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시간은 다르게 적힌다
당신에게도 있는, 그런 기억을 만나다
*
“누구도 과거의 자신을 폐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편집하거나 유기할 권리 정도는 있지 않을까.”
한국 문학의 빛나는 고유명사, 은희경의 신작 『빛의 과거』가 출간되었다. 『태연한 인생』(2012) 이후 7년 만에 선보이는 장편소설로 깊이 숙고해 오랫동안 쓰고 고쳤다. 2017년의 ‘나’는, 작가인 오랜 친구의 소설을 읽으면서 1977년 여자대학 기숙사에서의 한때를 떠올린다. 같은 시간을 공유했지만 서로가 기억하는 ‘그때’는 너무나 다르다.
은희경은 갓 성년이 된 여성들이 기숙사라는 낯선 공간에서 마주친 첫 ‘다름’과 ‘섞임’의 세계를 그려낸다. 기숙사 룸메이트들을 통해 다양하며 입체적인 여성 인물들을 제시하고 1970년대의 문화와 시대상을 세밀하게 서술한다. 무엇보다 회피를 무기 삼아 살아온 한 개인이 어제의 기억과 오늘을 넘나들면서 자신의 민낯을 직시하여 담담하게 토로하는 내밀한 문장들은, 삶에 놓인 인간으로서 품는 보편적인 고민을 드러내며 독자 자신을 바라보게 한다. 그렇게 ‘그때 그 시절’의 이야기는 ‘은희경’이라는 필터를 거쳐 ‘오늘, 나’의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각자의 인생 속에서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감독이 됩니다. 그리고 관계하는 세계를 우리 자신의 눈으로 연출합니다. 내가 다른 감독의 작품 속에서 나도 모르게 주인공에게 상처를 입히는 조연으로 활약했던 순간이 대체 몇 번이나 있었을까, 이 책을 덮으며 저는 결코 알 수 없을 저의 필모그래피를 조용히 가늠해보았습니다. 신요조(책방 무사)
“자기 몫의 삶을 살아내고 있을” “안 보이는 대다수”의 서사를 되살려낸 이 소설을 다 읽고 나면 다소 쓸쓸한 질문이 남는다. 그 많던 여성 대학생들은 모두 어디로 간 걸까. 그들이 꾸던 꿈은 어떤 자취를 남기며 사그라들었을까, 혹은 피어났을까. 차경희(고요서사)
은희경을 읽는다는 것은 언제나 한국 현대 여성의 목소리를 듣는 일이다. 나와 닮은 목소리를 드디어 만나 그이의 차분하지만 낯설고 독보적인 말에 과녁처럼 관통당하는 일이다. 정세랑(소설가)
은희경이 1970년대 말 서울 어느 여자대학교 기숙사 이야기를 썼다고 하면 다음과 같은 기대를 품는 것은 당연하고 정당하다. 첫째, 당대의 정치적 공기와 문화적 풍속도를 생생하게 복원해낼 것이다. 둘째, 여성의 경험적 진실에 충실한 ‘입사 이야기’의 전형을 보여줄 것이다. 셋째, 또렷한 젠더 렌즈에 포착된 한국 근대성의 성별을 폭로할 것이다. 넷째, 적절한 관념어와 압착된 구문으로 대상을 틀어쥐는, 악력握力 넘치는 문장이 매력적일 것이다……
그리고 이변은 없다. 이번에도 우리의 기대는 어김없이 충족된다. 신형철(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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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 여자들,
사적이며 공적인 ‘나’의 이야기
이야기는 중년 여성 김유경이 오랜 친구 김희진의 소설 『지금은 없는 공주들을 위하여』를 읽게 되며 시작된다. 대학 동창인 그들은 “절친하다거나 좋아하는 친구라고는 말할 수 없”고 “끊어진 건 아니지만 밀착될 일도 없”는, 어쩌다 보니 가장 오랜 친구가 된 묘한 관계다. 같은 시공간을 공유했으나 전혀 다르게 묘사된 김희진의 소설 속 기숙사 생활을 읽으며, 김유경은 자신의 기억을 되짚는다.
기숙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룸메이트다. 타의에 의해 임의로 배정된 네 명이 한 방을 쓰는데 ‘임의’의 가벼움에 비해 서로 주고받는 영향은 터무니없이 크다. 국문과 1학년 김유경의 322호 룸메이트는 화학과 3학년 최성옥, 교육학과 2학년 양애란, 의류학과 1학년 오현수다. 최성옥과 절친한 송선미의 방인 417호 사람들(곽주아, 김희진, 이재숙)과도 종종 모이곤 한다.
