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제공 책 소개

“누군가의 이마를 씻어주는 별 하나” 도종환 등단 30주년 기념 시선집 도종환 시인의 등단 30주년 기념 시선집 『밀물의 시간』이 실천문학사에서 출간되었다. 한국 시를 웬만큼 읽어온 이들이라면, 누구에게나 친숙한 이름인 도종환. 한국인의 서정과 공동체의 운명을 아우르는 시인 도종환이 지난 30년 동안 펴낸 10권의 시집에서 후배 문인인 공광규, 김근, 김성규, 유성호가 99편의 시를 뽑고 엮었다. ‘사랑’과 ‘연민’ 그리고 ‘반성’이라는 이름의 시인 우리들 마음의 영원한 거처, 시인 도종환 1980년대 이후 한국 시를 웬만큼 읽어온 이들에게 도종환은, 참으로 친숙한 이름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그 친숙한 이름 아래 쌓인 고통과 번뇌의 시간들은 고스란히 시인 자신의 몫이었다. 남겨진 두 아이의 머리맡에 앉아 가슴 한 켠 묻어둔 아내에게 말을 거는 사내이자, 감옥 같은 교실에 갇힌 고개 숙인 제자들과 동료 교사를 일으키며 참교육을 외치다 해직당한 교사였으며, 엄혹한 세월, 억압에 항거하며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가난한 문인들 곁에서 묵묵히 자리를 지켜온 일꾼이자, 의심과 손가락질로 자신이 쓴 시마저 수난당한 여전히 그 이름 껄끄러운 정치인이라는 이름 석 자를 부채처럼 지고 가는 이. 사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시에서 확인한 것이지만, 도종환을 여느 시인과 뚜렷이 구별해주는 가장 결정적인 요소는, 바로 이러한 사랑과 연민 그리고 스스로를 향한 반성적 의지가 아니었던가? 원망과 분노를 가득 품은 모순투성이의 나날들을 수십만 번 견디고 깎아내며 만들어낸 반짝이는 ‘시’는 도종환에게 ‘사랑’과 ‘연민’ 그리고 자신의 삶에 대한 끊임없는 ‘반성’의 총체였다. 이제 도종환의 시편은 한 시대의 저항적 문맥을 넘어 가장 보편적인 생의 이법을 잔잔하고도 투명하게 들려주는 애송 시편으로 승화했고, 각급 학교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세대를 뛰어넘어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로서 자리매김했다. 이렇게 ‘시인’ 도종환이 우리와 함께한 세월이 어느덧 30년을 맞이했다. 이에 후배 문인 공광규, 김근, 김성규, 유성호가 모여 그의 첫 시집인 『고두미 마을에서』(1985)부터 최근작인 『세시에서 다섯시 사이』(2011)까지 총 10권의 시집에서 99편의 시를 뽑아 시선집으로 엮었다. 이 책에서 독자들은 도종환이 마주해온 밀물의 시간 속에서 그의 시가 별빛의 반짝임처럼 끝내 명멸하지 않고 “이마를 씻어주는 별 하나”가 될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시 쓰기 30년, ‘고두미 마을’에서 ‘별 하나’에 이르는 단호하고도 정결한 ‘길’ 도종환의 초기 시세계를 상징하는 공간은, 1985년 첫 시집 제목이기도 한 ‘고두미 마을에서’다. 즉, 이 시집에서는 단재 신채호 선생을 통해 외세의 억압에 찢긴 상처와 그 치유를 상징하는 ‘고두미 마을’을 시작으로, “전사통보 받아 든 언청이 정례 누나”(「분꽃」), 그리고 “흑인 혼혈아 여가수”(「흑인 혼혈아 여가수에게」)나 “조센 데이신타이”(「조센 데이신타이[朝鮮挺身隊]」) 같은 “갈라진 땅 약소민족”(「첫돌」)의 아들딸들이 줄곧 시적 캐릭터로 등장한다. 도종환 초기 시편이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 혹은 역사 속에서 무너져갔던 이들을 향하고 있음을 뚜렷이 드러내는 사례들이다. 그러다 도종환의 두 번째 시집이자 1980년대를 대표하는 베스트셀러 『접시꽃 당신』(1986)에서 “저무는 하늘 낮달처럼 내게 와 머물다 소리 없이 돌아가는/사랑하는 사람”(「오월 편지」)을 애타게 불러본다. “어둠이 다하고 새로운 새벽이 오는 순간까지/나는 당신의 손을 잡고 당신 곁에 영원히”(「접시꽃 당신」) 있을 것이라는 항구적 동반자로서의 다짐이, 도종환을 한국인에게 평생 ‘사랑’의 시인이자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서정 시인으로 기억하게 해주었다고 할 수 있다. 