌며 저주체성이 어떠한 것일지에 관해 소리 내어 생각할 것이다. 게임의 등장인물 시트와 게임의 규칙이 준비되었고, 이제 게임의 목표 또한 마련되었다. 이제 저주체에 관해 더 알아내려고 노력하고, 소리 내어 생각하고, 우리 자신을 저월시키기 위해 훈련하는 일만 남았다. TIP. 전체는 부분의 합보다 작다 함께 게임을 진행할 독자들을 위해 게임에는 한 가지 짧은 팁(TIP)이 추가되었다. 이 팁이란, 전체는 부분의 합보다 작다는 것이다. 저자들에 따르면, 우리가 문제를 다룰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게 만들기 위해 이데올로기가 우리를 냉소적 이성에 가두어 놓는 한 가지 방법은 표준적인 전체론을 습관화시키는 것이다. 폭발적 전체론이라고도 불리는 이 표준적 전체론은 예를 들면 “신이 물리적으로나 존재론적으로나 언제나” 부분보다 “크다고 말하는 유일신론 같은 오랜 역사를 가진 장치로 표현”된다. 한국어판을 위해 추가된 모턴의 부록 글에서, 모턴은 “신은 농업 문명의 왕, 모든 사람에게 이 전체가 그들보다 ‘더 큰 무언가’라고 말하는 방식으로 자신들이 전체에 속해 있음을 확신시켜 주는 존재자다”라고 말한다. 이런 존재론에서는 전체는 부분의 합보다 크므로 부분이 망가져도 전체에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부분을 교체하면 될 따름이기 때문이다(부분의 합보다 큰 전체에 대한 모턴의 거부는 대자연에 대한 모턴의 거부와 동일한 형태를 띤다). 이는 체계에 대한 어떤 저항도 체계를 바꾸지 않을 테니 저항은 사전에 무력화되었다고 말하는 또 다른 방식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존재론이 이 폭발적 전체론에 참여하고 있지는 않은지 재고해 보아야 한다. 저자들이 말하듯, “가장 잔인한 속임수는 우리가 우리의 초객체적 조건 ― ‘자본주의’나 ‘지구 온난화’ 같은 것 ― 의 원천에 주목하기 위해 전개하고 싶어 하는 매우 비판적인 범주들 또한 그 부분의-합보다-큰 존재론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턴의 주장처럼, 전체가 부분의 합보다 작다면, 전체를 바꾸는 것은 절대적으로 가능하다. 책의 구성 : 장난감들이 널브러진, 철학을 위한 놀이터 이 책은 지은이들의 「한국어판 서문」과 「사회적으로 거리를 둔 서문」, 「작게 생각하기 위한 지침」, 다섯 개의 장과 부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사이에는 수없이 많은 장난감이 널브러져 있어서,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