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금 광장에 선 민주주의
역사의 갈림길에서 우리는 어떤 미래를 선택할 것인가
2024년 12월 3일, 비상계엄령 선포라는 초유의 사태는 몇십 년 전의 과거를 소환하는 역사적 퇴행의 장면을 연출했다. 어렵게 일군 민주주의가 무너질 것만 같은 절망을 체험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하지만 동시에 강렬한 희망의 빛이 타올랐다. 시민들은 다시 광장에 섰다. 2000년대 촛불시위의 세례를 받은 젊은 세대는 대개 홀로 집회에 나와 모두와 연대했다. 또래와 응원봉으로 연대하고 노동자 농민과의 민중 연대를 도모했다. 그렇게 민주주의는 젊은 시민과 함께 이전과 다른 의미의 ‘광장’이라는 시험대에 섰다.
12·3 내란의 후폭풍 속에서 한국 민주주의 현대사를 탐색한 《모두의 민주주의》가 출간되었다. 민주주의의 눈으로 한국 근현대사를 재해석·재구성하는 작업을 해온 김정인 춘천교대 교수의 신작이자, ‘민주주의 한국사’ 3부작의 완결편이다.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이번 책 역시 통사적 구성이 아니라 ‘미국, 반공, 민족, 개발, 독재, 민중, 시민사회’라는 7가지 개념을 중심으로 구조적으로 접근한다.
지은이는 오늘날은 민주주의가 모든 이들에게 절대적 신념으로 자리잡은 ‘모두의 민주주의 시대’라고 말한다. 모두가 스스로를 민주주의자로 여기는 시대는 어떻게 형성된 것일까. 그리고 앞으로 민주주의 역사의 향방은 어떻게 흐를까. 해방 이후부터 2000년대 촛불시위까지 한국 민주주의 현대사를 다룬 이 책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미국, 반공, 민족, 개발, 독재, 민중, 시민사회
7가지 개념으로 살펴본 한국 민주주의 현대사
이 책은 해방 이후 한국 현대사에서 ‘미국, 반공, 민족, 개발, 독재, 민중, 시민사회’의 7가지 개념을 추출하여 대주제로 설정하고, 현대 민주주의 역사를 구조적으로 접근하는 주제사적 서술방식을 택했다. 예컨대 1980년대 학생운동은 학생운동사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역사이지만, 1980년대 민주주의 역사를 다룬 6장 〈민중과 조우한 민주주의〉에서는 학생운동보다 민중운동의 부상을 시대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역사로 파악하고 이를 중심으로 그 시대를 서술한다.
지은이는 역사적 평가를 자제하고 정치·제도, 지식·담론, 저항·운동적 사건을 객관적으로 살펴보고자 했으며, 비판이 필요할 때는 되도록 당대에 생산된 관련 사료를 제시했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연구자로서 과거라는 시간과 잘잘못을 따지며 다투기보다는 ‘역사적 대화’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는 현재주의를 벗어날 수는 없지만 당대적 맥락을 고민하는 역사주의적 안목에 대한 고민을 담은 시도이기도 하다.
‘모두의 민주주의 시대’는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지금 여기, 민주주의의 의미를 묻다
지은이는 여전히 현재성을 내뿜고 있는 최근의 과거를 역사 연구의 대상으로 삼고 재해석하는 일은 쉽지 않은 과정이었다고 고백한다. 현대사의 경우 역사학계는 물론이고 사회과학계를 아울러 연구 성과가 풍성했지만 동일한 사실에 대해서도 서로 다른 시각으로 서술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기에, 사료를 발굴하고 해석하는 시간 이상으로 기존의 연구 성과를 검토하는 데 많은 시간이 소요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난관을 헤쳐 나가며 책을 완성하게 만든 동력은 지금, 여기의 현실이었다. 윤석열 정부하에서 매일같이 민주주의에 대해 끊임없이 물음표를 던지는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으며, 과거라는 거울 속에는 이러한 현실에 던지는 ‘왜?’라는 질문의 답을 찾을 수 있는 참조점이 넘쳐났다. 지은이에게 현대 민주주의 역사를 연구하고 집필하는 시간은 역사 공부가 갖는 현재주의의 힘을 깨닫는 시간이었다. 2025년의 초입에 다시 맞이하게 된 민주주의 갈림길의 경험이 우리에게 전화위복의 시간이자 민주주의 역사를 ‘오래된 미래’로 성찰할 수 있는 눈을 키우는 계기가 되기를, 이 책이 그러한 시도의 디딤돌이 되기를 바란다.
