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제공 책 소개
20세기 한국 사회를 관통하는 휴먼 스케일의 서사
1933년 경기도 이천에서 태어난 김상철 씨는 서울로 이사 와 종로구 효자동에 거주하며 창신소학교, 서울중학교를 다녔다. 6·25 이후 경희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한 그는 1960년대 동화통신사 외신부 기자와 주한 미8군사령부 통역사로 활동하다 1977년 브라질로 이민을 떠났다. 그가 바라본 대한민국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어떤 교육을 받고, 어떤 세계관을 지녔으며, 무슨 생각으로 이 땅을 떠났을까.
이 책 『휴먼 스케일』은 “193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교차하는 세대들이 지녔던 사고 체계에 대한 호기심”에서 출발한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해방을 맞은 김상철 씨를 비롯해, 한글세대라 일컬어지는 4·19세대가 겪은 청춘을 지나, 1976년생이 바라본 대한민국의 과거와 2014년 대한민국의 시스템까지 두루 살핀다. 그런데 이 거창한 스케일의 기획이 과연 가능할까?
책의 제목 ‘휴먼 스케일(Human Scale)’은 본래 인공 환경을 설계할 때 고려해야 하는 인간 신체의 물리적 척도를 뜻한다. 말하자면 의자든 문이든 도시든, 인간이 앉을 수 있어야 하고 드나드는 데 불편함이 없어야 하며, 살아갈 수 있는 크기여야 하는 것이다. 이 책 역시 인간의 척도로 한국 근대사의 풍경을 재구성하고자 했다. 나아가 본래의 개념을 변형시켜 적용했다. 그것은 한국 근대사회가 대량으로 생산하고자 했던 ‘이상적인 인간의 형상’을 뜻한다. 1901년생 함석헌이 꿈꿨던 민족의 청사진부터, 1926년생 김종필이 상상했던 국민의 모습, 1968년 국민교육헌장을 기초한 안호상과 박종홍이 설계한 인간상, 1972년 박정희가 「새마을 노래」에 가사를 붙이며 그렸던 근면한 일꾼의 모습까지, 그 형상은 우리 근대사 곳곳에 출몰하며 나름의 인간을 만들어냈다. 저마다 다른 미래를 꿈꾸며 경쟁을 벌였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은 휴먼 스케일에 대한 이 같은 정의를 개념적 렌즈로 삼아, 제각각의 시선으로 20세기 역사적 단면들을 들여다본다.
우리의 과거가 꿈꿨던 미래의 단면들
“먼저 노정태의 「조선의 랍비들: 함석헌, 안호상, 박종홍」은 세 명의 사상가가 민족을 재료로 삼아 ‘일민’, ‘국민’, ‘씨알’과 같은 집단적 정체성의 청사진을 설계하는 과정을 들여다보면서, 그 청사진의 역사적 맥락을 살펴보고 있다. 반면 윤원화의 「인간의 생산: 국민, 시민, 소비자」는 국가가 교육의 형식을 통해 대량생산하고자 했던 인간의 형상을 되짚어보면서, 그 형상의 우세종인 ‘국민’과 ‘시민’의 의미와 변형 과정을 추적하고 있다.
앞의 두 글이 거시적 관점에서 ‘휴먼 스케일’의 개발과 양산 과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고나무, 복도훈, 김형진의 글은 세대론의 관점에서 역사 속의 개인들이 ‘휴먼 스케일’의 내외부에서 벌이는 고투의 흔적들을 읽어낸다.” 고나무의 글 「김종필과 그의 시대 : 건국신화 없는 건국 세대」에서 그려지는 1926년생 김종필은 그저 5·16 쿠데타의 주역이자 전직 정치인이 아니다. 필자는 19세에 해방을 맞은 식민지 청년, 사회주의자의 딸과 결혼해 한평생 살며 빨갱이 사냥에 나섰던 남자, “혁명”을 꿈꾼 35세의 예편 군인 등 인생의 기로에 선 문제적 김종필‘들’을 다루며 대한민국의 건국신화를 논한다.
문학평론가 복도훈은 최인훈의 「회색인」(1963)을 시작으로 김승옥의 「환상수첩」(1962), 박태순의 「형성」(1966)과 「낮에 나온 반달」(1969) 등 “4.19혁명의 경험을 창작의 원동력으로 공유했던” 1930~40년대생 소설가들의 작품을 통해 5.16 쿠데타 이후 박정희와 김종필이 꿈꿨던 ‘발전’의 실체를 드러낸다. 이들 1960년대 교양소설에 등장하는 젊음에 서린 “비성장의 젊음”을 짚어내고 최인훈이 「회색인」에서 섬뜩하게 예언했던 ‘조국근대화호’의 침몰을 경고한다.
