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구약을 ‘하나님 말씀’으로 보지 않는다. 역사적 고찰을 통해 구약이 서로 다른 시대에 살았던 각기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 쓴 책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을 뿐만 아니라, 내가 유신론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구약은 수천 년 동안 타당성을 유지해온 여러 규범과 원리를 표현해놓은 대단한 책이다. 지금도 여전히 타당하며 장차 실현해야 할 일종의 비전을 선언한 책이다. -서론 중에서
‘어떤 신도 믿지 않는’ 에리히 프롬의 충격적 구약 해설!
급진적 휴머니스트, 에리히 프롬이 사회심리학과 정신분석적 관점에서 구약의 새로운 가치 읽기를 시도한다. 이 책은 자본주의사회에서 인간 소외의 문제를 평생의 화두로 삼았던 에리히 프롬이 구약 속에서 깨알같이 찾아낸, 숨겨진 보물들의 파노라마다. 나치에게 친인척을 잃고, 고향인 독일을 떠나 미국 땅에서 이방인으로 살아야 했던 그는 한평생 인간이 ‘우상’과의 투쟁을 통해 길어 올린 자유와 자주를 획득하는 과정을 탐색한다.
대다수 사람들이 구약 하면 떠올리는 드라마가 있다. 아담과 이브의 타락과 하나님의 벌, 죄지은 인간의 행보... 과연 그 얘기뿐일까? 그게 진실일까? 에리히 프롬은 결단코 ‘아니오’라고 선언하며, 물음표를 던진다. 그에게 구약은 “장차 이뤄져야 할 비전이 담겨 있는 혁명서”이다. 그 비전은 근본적 휴머니즘(Radical Humanism)의 실현이다. “이 책에서는 구약을 근본적 휴머니즘의 관점에서 해석한다. 근본적 휴머니즘을 바탕으로 인류의 조화(oneness), 즉 인간이 자기 능력을 개발하고, 조화로운 정신세계에 도달하여 평화로운 세계를 구축할 수 있는 능력을 강조하는 구약의 포괄적 사상을 언급한다. 근본적 휴머니즘에서는 인간이 완전한 자주성을 가진 존재를 지향한다고 보는데, 이는 허구와 환상을 꿰뚫어보고 실재를 있는 그대로 파악하는 것을 의미한다.”
에리히 프롬은 구약 속 하나님을 통해 인간 해방의 실마리를 찾았다. 아담과 이브의 ‘반항’으로 시작된 구약의 드라마는 인간이 우상으로부터 해방되어 ‘완전한’ 인간으로 거듭나기 위한 투쟁의 기록이다. ‘어떤 신도 믿지 않는 신비주의(nontheistic mysticism)를 지지한다’고 밝힌 에리히 프롬에게 하나님은 실존하는 형상이 아니라, 휴머니즘에 담겨 있는 최고 가치를 시적으로 표현한 여러 단어 중 하나이다.
에리히 프롬이 타계한 지 4반세기가 지난 지금, 그가 바라던 구약의 비전은 실현되었는가? 현대인은 우상숭배로부터 탈주했는가? 그는 절대 다수가 ‘돈’이라는 우상에 빠져 허우적대는 오늘의 현대인에게 새로운 과제를 던진다. 돈과 외모, 명성이라는 우상에 집착하는 우리 세대가 에리히 프롬의 구약 해설서를 다시금 곱씹어봐야 하는 명제가 여기에 있다. 현대인은 우상숭배와의 투쟁에서 승리할 수 있을까? 모두의 바람과 달리, 결론은 어디까지나 물음표다. 그 실현은 하나님이 ‘무한대로 펼쳐놓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자유로부터의 도피」, 「사랑의 기술」의 원천은 ‘무신론적 하나님’이었다!
에리히 프롬의 혁명적 구약 읽기는 인간의 원죄설에 대한 전복적 해석으로부터 시작된다. 유대인이면서 기꺼이 유대교 신자의 길을 버린 그의 자유의지는 구약 속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거래’를 새롭게 응시한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역사는 인간이 하나님의 명을 거역하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뒤 휴머니즘의 정수인 ‘자유’와 ‘사랑’을 체득하는 과정이다.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첫 번째 불복종 행위가 인류 역사의 기원이다. 인간의 자유는 거기서 비롯했기 때문이다." 그는 인간의 “인간의 불복종 이야기를 ‘타락’으로 보는 기독교의 해석은 이야기 자체의 명백한 의미를 모호하게 만들어버렸다”고 지적한다. “구약 원문에는 ‘죄’라는 말이 언급되지도 않았다. 요컨대 인간은 하나님의 최고 권능에 도전한다. 그는 장차 하나님이 될 가망이 있으므로 하나님의 최고 권능에 도전할 수 있다.”
