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제공 책 소개
출간 의의
말의 뒤를 따라 걷는 가장 느리고 성실한 기술자들
사전 편찬자들의 목소리를 기록한 최초의 책
벽돌책의 원조, 궁극의 편집, 압축과 정제의 세계……. 사전을 수식하는 말들은 극한의 미학을 뽐내기라도 하듯 끝을 향해 치달린다. 사전 만들기는 편집이라는 말로도 모자라 편찬編纂이라는 단어를 쓰는 유일한 작업이기도 하다. 그런 고도의 지적 기술인 만큼 사전은 오랜 시간 가장 믿을 만한 지식을 집대성한 책으로 권위를 인정받아왔다. 그러나 그 어려운 작업을 해낸 사전 편찬자들은 공론의 영역에서 조명 받은 일이 거의 없다. 사전에 대한 비판은 있어도 사전 편찬자를 호명하거나 평가하는 말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메리엄-웹스터 사전의 편찬자 코리 스탬퍼Kory Stamper는 최근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글에서 “사전 편찬은 본질적으로 느린 작업이다. 사전 편찬자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리고 다양한 출처와 화자를 아울러 단어의 사용 양상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검토해야 한다. …… 언어는 사전 편찬자보다 훨씬 더 빨리 움직이지만, 세세한 것들에 대한 사전 편찬자의 근시안적인 집착이야말로 사전의 내용을 조지 오웰의 소설 속 정부기관과 같아지지 않도록 지켜내는 힘”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일 자체가 가진 속성 때문에 늘 한 발짝 뒤에서 세상보다 천천히 움직이던 사전 편찬자들은 인터넷과 검색의 시대가 열리면서 세상에서 완전히 밀려나버렸다. 한 번도 주인공이 되어보지 못했는데, 무대 자체가 아예 사라져버린 것이다.
IT 기업에서 일하지만 자신을 ‘사전 편찬자’라고 규정하는 저자는 그 어느 때보다 (양적으로) 풍요로운 사전 콘텐츠를 소비하는 시대에 정작 그 콘텐츠를 생산한 사전 편찬자들은 아무런 인정도 받지 못한 채 일자리마저 잃어버린 현실이 안타까웠다. 또한 당대의 언중 사이에서 자리 잡은 ‘말’(어학사전)과 분야별 전문가들의 검증을 거친 ‘지식’(백과사전)을 성실하게 갈무리해온 사전 편찬의 전통이 기록 하나 없이 사라져가는 걸 두고 볼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과거 사전 편찬의 현장에서 활약했던 5명의 사전 편찬자를 만났다. 그가 만난 이들은 시대적으로는 1930년대 조선어학회부터 현재까지, 분야로는 백과사전에서 한국어사전 및 외국어사전까지, 편찬 주체로는 학회와 대학 연구소, 출판사를 아우르는 현대 한국 사전의 역사 거의 전 범위를 포괄한다. 뿐만 아니라 이 책에서는 ‘사전 편찬자의 사생활’이라는 장별 부록을 만들어 집단 저작물이라는 사전의 속성에 가려져 있던 사전 편찬자의 개인성을 드러냈다.
현대 한국의 지적 자산은 어떻게 축적되어왔는가
이 책에서 소개하는 사전은 크게 한국어사전과 백과사전, 외국어사전으로 나눌 수 있다. 각 사전의 발전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해방 전후부터 현재까지 현대 한국의 지적 자산이 정리되고 정착되어온 과정을 일별할 수 있다.
먼저 조선어학회/한글학회의 『큰사전』에서 본격화된 한국어사전의 역사는 이희승, 신기철?신용철 등 전문가를 앞세운 출판사 사전들의 경쟁 시대, 1988년에 개정된 ‘한글 맞춤법’과 ‘표준어 규정’을 신속하게 적용한 사전들의 상업적 성공을 거쳐, 1999년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 출간으로 민간의 한국어사전들이 한순간에 상업적 가치를 잃고 두 대학(고려대, 연세대)과 국가가 만든 사전만 살아남은 현재에 이르렀다. “전체적으로 보면 민간의 역할을 국가가 가져가 수행한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42쪽) 이 과정은 한국인들이 한국어와 한글을 바라보는 관점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국민들은 어휘의 정확한 사용법이나 표기법을 모를 때 국립국어원에 무엇이 옳은지 묻고, 국립국어원은 그것을 일일이 검토해 답해주는 일종의 결정자 역할을 하고 있다. 문법과 표준어는 기본적으로 권장사항일 뿐인데, 한국어 사용자들은 마치 이것을 지켜야 할 법인 양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43쪽)
1970~90년대 한국의 백과사전 시장은 전성기를 구가했다. 이 책에서는 그 가운데 『브리태니커백과사전』(이하 『브리태니커』)에 주목했다. 『브리태니커』는 번역사전이긴 하지만, ‘한국’ 관련 항목을 충실히 보강하면서 진보적 색채를 띠기까지 했고, 국내 백과사전들에 비해 일본 사전의 영향에서 자유로웠기 때문이다. 또한 한창기라는 걸출한 문화인이 『브리태니커』 영어판 판매에서 시작해 한국어판을 출간하기까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이루어낸 『뿌리깊은나무』, 『한국의 발견』 등의 빛나는 문화적 성취를 엮어 한국 출판문화의 한 절정을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브리태니커회사의 장경식 대표는 지식의 구조와 백과사전의 역할을 부단히 고민해온 ‘브리태니커 정신’을 소개하며, 위키백과를 제외한 모든 백과사전이 힘을 잃고 균형 잡힌 지식, 신뢰할 만한 지식을 누구도 제시하지 않는 시대에 대한 우려를 표했다.