1977년의 이야기는 3월 신입생 환영회, 봄의 첫 미팅과 축제, 가을의 오픈하우스 행사 등 주요한 사건 위주로 진행된다. 김유경의 서사가 굵직하게 이어지는 사이사이, 322호와 417호의 룸메이트인 일곱 여성들의 에피소드도 다채롭게 전개된다. 그들은 각자 “성년이 되어가는 문으로 들어가” “낯선 세계에 대한 긴장과 혼란과 두려움 속에서 자기 인생을 만들어”간다(2016년 작가 인터뷰). 김유경은 말더듬증이라는 약점 때문에 자신의 욕망을 내리누르며, 말과 행동이 필요한 순간 입을 다문다. 회피를 방어의 수단으로 내세우면서 자신을 끊임없이 세상의 어중간한 어디쯤에 위치시키려 한다. 한편 누군가는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다. 무리에 휩쓸리지 않고 번거로움을 감수하며 취향을 조용히 발전시키는 오현수, 남을 끌어내려 항상 주인공이 되길 바라는 김희진, 그와 비슷하지만 남의 눈이 아니라 무엇보다 자신의 욕구 충족이 중요한 양애란이 그렇다. 지향점과 실제의 삶에 괴리가 심한 사람도 있다. 최성옥처럼 자신이 선택한 남성에 의해 그 괴리가 발생하기도 하며, 끊임없이 다른 사람을 자신의 입맛에 맞추어 교정하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이 매사 주요하게 지적했던 바로 그 지점에서 발을 헛디뎌버리는 곽주아 같은 경우도 있다. 그들은 “치졸하고 나이브”(「작가의 말」)하며, 소탈하기도 섬세하기도 하다. 선량하고도 얄미우며 까칠하면서도 유약하다. 마치 오늘의 우리처럼.
여러 문학평론가가 언급하듯, 한국 문학이 어떤 ‘인물’을 통해 인간과 인간의 근원적인 고민을 드러낸다고 할 때 많은 경우 그 ‘인물’ 앞에는 은연중 (남성)이라는 괄호 속 함의가 있었다. 여성들은 문학 속 ‘(남성) 인물’에 젠더를 교차해 자신을 이입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여성의 경험에 중실한 입사 이야기initiation story”(신형철)인 『빛의 과거』는 여성들의 다양한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내면서 이입의 거리를 좁힌다. 그렇기에 “은희경을 읽는다는 것은 언제나 한국 현대 여성의 목소리를 듣는 일”이 된다. “나와 닮은 목소리”(정세랑)로 쓰인 이 소설을 읽고 나면 내 얼굴과 닮아 있는 소설 속 그들의 안부를 묻게 되는 것이다. “그 많던 여성 대학생들은 모두 어디로 간 걸까”(고요서사 차경희).
지금 눈앞에 도착한 기억의 빛
‘미지를 통과해 이제야 내게로 도착한 빛이었다’
『빛의 과거』에는 1970년대의 정치.문화적 시대상이 뚜렷하게 드러나 있다.
그때 학생들은 독재 정권에 맞서 전단을 돌리고 어용 총장 임명에 항의해 검은 리본을 달았다. 학생운동을 하다 구속.구금되는 일이 다반사였다. 김유경은 치열하게 투쟁하지 않지만, 매사에 튀지 않고 나서지 않으며 한 발을 빼는 그의 삶의 방식 역시 돌고 돌아 시대 상황과 맞닿아 있지 않을까. 김유경이 ‘모범’ 혹은 ‘평범’이라는 태도를 걸치기 시작한 큰 원인은 말더듬증이다. 군사 훈련을 연습하는 수업인 고등학교 <교련> 시간에 구령 외치기를 강요당하고부터 말더듬증 트라우마가 강화된 것으로 미루어보면, ‘회피’라는 수동적 처세 방식은 오롯이 김유경 개인의 나약함에서만 비롯된 것은 아닐 듯하다. “훈육과 세뇌에는 탈출구가 없다.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는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바뀔 수도 없으며, 끝없이 반복되는 그 틀의 궤적에 부딪히고 상처입고 위축되며 계속해서 눈치껏 나를 속이며 살아야 하는 걸까”(p. 245).
어길 수 없는 명령이 주어지고 그에 따르지 못하면 마땅히 불이익을 당해야 했던 시대의 폭압은 소설 곳곳에 공기처럼 배어 있는데, 지방 도시 출신인 김유경이 고속버스터미널에 귀향 표를 예매하러 갔다가 허탕을 치고 돌아왔을 때의 경험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정수리 위로 대나무 장대가 수평으로 빠르게 왔다 갔다 하며 머리통이 솟아오르지 못하도록 위협했다. 조금이라도 허리를 폈다가는 노인이든 어린아이든 가리지 않고 머리통을 맞아야 했다. 그들이 아무 이유도 없이 위치를 바꾸라고 명령하면 군대에서 기합을 받듯이 무릎걸음으로 움직였다”(pp. 243~44).