그래픽 디자이너 김형진은 복도훈의 글을 잇듯, 1960년대 말의 김승옥에서 출발한다. 한국 북 디자인의 역사를 일군 1946년생 정병규의 삶의 궤적을 좇으며 1970년대 명동에서 청진동으로 자리를 옮긴 한국 출판계의 풍경을 살핀다. 본격적인 한국 북 디자인 연대기의 앞부분을 차지하는 「뿌리깊은나무」(1976)와 정병규가 디자인한 한수산의 『부초』(1977)를 1970년대 한국 문학과 출판의 흐름이 결정화한 모습으로 그려낸다.
뒤이어 박해천이 편집한 「세상의 모든 ‘읽었다’: 어떤 세대의 독서 경험」은 은희경의 『새의 선물』을 시작으로 공지영, 유하, 신경숙, 김영하 등 12명의 작가들이 쓴 텍스트를 책 사진과 함께 배치해 1960년대 말부터 1990년에 이르는, ‘어떤’ 세대들이 경험했음직한 독서의 경험을 파노라마처럼 보여준다.
한편, 현시원과 박해천은 앞선 글들과 달리 노래와 집이라는 ‘물화된 매개체’로 휴먼 스케일이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방식을 살핀다. 먼저 현시원은 농학자 유달영이 작곡한 「일터로 가자」(1949)를 비롯해 5·16 1주년 기념으로 김종필이 한운사에게 부탁해 만든 「잘살아보세」(1962), 박정희 작사 작곡의 「새마을 노래」(1972)까지 개인과 국가를 연결해주는 매뉴얼로서 기능했던 ‘노래’의 존재 방식을 살핀다.
박해천은 사진작가 김한용이 1964년에 찍은 OB맥주 광고사진에 등장하는 불란서식 이층 주택이 “현대적 문화생활의 근거지로 전유되는 과정을” 살핀다. 글에 나오는 김원의 「어둠의 축제」(1967)를 비롯해 박완서, 서윤영, 이범선 등의 소설에는 어김없이 불란서식 이층 주택이 등장한다. 국가와 종교를 두 축으로 삼아 그려진 타원, 그 중앙에 위치한 ‘요새’이자 ‘방주’로서 불란서식 이층 주택은 스스로 화자가 되어 1960년대 초반 급부상했다가 1970년대 중반 이후 아파트에게 “새로운 시대의 광휘”를 물려주는 자신의 일대기를 재미난 이야기로 들려준다.
인문학박물관, 그 새로운 여정
이 책에는 한국 사회가 꿈꿨던 ‘휴먼 스케일’들을 가늠해볼 수 있는 풍성한 시각자료가 글과 함께 수록되어 있다. 국민교육헌장의 내용을 이해하고 암기할 수 있도록 학년별 수준에 맞추어 제작된 『국민교육헌장풀이』를 비롯해 1950년대 한일 미군 기지 주변 풍경을 담은 사진첩, 4·19혁명 현장을 포착한 사진화보집, 앞서 언급한 김상철 씨의 일제하 국민학교 시절 과제 자료, 1960년대 유명 인사들의 집을 소개한 『여원』의 기사 등이 그것이다. 이 시각자료들은 글의 내용과 직간접적인 관계를 맺는 동시에, 텍스트와 동등하면서도 병렬적인 형식으로 ‘휴먼 스케일’의 역사적 표현 양태들을 보여준다.
이렇게 풍성한 시각자료를 수록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책이 일민미술관에서 열리는 전시 <다음 문장을 읽으시오>(2014. 6. 26~ 9. 21)와 연계, 기획된 공동 출판물이기 때문이다. 이 전시는 2008년 중앙중고등학교 100주년을 기념해 개관해 2013년 문을 닫은 ‘인문학박물관’ 소장 자료를 토대로 기획한 결과물이다. 일민미술관과 신문박물관이 연구자 박해천, 윤원화, 현시원과 협업해 5만여 점에 달하는 인문학박물관 소장 자료 가운데 500여 점을 선정한 후 새로운 시각으로 재해석했다. 배홍철의 「인간 의지를 향한 신뢰의 기록, 인문학박물관」은 “근대화 과정이 야기한 사회생활상의 변모를 성찰하면서 새로운 미래의 가능성을 모색”했던 인문학박물관이 걸어온 길과, 그 새로운 여정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