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제공 책 소개

끝끝내 ‘너’에게로 달려가는 시 누락된 호흡이 내뱉는 입김의 말들 2005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해 올해로 작품 세계를 펼친 지 20년 차가 된 황성희 시인의 다섯 번째 시집 『너에게 너를 돌려주는 이유』가 아침달 시집 43번째로 출간됐다. 3년 만에 돌아온 이번 시집은 각 소제목이 달린 4부 구성으로, ‘문제적 개인’을 자처했던 시인이 63편의 시를 새로 묶으면서 존재에 관한 치열한 탐구 의식을 밀도 높은 언어로 담아내었다. 첫 시집 『앨리스네 집』에서부터 “앨리스”나 “헨젤과 그레텔” 같은 판타지 인물들을 포함해 갖가지 다양한 화자들을 등장시켜 개성적 발화의 밀도를 높이는 시적 기법은 황성희 시인이 추구해온 독특한 형식이다. 그동안 시집을 펴내면서 불완전한 여성 화자들이 폭발적인 에너지로 고통스러운 발화를 삶에 기입하고, 특히 줄곧 보여주었던 “어머니의 세계”는 곧 ‘나’라는 안쪽이 그 어떤 바깥으로도 채울 수 없는 공허한 자리임을 생생히 드러냈다. 이번 시집은 마침내 ‘나’의 세계에서 ‘너’의 세계로 넘어간다. 얼핏 생각하면 간단해 보이는 이 미끄러짐에 도달하기까지 시인은 근 20년이라는 시간을 쓴 셈이다. 이러한 건넘은 꼭 타자만을 지칭하진 않는다. 나는 언제든지 네가 될 수 있고, 너 또한 언제든지 내가 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기나긴 생의 굴곡을 넘으려다 자주 무너지던 ‘나’라는 폐허에 홀로 갇힌 자는 이제 ‘너’라는 세계를 향해 절규하고 그곳에 닿기를 갈망한다. 지리멸렬했던 ‘나’를 오랜 시간 횡단하면서, 모음의 방향만 바꾸면 ‘너’가 되고, ‘너’는 그 어떤 문장 속에서도 바뀌지 않는 단어가 된다. 시인이 자기 육체를 버리면서까지 “너에게 너를 돌려주는 이유”다. 대체 불가능한 쓰레기 소녀 자학으로써 항변하기 “쓰레기처럼 누워 있어본다” ─「쓰레기 소녀」 부분 시집을 펼치자마자 나오는 첫 시의 장면이다. “나를 꺼내던 기대에 찬 손들”이 사라진 자리에서 화자가 “끝내 버리지 못한” 것은 “마음”이지만 이미 스스로 다 털려 어디로도 가지 못하는 자신을 쓰레기라고 명명한다. 망한 인물은 나뿐만이 아니라 시에서 다양하게 등장하는 “김”, “옥희 선생”, “소영” 같은 인물들도 마찬가지다. 이전부터 시인은 다채로운 여성 화자들을 중복적으로 등장시키면서 현대사회에서 여성으로서 살아가는 지난한 시간을 묘사했고, 달콤한 문명에서 누락되었으며, 이상적인 이야기를 버렸다. 예컨대 자신의 몸이 먼저가 아니라 옷을 다 골라야 체형을 결정하는 인물 “소영”은 인과가 뒤틀린 행위를 통해 나조차 나 자신을 이 세상의 일원으로 인정하지 못하는 비참한 전복적 태도를 보여준다. 1부 제목인 “그때 나는 딱 중간 지점에 있었다”는 그러므로 우리에게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삶이 나와 세계가 서로 넘어지지 않기 위해 표면이 거친 밧줄을 잡고 위태로운 줄다리기를 하는 것이라면, “중간 지점”은 바로 나도 세계도 넘어지지 않은 채 거의 동일한 힘으로 균형을 내고 있는 긴장 상태라고 말할 수 있다. 시인은 왜 이렇게까지 자학할까. “이제 이 기분의 마무리”(「김의 탄생」)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걸어오면서 잘한 일이라고는 /없어지지 않으려고 계속 말한 것 말고는 없는”(「인사의 각도」) 사람에게 ‘너’는 어떤 의미가 될 수 있을까. 나를 잃어버리는 자백에서 너를 찾는 고백으로 “자백의 내용은 이제부터 만들어가야 한다는 사람 자백은 하지 않고 자백하는 이를 구경만 하는 사람” ─「자백 모임」 부분 시인이 자학적인 말투로 자기 존재를 부정한다고 해서 시 쓰기의 목적이 자멸은 아닐 것이다. 황성희가 그리는 시적 화자는 시에서 꼭 죄가 없어도 죄를 만드는 사람 같고, 추궁 없이도 자신의 허물을 전부 벗어 던져버리는 사람 같다. 발화 방식 중 두드러지는 형태로 “자백”이 있는데, 말하자면 황성희는 시를 통해 거듭 질문을 쌓으면서 자기 존재의 의미가 삶에서 희박해지는 순간을 그린다. 그리고 이는 역설적으로 내가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만 같았던 바깥, 즉 타자의 세계에 진입하고자 하는 열망이 탄생하는 배경이 된다. 그동안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일만으로도 벅찼을, “무슨 수를 써도 소용없어요 난 나를 안 가질 테니까”(「너에게 너를 돌려주는 이유」)라고 말할 정도로 마음을 포기해버렸던 사람이, “이제 좀 내가 내게 걸맞은 옷처럼 여겨”(「사람으로 지낸 어느 한 해」)진다고 말할 수 있게 된 이유는 바로 황성희의 시적 세계가 세상에서 쉽게 누락되면서도 사회 구성원으로서 관계를 결속하고자 하는 이중적 의지를 보였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해설을 쓴 김영임 평론가가 처음에 “타자의 존재적 본질을 어떤 방식으로 감각하는”지 묻는 질문으로 시인의 발걸음을 짚듯, 황성희의 시는 이제야 간신히 자신을 줄곧 버리던 사람에서 ‘너’를 희망하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물론 시인이 타자에게로 향하는 방식은 여전히 가학적이고 비참하다. “자신이 꼭 자신이어야 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부럽고, ‘너’가 있는 곳에 가기 위해서라면 “나는 내가 필요 없어 나는 나를 다 내줘도 상관없”는 사람이 시를 쓰고 있어서 그렇다. 그럼에도 시인은 어떻게든 너에게 너를 돌려주려고 한다. 더 이상 아무 죄나 지으면서 자백하지 않으려고 한다. 오래 걸렸던 첫입을 떼자마자 공중에 하얗게 피어오르는 입김을 보기까지 참았을 그의 고백은 계절을 타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