<BR
진태
4.0
먼 우주에서 온 빛이 이제서야 도착했다.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르다. 그럼 이제 그 빛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손효능
4.0
<1> 여자라는 이유로, 체면에 발목이 잡혀 어떤 욕망에도 솔직해질 수 없었던 공주들의 이야기. 자기 내면에서 상충되는 욕망과 여자다움으로 고통받고 갈가리 찢겼을, 지금은 없는 공주들의 그늘진 흔적이 이 자리에 남겨졌다. ⠀⠀⠀⠀⠀⠀⠀⠀⠀⠀⠀⠀⠀⠀ <2> 친한 것과 상관없이 오래된 친구가 중요한 이유는, 때로는 나조차 잊고 만 나의 시간을 간직한 채 함께 성장하고 함께 늙기 때문 아닐까?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 <3> 유경은 대학생 무렵부터 ‘다름’에 대해 이해하기 시작했고, 이해는 다름과 차츰 섞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어른이 된다는 건 결국 이런 것 아닐까? 타자에 대한 이해와 공감, 그리고 거기서 시작되는 받아들이는 자세. 난 ‘나’라는 자아가 형성되는 청소년 시절이야말로 온전히 자기 자신만을 생각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이기적이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타인이 바라는 존재가 되려 해선 안 된다는 뜻이다. 왜냐면 내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조차 모른 채, 평생 나를 잃은 채 살게 되면 영영 타인의 영향력에 휩쓸리며 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나를 알아간다는 것, 그리고 나를 잃지 않기 위해 장점도 단점도 온전히 받아들인다는 건 처음엔 무척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한 번 중심을 잡으면 ‘나’라는 존재가 반드시 다름의 형태로 드러나게 되어 있다. 그리고 이는 곧 나라는 그릇에 세상과 사회, 수많은 사람의 다름을 받아들이고 섞일 수 있는 준비가 되었다는 것 아닐까. ⠀⠀⠀⠀⠀⠀⠀⠀⠀⠀⠀⠀⠀⠀ <4> 아직 이 소설의 인물들처럼 40년 전 과거가 존재하진 않지만, ‘남들에 의해 소환되는 그 시절의 나도 싫었고, 그들이 알고 있는 그 시절의 나인 척하고 있을 게 분명한 현재의 나도 싫었다.’는 내용은 어째서인지 찬찬히 곱씹어 읽게 되었다. 아직 10년 전에 불과하지만, 그럼에도 중고등학교 시절이 아득히 멀게만 느껴진다. 딱히 그 시절의 내가 싫은 것도 아니고, 그 시절의 나인 척하고 있을 내 모습이 싫은 것도 아니지만 ‘나와 다른 존재’처럼 이질감이 느껴지는 건 왜일까? 어쩌면 성인이 되어 마주치고 뒤섞인 사람들의 새로운 기억이 하나 둘 쌓일 때면 과거의 기억은 덮이고 잊혀지는 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나조차 과거의 나를 어색하게 느낄 만큼. ⠀⠀⠀⠀⠀⠀⠀⠀⠀⠀⠀⠀⠀⠀ <5> 흥미로운 건 나를 포함해 보통의 사람들이 시간과 장소가 새롭게 바뀔 때마다, 현재의 모습은 가면으로 보관해두고 나중에 필요에 따라 적절하게 꺼내 쓴다는 점이다. 누군가를 만날 때면 무의식 중에 상대방과 만난 그 시절 내 모습(인격)이 나오고 마는 것이다. 이런 가면무도회가 좋은 건지 나쁜 건지는 쉬이 판단이 서질 않는다. 그저 추측해볼 수 있는 건, 장소와 사람이 달라지면 다뤄지는 주제도 일어나는 일도 달라지는 만큼 나 역시 마냥 똑같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모임과 상대에 발맞춰 ‘나’라는 인격을 조금씩 미세하게 조정하는 건 적당한 온기를 함께 나눠 받기 위한 본능적인 행동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 <6> ‘똑똑하지는 않지만 예쁘면서 현명한 여자’ 이 소설에 등장한, 그리고 21세기인 지금의 대한민국에서도 여전히 통용될 여지가 다분히 있는, 남자들이 바라는 여자의 이상적인 모습. 정작 남자쪽은 최저 수준에도 못 미치면서 말이다. 애초에 ‘똑똑하지는 않지만 예쁘면서 현명한 여자’라는 표현 전부가 남성의 소유물적 욕심에서 비롯된 환상임을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다. 즉 동등한 입장에서 고유의 인격과 성격과 삶을 가진 사람이 아닌, 그저 소유물로써 순종적인 대상을 묘사했음을 알 수 있다. 길게 고민해볼 것도 없이 여전히 이런 사고방식을 당연한 것처럼 고집하고 있다면, 사랑은커녕 사회 일원으로 존중받을 자격조차 없다는 걸 알고나 있을까. ⠀⠀⠀⠀⠀⠀⠀⠀⠀⠀⠀⠀⠀⠀ <7> 나이 마흔이 되고 쉰이 되었을 때, 난 빛나는 청춘의 조각 가운데 어떤 걸 소중히 기억하게 될 지 궁금해졌다. 사랑 이야기일지, 커리어에 관한 기억일지, 아니면 지금으로선 상상조차 못 할 어떤 이야기될 지…확실한 건 내가 소중히 품게 될 삶의 조각은 무엇이 될 지, 그리고 아직 얻지 못한 조각은 무엇일지 궁금해서라도 인생은 살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134340
