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초 파시즘과 전쟁의 포화 속, 속절없이 허물어지는 세계에서
말과 문학의 희망을 놓지 않은 체코의 국민 작가 카렐 차페크가 가꾼
무해하고 여린 생명체와의 짙푸른 반려 생활
카렐 차페크는 ‘로봇’이라는 유명한 단어의 창시자이자 SF 문학의 대부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차페크는 장르를 가리지 않는 소설가였고 기자였고 철학자였으며 희곡 작가였고 수필가였고 번역가였고 삽화가였고 전기 작가였고 동화 작가였고 적극적으로 현실 정치에 참여했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 판타지 자체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기발한 상상들은 언제나 인간과 세계의 현실에 대한 구체적 염려와 성찰이 그때그때 우연히 취한 형태에 불과했다. 표면은 다를지언정 작품의 저변은 언제나 변함이 없었다. 환상이 아닌 현실 속에 생명을 가지고 존재하는 모든 것, 무해하고 여린 생명체들에 대한 애정이 차페크 세계의 한 길 주제다. 연약하나 강하고 유구한 생명을 향한 애정과 책임감이 그중에서도 두드러진 산문집 두 권을 2021년 연말, 쏜살판으로 소개한다. 평화롭고 평범한 청소년기를 보낸 흔한 유럽의 젊은 지식인 차페크는 세계적이고 개인적인 차원에서 두 가지 대재앙을 맞는다. 1914년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고, 이즈음 청년 차페크는 강직 성 척추염 진단을 받아 평생 불구나 다름없는 몸이 되었다. 그러나 참사와 고통 뒤에 미약하나 마 희망이 남았다. 1차 세계 대전은 번영 유럽의 종언을 선언했으나 체코에 역사상 초유의 자유 민주주의 정권을 선사했다. 신체의 고통은 소소한 일상의 절실한 가치를, 고통 속 인간들을 연 민하는 마음을 가르쳐 주었다. 이 희미한 희망에 물을 주고 가꿀 줄 아는 강인한 인간 차페크는 작가로서 인간으로서 만개하기 시작한다. 무엇보다 그 자신이 하나의 ‘생명체’로서 하루하루를 충실하게 살아냈던 차페크의 생활 면면이 담긴 『개를 키웠다 그리고 고양이도』, 『정원 가꾸는 사 람의 열두 권』 두 권 산문집은 눈보다는 피부와 마음으로 흡수되는 독서 경험을 안길 것이다.
『개를 키웠다 그리고 고양이도』
20세기 초 파시즘과 전쟁의 포화 속에서, 말과 문학의 희망을 놓지 않은
체코의 국민 작가가 들려주는 무해하고 여린 생명체와의 반려 생활 이야기
불신을 조장하여 연명하는 정치는 야생의 정치학입니다. 인간을 믿지 않는 고양이는 인간을 인간으로 보는 게 아니라 야생 동물로 봅니다. 인간을 믿지 않는 인간 역시 야 생 동물을 봅니다. 상호 신뢰의 조직은 문명 전체보다 오래되었고, 인류는 여전히 인류 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신뢰의 상태를 무너뜨린다면, 인간의 세계도 야생 동물의 세 계로 전락하고 맙니다. 이제 나는 우리 집 고양이를 쓰다듬으려 한다는 말을 하고 싶 네요. 이 고양이는 프라하 뒷골목 알 수 없는 황무지를 헤매다 내게로 흘러 들어온 작 은 회색 동물일 뿐이지만, 나를 믿고 신뢰하기 때문에 내게 크나큰 위안을 줍니다. 고 양이가 말하네요. “인간, 내 귀와 귀 사이를 좀 간질여 봐. ” ― 「개에 대한 더 많은 이야기, 그리고 고양이 이야기도」에서
카렐 차페크는 체코인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작가인데, 체코가 차페크를 사랑하는 이유는 수없 이 많다. 민족성을 드러내는 위트와 유머 감각, 다채로운 이야기꾼 기질, 그리고 쉽고 명징한 구 어체를 활용해 풍요로운 체코어의 결을 포착함으로써 체코 근대어의 문학성을 수립하는 데 성 공한 특유의 문체도 빼놓을 수 없다. 험난한 격동의 시대에 투철한 참여의식으로 정치와 외교에 발을 벗고 나섰던 작가인데도, 차페크의 글에서는 위압적인 무게감을 찾아볼 수 없다. 위트와 풍자는 차페크 문학의 생명이다. 인류라는 종을 사랑했지만, 그 치부 역시 냉정하게 직시했던 차 페크는 애정과 비판의 간극을 촌철의 유머로 채웠던 것이다. 인류의 멸절마저 멀지 않게 느껴졌 던 20세기 초반의 유럽, 무너지는 한 세상을 바라보면서도 차페크의 시선은 아이러니한 웃음기 로 가득하고 비관에 빠지지 않았다. 발랄하고 경쾌하게 멸망을 자초하는 차페크의 인류는 역설 적으로 기묘한 희망을 여운으로 남겼다. 시대와 역사를 넘어 오로지 믿어야 할 것은 관념화되지 않은, 뜨거운 체온으로 살아 일상과 주 위를 돌보는 사람, 오로지 평범한 사람뿐이라고 차페크는 쓴다. 반려동물과 함께 살면서 일거수 일투족을 찬찬히 지켜보고 돌봄에 정성을 쏟는 집사의 소소한 기쁨과 슬픔이야말로 차페크 자 신이 믿고 옹호했던 인간성의 핵심이기에, 『개를 키웠다 그리고 고양이도』는 너무나 카렐 차페크 다운 에세이다. 실제로도 2차 세계 대전에 휘말린 체코 국민들은 폭스테리어 강아지에게 들려 주는 연작 동화 『다셴카』에서 큰 위로를 받았다. 부조리한 학살과 폭력 속에서 일상이 무너져 내 릴 때야말로, 반려동물과 반려식물과 가족과 이웃과 나로 구성된 소중한 세상의 진정한 가치가 그 어느 때보다 찬란하게 빛나기 마련이다. 인류와 세계의 미래가 막막하고 캄캄하기만 할 때, 희망은 지금 바로 옆에 있는 생명체들에게 최선의 호의와 따뜻한 애정을 베푸는 일에서만 찾아 지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