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의 책 소개
저마다 납덩어리 하나씩은 입에 문 듯 묵묵하고 막막한 침묵 속 2014년의 6월, 그럼에도 첫 시집을 펴내는 한 젊은 시인이 있어 여기 소개하려 한다. 2007년 『현대시』를 통해 등단했으니 올해로 시력(詩歷) 7년차, 83년 충남 전의에서 태어났으니 올해로 우리 나이 서른둘이 된 청년 이현호, 그가 바로 이 페이지의 주인공이다.
총 5부로 구성하여 각 부마다 11편의 시를 그러모아 모두 55편의 시를 싣고 있는 이번 시집은 ‘라이터 좀 빌립시다’라는 묘한 뉘앙스의 제목 아래 그 막강한 혈기를 화기로 숨기는 데 일단은 성공한 듯하다. 속으로는 불을 껴안고 있으나 겉으로는 소화기처럼 차가운 온도를 자랑하는 ‘라이터’라는 존재는 시적 거리감을 설명하려 할 때 얼마나 적절한 예시가 되어주는 사물인가. 게다가 빌리겠다니. 첫 시집임을 감안할 때 이른바 숨을 내쉬는 콧구멍 속으로도 들었다 나가는 선배 시인들의 수많은 시 구절구절을 그대로 흡입하기보다 잘 기억해두었다가 내 주된 요리에 양념 정도로 여기겠다는 객기 어린 치기가 얼마나 솔직한 감정의 발로인가.
제목으로 앞서 그의 시를 추측해보려 목차를 펴본다. ‘모든 익사체는 떠오르려고 한다’ ‘하나의 바늘 끝에서 얼마나 많은 천사들이 춤추는가’ ‘새들은 적우로 간다’ ‘거꾸로 선 쉼표가 가리키는 것은’ ‘네 쪽짜리 새들의 사전’ ‘너를 기다리는 동안 새의 이마에 앉았다 간 것의 이름은’ 등등의 제목에 제법 압도당하다가 마주한 시편들에서 마음 한편이 꽤 차분해짐을 느낄 것이다. 의외로 고분고분하고 사분사분하게 말을 부리는 마부의 채찍이 그의 손에 들려 있음을 알아차렸을 까닭이다. 시인의 시는 오로지 시를 완성으로 밀고 나가기 위해 떼를 쓰거나 악을 쓰는 쇳소리의 생목이 아니라 차분하나 자조 섞인 변성기 전 소년의 수줍고 맑은 목소리를 가늠케 한다. 이를테면 “나는 어쩔 수 없이 이국의 여자 귀신을 믿게 되는 것이다”라고 고백할 정도로 잘 믿는 마음에 잘 흔들리는 눈동자랄까.
잠든 애인을 바라보는 묵도 속에는 가져본 적 없는 당신이란 말과 곰팡이 핀 천장의 야광별에 대한 미안함이 다 들어 있었다 그럴 때 운명이란 점심에 애인이 끓인 콩나물국을 같이 먹고, 남은 한 국자에 밥을 말아 한밤에 홀로 먹는 일이었다
-「붙박이창」 부분
깍지 낀 손안의 별은 지구에서 가장 환한 성냥불 그 빛가로 애인의 머리가 함박눈같이 내려앉았다 우리는 서로의 맘속에 이 별이 다녀갈 만큼 큰 굴뚝을 지어주었다 꼬마전구들을 별무리처럼 휘감은 겨울나무가 계절을 잊고 이른 꽃순을 피워올렸다
-「성탄목」 부분
그렇다 소년. 그럼에도 여전한 소년. 오늘 우리가 이현호라는 젊은 청년의 시집에서 소년을 불러낸 건 첫 시부터 마지막 시까지 예민하게 촉이 선 소년의 솜털이 눈물이 땀이 분노가 사랑이 두려움이 좌절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감추려 해도 감출 수 없는 모든 감각의 열림은 시의 열정으로부터, 그 열정의 떨림은 설렘과 부끄러움과 의지가 한데 부딪치며 내는 종소리에서 타전되는바, 이 극단적으로 뻗쳐오는 시의 근육 시의 내성이 삶은 두부처럼 순하다가도 고추장찌개 속 두부처럼 매운 혀끝의 뜨거움을 느끼게도 만든다. 어떤 시작은 알았다면 어떤 끝은 알 수가 없고 또 알 길이 없는 터라 두리번거리면서 헤매게 되는 시의 길, 시의 삶, 시의 운명. 더구나 그것이 첫 시집일 경우에 누구라도 팔아야 하는 발품의 과정이 있을 터, 이 시간의 힘겨움을 아름답게 봐주는 우리들의 눈이 있어 시라는 꼬투리 속 풋콩들은 용기를 내어 건강하게 살을 붙여나갈 수 있는 게 아닐까.