3.5
정글에서 살려면 늘 생의 본능에 촉각을 곤두세워야 한다. 그렇다면 미성숙을 생존 본능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갈매동 산마루 별언덕
5.0
왜 이 작품을 쓰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렸는지 알겠다. 오랜 시간을 들이지 않았다면 탄생할 수 없는 작품이기 때문이었다.
반이야
4.0
'약점이 있는 사람은 세상을 감지하는 더듬이하나를 더 가진다 ' . '훈육과 세뇌에는 탈출구가 없다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는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바뀔 수도 없으며 끝없이 반복되는 그 틀의 궤적에 부딪치고 상처입고 위축되며 계속해서 눈치껏 나를 속이면서 살아야 하는 걸까' . '비관은 가장 손쉬운 선택이다 나쁘게 돌아가는 세상을 저항 없이 받아들이는 일이기 때문이다 에너지가 적게 소모되므로 심신이 약한 사람일수록 쉽게 빠져든다 신체 운동이 중력을 거스르는 일인 것처럼 낙관적이고 능동적인 생각해도 힘이 필요하다 힘내라고 할 때 그 말은 낙관적이 되라는 뜻인 것이다' . . 아주 오래전에 은희경의 소설을 읽었었다 '소심함을 감추기 위한 냉소'라는 문구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 그 연장선에 있는 소설같은 느낌이다. . 내안에 있는 저질스러움이나 나약함을 들키기 싫으면서도, 그 감정을 글로 풀어놓은 걸 읽을때의 느낌. . 품격을 유지할 수 있는 날이 얼마나 남아있을까. 급박한 사건에 휘말려 떠밀려가지는 않을까. 그런 걱정을 한바가지 남긴 소설.
김동원
4.5
어디서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은 다르지만 서로 비슷한 모양의 흉터를 지니고 살게 되는 것. 섞여 산다는 것은 그런 의미인가 보다. . 시시한 듯 시작했다가 빠져버린 독서였다. 별볼일 없던 과거의 나의 격정을 시기하는, 더 별볼일 없어진 나를 마주하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사람과 사람에서 그러한 것 처럼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도 서로에게 동경과 같은 질투를 가지는 것 같다. . 아래 발췌 . - 그런 점에서 낙관과 비관의 차이는 쉽게 힘을 낼 수 있는지 아닌지의 차이인지도 모른다. 역설적인 점은 비관이 더 많은 희망의 증거를 요구한다는 사실이다. 어둡고 무기력하게 살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비관을 일삼는 사람이야말로 그것이 깨지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래서 자신같은 비관론자도 설득될 만큼 강력한 긍정과 인내심을 요구하게 되고, 결국 유일하게 그 희망을 줄 수 있는 사랑하는 사람을 괴롭히게 된다. . - 나를 지금의 인생으로 데려다 놓은 것은 꿈이 아니었다. 시간속에 스몄던 지속되지 않은 사소한 인연들. 그리고 삶이라는 기나긴 책무를 수행하도록 길들여진 수긍이라는 재능이었다.
황보경
4.0
각자의 기억은 사적인 문학이다. 어차피 세상은 자신의 중심대로 흘러갈 뿐이다. 나이가 들 수록 순수한 우정은 사라지고, 같은 처지라는 연대만 남는 것이다. 그저 같은 년도에 태어나고 같은 학교를 다녔다는 연대말이다.
콜라
4.0
처음에는 유경의 기억이 맞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점차 그 확신은 흐려졌고 어쩌면 희진의 기억이 맞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다가 지금에 와서는 그것이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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