‘민주주의 한국사’ 3부작, 10년 만에 완간
이 책은 한국 근현대사를 민주주의적 시각에서 재구성하고자 한 ‘민주주의 한국사’ 3부작의 마지막 권에 해당한다. 1부 《민주주의를 향한 역사》(2015)는 1801년 공노비 해방으로부터 출발해 1919년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까지, ‘인민, 자치, 정의, 문명, 도시, 권리, 독립’이라는 7가지 개념을 화두로 삼아 민주주의의 기원과 역사를 다루었다. 2부 《독립을 꿈꾸는 민주주의》(2017)는 3·1운동부터 해방 직후 미군정기 민주주의 논쟁까지의 역사를 다루었으며, 독립운동이 곧 민주주의 투쟁임을 드러내기 위해 ‘자치, 주체, 권리, 사상, 정의, 연대, 해방’ 등 7가지 개념을 주제어로 삼았다. 대장정 끝에 완결된 ‘민주주의 한국사’ 3부작이 여전히 새롭게 ‘발견’되고 ‘변화’하는 민주주의를 다시금 성찰하는 마중물이 되기를 기대한다.
책의 세부 내용
1장 미국이 주조한 민주주의
1948년 5월 10일, 미군정하에서 보통선거법이 마련되어 한국인은 처음으로 참정권을 행사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막을 내린 미군정의 통치는 대대적인 선전과 홍보를 통해 ‘미국=민주주의’ 이미지를 만들어내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교육을 미국식 민주주의 전파의 보루로 활용했다.
2장 반공에 포획된 민주주의
대한민국 초대 정부인 이승만 정부는 반민특위를 공격하는 등 친일파 청산에 제동을 걸고, 정적을 제거하는 파상 공세와 함께 반공동원체제 구축에 나섰다. 1950년에 발발한 한국전쟁 이후 반공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시대가 도래하면서 사회민주주의와 평화통일론이 설 땅은 점차 사라져갔다.
3장 민족을 소환한 민주주의
1960년 4·19혁명 직후 일어난 통일운동과 한일협정 체결 반대운동으로 1950년대에 외면당했던 민족주의가 소환되었다. 1961년 5·16쿠데타 이후 군사정부와 박정희 정부도 민족적 민주주의를 앞세워 민족주의를 전유하려 했으나, 쿠데타 세력과 지식인・학생 간에 건널 수 없는 대립의 골이 형성되었다.
4장 개발과 불화한 민주주의
1950년대에 등장한 경제개발 담론과 선개발 후민주화 담론이 1960년대에 군사정부의 경제개발계획 추진으로 현실화되면서 한국은 개발의 시대에 진입했다. 그러나 경제개발의 성과와 함께 극심한 부작용이 드러나면서 개발 권력에 대한 민중의 저항도 본격화되었다.
5장 독재에 맞선 민주주의
삼선개헌 및 유신체제 수립과 함께 박정희 정부의 한국적 민주주의 이념을 기반으로 독재가 전면화되었다. 이에 저항하는 유신 반대운동 과정에서 학생운동과 재야세력을 중심으로 민족·민주·민중 삼민의 저항 가치를 공유하고 연대하며 운동사회가 형성되었다.
6장 민중과 조우한 민주주의
1980년대에 저항 주체로서 민중의 세력화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다채로운 민중 담론과 변혁론이 제기되고 민중문화운동이 활발해진 가운데 운동사회에서 민중운동의 주도권이 강화되었으며, 1987년 6월 항쟁 이후 전국적 민중운동 조직이 탄생하면서 이를 기반으로 하는 진보정당이 국회에 진출했다.
7장 시민사회가 일군 민주주의
6월 항쟁 이후 시민사회가 민주주의 공고화 과정을 주도했다. 그 과정에서 민주주의의 ‘이행기적 정의 실현’이라는 과거사 청산이 이뤄졌으며, 2000년대 이후에는 시민들이 촛불시위 등을 통해 직접 민주주의의 광장을 만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