이렇듯 ‘사랑’은 자신감을 불러오게 마련이고 자만과 차이를 두는 이 혈기왕성한 자신은 밤이든 낮이든, 산 자든 죽은 자든, 온 감각을 열어 제 앞에 불러낼 수 있는 모든 이름들을 호명해 앉히는 데 주저함이 없다. 한없이 풀어지다가 끝없이 풀어버리다가 도르르 일순 감아버리기도 하는 혀의 ‘놀림’은 예컨대 이런 시가 보이고 이런 시를 써낼 줄 아는 이현호만의 순정이기도 한 것이다.
죽음이 가장 쉽다. 삶은 그다음이다. 인간의 시간을 소진하기 위해 시 쓰고 노래할 때, 슬픔은 삶보다 가까운 데서 온다. 선배와 바람이 난 애인이 결혼한 이듬해 자살하고, 외삼촌은 공사장에서 벼락같이 떨어진 벽돌에 머리가 깨져 죽고, 관상을 공부하던 친구는 군에서 제 손으로 목을 매고, 후배는 이유도 모른 채 살해당하고 불태워졌지만 (……)// 오도카니, 삶보다 가까운 데서 차오르는 슬픔에 배가 부를 때, 생이 가장 쉽다. 사(死)는 건 그다음이다.
-「현해탄」 부분
이현호의 시집 『라이터 좀 빌립시다』에서 55편의 시가 빠짐없이 투과해나가는 구멍 하나가 있다면 바로 ‘쓰다’라는 말일 것이다. 시인은 글을 쓰는 자인 동시에 몸을 쓰는 자이기도 하여 저만큼 앞서 몸을 던진 뒤 그만큼 글로 뒤좇아보기도 하고 또 반대로 저만큼 앞서 글을 던진 뒤 그만큼 몸으로 뒤좇아보기도 한다. 몸과 글, 글과 몸, 이 둘 가운데 어느 무게가 상대가 앉은 시소를 가라앉힐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서로에게 기울다 말다 하는 반복 속에 저도 모르게 스미는 각도가 있다면 아마 시라는 종류의 이름일 것이다. 시집을 다 읽고 났을 때 귀가 먹먹하면서 묘하게 슬픔이 인다면, 그 안개에게 먹힌 것 같은 답답한 심정에 갇혀버린다면, 우리는 이현호 시인이 의도한 적 없지만 의도치 않게 쳐둔 그물망에 걸려든 셈이 될 것이다. 시집을 읽다 버둥거리며 숨막혀하는 우리들이라면 그것이 바로 감동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시를 예로 보탠다.
복수를 사랑한다. 그건 복수보다 아름다운 일. 그림자는 하나의 전구 빛을 나누기 위해 스스로 흐려지면서, 하나의 꽃술에 매달린 꽃잎들처럼 분신한다. 빵조각을 나눌수록 배고픔은 깊어가지만, 굶주림에 대해 이야기 나눌 사람도 늘어난다. 퍼즐 같은 삶의 문법 안에 복수를 흩어뿌리기 할 때, 무의미가 의미를 가지치기할 때, 투명해지는 어깨들. 멜빵처럼 그 어깨에 두 팔 걸치고, 흘러내리지 않는 그림자가 될 때, 가지와 가지가 어긋매껴 만드는 그늘 아래 걸을 때,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하나둘 떨어져나간 꽃잎들이 퍼즐 조각으로 완성할 아름다운 복수들. 복수가 복수를 사랑해서 복수가 복수를 낳는, 그건 나무 더하기 나무는 숲보다 아름다운 일.
-「아름다운 복수들」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