따라서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의 행위는 자유를 향한 첫 도전이었으며, 심지어 하나님은 인간의 타락을 기꺼이 환영하며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 아들들이 나를 이겼다, 나를 이겼어.”
결국 인간 역사의 목표는 ‘너희도 신처럼 되리라’고 예언한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는 것이다. 에덴동산에서 ‘자궁 속의 존재’로 지내던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뒤 스스로 삶을 꾸려나가야 하는 불완전한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인간은 불완전한 상태를 참을 수 없다. 그리하여 끊임없이 우상을 만들고 누군가의 명령에 따르고 싶어하며 ‘이집트의 노예상태’로 회귀하고 싶어한다.
구약은 끊임없는 우상숭배와의 투쟁을 그린 드라마이며, 인류의 역사는 결국 우상숭배의 역사이다. 나무와 돌로 만든 우상에 절을 하던 인간은 오늘에 이르러 ‘폭력’과 ‘돈’에 무한 복종한다. 그런 인간에게 자유와 사랑을 실현할 가능성은 있는가? 에리히 프롬은 구약 속에서 희망의 씨앗을 찾아낸다.
“인간이 하나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인간에게 무한한 진화 능력이 있음을 뜻한다. 어느 하시디즘 지도자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한 뒤 잘되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는 가축과 그 밖의 모든 것은 창조된 뒤 완성되었지만, 인간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모세 5경과 예언서에서 밝힌 하나님의 말을 지침 삼아 역사에서 타고난 본성을 개발할 수 있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다.
인간 진화의 본질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이 혈연과 지연에 대한 밀접한(incestuous) 유대에서 벗어나 자주와 자유로 탈출하는 것이다. 인간은 완전한 인간이 될 때 자유로워진다. 구약과 후기 유대교 전승에서 보면, 자유와 자주는 인간 발달의 목표이며, 인간 행위의 목적은 과거, 자연, 씨족, 우상의 굴레로부터 인간 스스로를 해방시키는 끊임없는 과정이다.”
신학이 아닌, 우상숭배에 관한 학문이 필요하다
에리히 프롬이 볼 때 유일신 사상은 우상의 대척점에 서 있는 ‘이름 없는 하나님’을 숭배한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인간이 우상숭배라는 어리석은 함정에서 빠져나와 기댈 수 있는 대상이 유일신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유일신 사상은 인간 실존의 분열을 해결하기 위한 새로운 해답이다. 인간은 인류 발생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이성이라는 인간의 특별한 자질을 최대한 개발함으로써 세계와 하나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하나님을 숭배하는 것은 무엇보다 우상숭배를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프롬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과 달을 구분하라고 끊임없이 제안한다. 그런데 오늘의 달(하나님)은 ‘신학’이라는 포장지 속에서 또 하나의 우상으로 전락하고 있다. 즉 신학이 이름 없는 하나님에 대한 여러 사상을 논하는 것이라면 인간은 신학을 통해 ‘하나님’이라는 또 하나의 우상을 만드는 우를 범하는 셈이다. 프롬은 오히려 신학 대신에 ‘우상숭배에 관한 학문’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신학이 발 디딜 여지는 없다 하더라도 ‘우상에 관한 학문(idology)’이 생겨날 여지와 필요성은 있다고 본다. 이 학문은 우상과 우상숭배의 본질을 밝히고, 오늘날까지 숭배되어온 여러 우상의 실체를 밝혀야 한다.”
프롬은 ‘우상에 관한 학문’은 소외된 인간이 필연적으로 일종의 우상숭배자가 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밝혀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소외된 인간은 자신의 능력을 외부 사물로 변형시킴으로써 스스로 무기력해졌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의 일면을 조금이나마 유지하면서 결국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외부 사물을 숭배할 수밖에 없다.”
우상이란 무엇인가? “우상은 인간이 마음속 깊이 열망하는 표본이다. 그것은 땅, 곧 근원으로 돌아가고 싶은 욕구이며 소유, 권력, 명예 따위에 대한 갈망이다. 우상으로 상징되는 열망은 인간의 가치체계 안에서 최고의 가치에 해당한다. 우상숭배 역사를 살펴보기만 해도 우상을 수백 개나 열거할 수 있으며, 그것들이 인간의 어떤 열망과 욕구를 상징하는지 분석할 수 있다. 지금까지 인류의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