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제공 책 소개
이런 세상에서는 어째서
사랑하고 싶은 만큼 사랑할 수도 없는 것일까
『연애, 하는 날』은 우리 시대의 욕망과 그 비참함에 관한 이야기이다. 욕망을 욕망이라고 부르건 사랑이라고 부르건, 그것은 늘 상처 입고 타락한 모습으로 실현되고, 그 내력을 담는 공간은 늘 왜곡된다. ‘연애하는 날’은 진흙의 시간 속에 기포처럼 떠 있지만, 기포만큼 맑은 것은 아니며, ‘연애하는 방’은 인환의 거리에서 도려낸 먼 섬처럼 물러서 있지만, 섬처럼 평화로운 것은 아니다. ―황현산 · 문학평론가
이런 소설을 만나는 것이 실로 얼마 만인지. 총체적이면서도 동시에 개별적인, 지금 이 순간 고통을 품고 신음하는 우리의 앓는 몸과 같은 소설. 이 세계의 폭력으로부터 상처 입은 영혼을 안고 있으면서 치유받기를 갈망하고 소통하기를 꿈꾸는 소설. 그래서 아프고, 무섭고, 슬프다. 그러나 또한 가슴이 메도록 아름답다. ―이창동 · 영화감독
2010년 가을, 계간 《문예중앙》의 새로운 시작과 함께 화제를 모으며 일 년간 연재된 최인석의 장편소설 『연애, 하는 날』이 출간되었다. 연애로 도피할 수밖에 없는, 연애 그 자체에 기댈 수밖에 없는, 연애로 인해 파멸할 수밖에 없는 인물들을 통해 오늘날의 익숙하면서도 낯선 삶의 구석구석을 포착해낸 리얼리즘 소설로, 열 번째 장편소설을 발표하는 중견작가 최인석의 힘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처음으로 사랑이라는 것을 해보는 여자와 애초에 사랑보다는 물질의 논리에 길들여진 남자, 그리고 그들을 얽고 있는 다중의 관계들 속에서 은밀한 연애가 꿈꾸게 하는 것, 맛보게 하는 것, 또 그것이 돌려주는 것, 남기는 것은 무엇인가를 냉정하게 묻고 있는 이 소설은, 매혹적이면서도 파멸적인 연애들이 꽃피고 스러져가는 참혹한 과정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연애, 그 환희와 상처의 이중적인 풍경으로부터
# 만남
장우는 어머니의 부탁으로 마지못해 기름장수 아주머니 딸의 뒤늦은 결혼식에 참석한다. 그곳에서 본 수진은, 어린 시절 보았던 그 울보 수진이, 아니 환한 웃음을 지닌 눈부신 여자, 다른 남자의 아내였다.
# 여자_수진
장우의 회사에 취직하고 그의 부름에 따라 호텔로 찾아가고, 그가 키스하는 순간, 수진은 저항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녀에게 처음 느껴보는 사랑이 된다.
장우는 그녀와의 만남을 위해 오피스텔을 마련하고 몇백만 원씩을 아무렇지 않게 건네지만 수진이 그의 요구에 응하고 그를 만나는 것은 돈 때문이 아니다. 그녀는 장우와의 관계를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사랑이라 믿고, 처음으로 느껴보는 사랑이라는 뜨거운 감정에 환희를 느낀다. 자신이 한 남자의 아내이고 두 아이의 엄마이기도 하다는 사실은 이미 그녀에게 중요하지 않다.
지금 그녀에게 이 사랑보다 더 명백한 것은 없었다. 이처럼 생생하고 뜨거운 것은 없었다. 길지 않은 그녀의 생애 최초로 그녀는 삶을, 현실을, 그녀 자신을, 그리고 사랑을 명료하게 의식하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오래전부터, 어쩌면 평생 이것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새로운 삶이, 낯선 삶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143쪽
장우를 위해 장을 보고 ‘이월의 방’에서 그를 기다리는 매 순간들은 오로지 그녀에게 설레고 떨리는 시간으로 기록된다. 일상처럼 밀회를 즐기던 어느 날 장우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협박자가 건넨 그들의 밀회 사진을 내밀고 수진은 그들 관계에 불안함을 느끼기 시작한다.
아내의 변화를 막연하게나마 느끼지만 공장 파업으로 지쳐 있던 남편 상곤은 막무가내로 그녀를 취하려 하고 몸싸움을 벌인 끝에 멍투성이가 된 수진은 아이들도 내버려둔 채 집을 나가고 만다…….