이 책을 관통하는 또 하나의 주제는 바로 현대 한국 사전의 역사에 드리운 일본의 짙은 그림자이다. 특히 외국어사전의 경우 대다수가 여러 종의 일본 사전을 번역해 짜깁기하는 식으로 만들어졌다. 일본어가 익숙했던 1세대 사전 편찬자들에게는 영미권의 사전을 참조하는 것보다 일본 사전을 그대로 번역하는 편이 훨씬 수월했기 때문이다. 저자는 대표적 사전 출판사였던 민중서림과 금성출판사에서 편찬 실무를 총괄했던 안상순, 김정남 선생에게 대체 일본 사전을 얼마나 베낀 것인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고, 그들은 부끄러운 과거지만 당시로서는 가장 현실적인 선택이었다고 말했다. 저자가 이를 집요하게 물은 건 그런 ‘흑역사’를 인정한 뒤에야 미래의 사전을 그려볼 수 있기 때문이다.
웹사전 편찬자 VS 종이사전 편찬자
신뢰와 애정을 바탕으로 한 건설적인 토론을 관전하는 즐거움
『최후의 사전 편찬자들』은 웹사전 편찬자와 종이사전 편찬자의 대화를 엮은 책이다. 그렇다 보니 자연스럽게 서로 다른 시대적, 사회적 배경에 따른 입장 차이가 드러난다. 규범사전의 시대를 살았던 종이사전 편찬자들은 기본적으로 한글 맞춤법과 표준어 규정을 준수해야 한다는 입장을 지지하는 편이다. 규범이 언중의 언어생활을 가로막아서는 안 된다며 충분히 열려 있는 태도를 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킬 건 지켜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반면에 웹사전 편찬자인 저자는 오늘날의 사전 편찬은 수많은 예문을 모아놓은 말뭉치 안에서 어휘와 예문을 얼마나 잘 꺼내 기술하느냐가 중요하다는 입장이다. 정확한 정의, 엄격한 규범을 제시하기보다는 다양한 예문과 그것이 쓰이는 빈도를 충실히 보여주는 게 오늘날 사전의 역할이라고 말한다.
조재수 : 그건 기본입니다. 어느 나라라도 철자법 같은 규범은 지켜야 하는 것이죠. 다만 우리나라는 아직까지도 표준어라는 족쇄에 붙잡혀 있는 것이 문제인데, 표준어를 인정할 수 없다는 게 아니라 표준어를 계속해서 늘려나가야 한다는 거죠. _ 47쪽
정철 : 저는 빈도주의자예요. 대부분의 언어 현상은 빈도와 분포가 설명해준다고 생각하거든요. 뜻풀이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중략) 사람은 어떤 문장을 마주했을 때 단어 하나하나를 각각 분석해서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문장을 통째로, 각 단어들이 어우러진 관계 전체를 입체적으로 받아들이잖아요. 그러니 다양한 예문을 많이 접하게 해주면 그 안에서 각 단어의 의미도 파악할 수 있다고 봅니다. 각 단어가 사용된 빈도라고 하는 확실한 숫자를 체계적으로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많은 내용이 전달되죠. _ 261쪽
안상순 : 물론 언어의 규범은 없어질 수도 없고 없어져서도 안 되죠. 말은 문법이라는 규칙에 의해 운용되고 있으니까요. 그 규칙은 학자들이 만든 것이 아니라 언어 공동체가 오랜 세월에 걸쳐 함께 만들어낸 겁니다. 그런데 그 규범을 단어 하나하나에까지 적용해서 쓸 수 있는 말과 쓸 수 없는 말을 미리 규정하고 지나치게 제약을 가하는 것은 억압일 수 있어요. _ 27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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