# 남자_장우
처음에는 그저 훔치고 싶었을 뿐이었다. 가진 것도 없으면서 십 년 넘게 산 남편과의 뒤늦은 결혼식에서 환하게 웃는 수진의 얼굴은 장우가 가져본 적 없는 것이었고, 다만 그것을 훔쳐서 소유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장우에게 수진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일은 너무도 쉬웠다.
하지만 그녀는 잠깐씩 데리고 놀던 다른 여자들과는 달랐다. 점점 더 아내 같아졌고 그래서 그는 혼란에 빠진다. 적당히 만나다가 일정 선을 넘어갈 때에는 가차 없이 버린다, 는 것이 본래 그의 매뉴얼이다. 수진이 그에게 아파트를 사달라고 한 것은 매뉴얼에 없는 페이지였다. 매뉴얼의 마지막 장에 도달한 그는 선택을 해야 한다.
수진은 다른 여자들과는 달랐다. 그녀는 아내 같았다. 그와 수진은 마치 서로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 같았다. 사랑하는 것이 아니던가? 장우는 알고 있었다. 처음부터 그런 것을 기대한 적은 없었다. 그는 수진을 훔쳤다. 그녀의 맑고 눈부신 웃음, 그 거침없는 즐거움, 그 구김살 없는 몸짓, 그가 훔치고 싶었던 것은 그런 것이었다. ―102쪽
아파트며 건물을 밥 먹듯이 사고파는 그에게는 여자와의 관계도 다를 것이 없다. 시세 차익을 셈하듯이, 대차대조표를 분석하듯이 매뉴얼대로 순서를 밟을 뿐인 그는 수진에 대한 애틋한 감정도, 아내 서영에 대한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다. 마지막 장에 도달하고도 수진과 끝내지 않고 좀더 가보기로 한 것은, 단순히 호기심 때문이다…….
그는 수진을 사랑하지 않았다. 어느 누구도 사랑하지 않았다. 결혼한 후 어느 시점에 그는 사람을 사랑할 수 없게 된 것 같았다. 그는 더 이상 아내를 사랑한다 말할 수 없었다. 아내를 사랑한다 말한다면, 수진을 사랑한다고 말한다 해도 그것은 뻔뻔스럽고 우스운 거짓말이었다. 사랑이라니. ―130쪽
욕망과 절망의 공간에서 붙드는 삶의 한 장면
『연애, 하는 날』은 무언가를 가지기보단, 더 많이 잃어본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달콤한 연애, 구원하는 연애는 경험한 적도 없고 알지도 못하는 그들에게 허락된 것은 스스로를 상처 입히는 연애, 연애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참혹한 현실의 풍경이다.
연애라는 것은 어찌 보면, 기대하기로는 가장 은밀하고 가장 친밀한, 어쩌면 결혼보다 사회적 인지를 덜 필요로 하기 때문에 훨씬 더 은밀하고 사적인 인간관계라 할 수 있는데, 그런 인간관계가 집, 이라는 것과 더불어 물질이나 물적 관계로 하여 어떻게 피폐하고 참혹한 지경이 될 수 있는지를 생각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최인석(《문예중앙》 127호 대담에서)
그들은 결코 가질 수 없는 것들을 욕망하고 그것을 향해 내달리고 또 거듭 상실을 경험한다. 그래서 이 소설은 어딘가 익숙하다. 지금 현실 어딘가에서 벌어지는 삶과 데칼코마니처럼 겹쳐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익숙하다고 느끼는 순간 또 한없이 낯설어진다. 무언가를 잃어버린 그들은 빈 곳을 채우기 위해 누군가를 원하고 또 몸을 섞지만, 그 순간에도 서로 다른 감정과 이면의 목적을 헤매고 있다.
이 시대의 부정할 수 없는 한 풍경들, 뜨거우면서도 한없이 냉정한 연애의 두 얼굴을 그려내면서 작가가 궁극적으로 이야기하고자 한 것은, 일그러진 욕망의 추악함이나 절망의 나락, 혹은 맹목적인 희망이 아니다. 그것을 견뎌내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의 장면들, 결국 삶을 버텨낸다는 것의 의미일 것이다.
슬픔, 좌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내야 하는 삶, 감당해내야 하는 세계, 그런 자세.
한 사람 한 사람에게서 난 시시포스나 프로메테우스 같은 존재를 봅니다.
―최인석(《문예중앙》 127호 대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