이후 도종환은 자신이 속한 학교 현장의 여러 모순과 싸우는 교육 운동에 헌신하게 되는데, 이러한 이별과 투신의 양면성이 담긴 시집이 바로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1988)이다. 나는 또 너희들 곁을 떠나는구나 기약할 수 없는 약속만을 남기고 강물이 가다가 만나고 헤어지는 산처럼 무더기 무더기 멈추어 선 너희들을 두고 나는 또 너희들 곁을 떠나는구나 (중략) 이 짧은 세상에 영원히 같이 사는 사람은 없지만 너희들이 자라고 내가 늙어서라도 고맙게 자란 너희들의 손을 기쁨으로 잡으며 이 땅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 함께 일하는 사람으로 하나 되어 꼭 다시 만나자. _「지금 비록 너희 곁을 떠나지만」 부분(『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1988)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운동으로 해직당한 그를 제자들이 붙드는 순간, 시인은 “이 짧은 세상에”서 다시 만나 “이 땅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 함께 일하는 사람”이 되자는 다짐을 남긴다. 이와 같이 도종환의 초기 시편들은 1980년대 민중적 서정시의 자양을 충실하게 섭렵하면서도, 그 특유의 진정성 어린 ‘사랑’의 시학을 완미하게 구현하고 있다. 이제 도종환은, ‘역사’와 ‘사랑’과 ‘교육’이라는 초기시의 트라이앵글을 묶어서, 좀 더 근원적이고 심미적인 이미지를 통한 삶의 이법과 원리를 노래해간다. 『당신은 누구십니까』(1993)에서는 ‘담쟁이’나 ‘별’의 상징을 통해 현실의 억압을 넘어서는 근원적인 꿈의 형상을,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같은 절창이 실려 있는 여섯 번째 시집 『사람의 마을에 꽃이 진다』(1994)에서는 “아름다운 세상 아, 형벌 같은 아름다운 세상”(「단식」)에 대한 굳은 신뢰를 아름답게 펼쳐낸다. 그러다가 도종환은, 지금도 그의 성정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는, ‘부드러운 직선’이라는 상징적이고 역설적인 화두를 찾아내기에 이른다. 높은 구름이 지나가는 쪽빛 하늘 아래 사뿐히 추켜세운 추녀를 보라 한다 뒷산의 너그러운 능선과 조화를 이룬 지붕의 부드러운 선을 보라 한다 어깨를 두드리며 그는 내게 이제 다시 부드러워지라 한다 (중략) 사철 푸른 홍송숲에 묻혀 모나지 않게 담백하게 뒷산 품에 들어 있는 절집이 굽은 나무로 지어져 있지 않음을 본다 한 생애를 곧게 산 나무의 직선이 모여 가장 부드러운 자태로 앉아 있는 _「부드러운 직선」 부분(『부드러운 직선』, 1998) 한없는 부드러움과 “휘어지지 않는 정신”을 내포한 ‘부드러운 직선’의 정신이, 도종환으로 하여금 “더욱 말없이 더욱 진지하게 낮은 곳을 찾아”(「민들레 뿌리」) 나서게 하고, “오늘 또 가지 않을 수 없던 길”(「가지 않을 수 없던 길」)을 끝내 걷게 했던 원질이었을 것이다. 이처럼 도종환 중기 시편은, 벽을 함께 넘어서는 담쟁이, 흔들리면서도 흔들리지 않는 사랑, 부드러운 직선 등을 사유함으로써, 초기 시편이 보여주었던 구체적 현실과 역사를 넘어, 근원적이고 심미적인 형상을 풍요롭게 일구어 낸다. 역사와 현실에서 발원하여, 태도와 신념의 세계로 이월했던 도종환 시편은 후기에 이르러 삶에 대한 가장 근본주의적인 성찰로 접어들게 된다. 하루 종일 아무 말도 안 했다 산도 똑같이 아무 말을 안 했다 말없이 산 옆에 있는 게 싫지 않았다 산도 내가 있는 걸 싫어하지 않았다 하늘은 하루 종일 티 없이 맑았다 가끔 구름이 떠오고 새 날아왔지만 잠시 머물다 곧 지나가버렸다 내게 온 꽃잎과 바람도 잠시 머물다 갔다 골짜기 물에 호미를 씻는 동안 손에 묻은 흙은 저절로 씻겨내려갔다 앞산 뒷산에 큰 도움은 못 되었지만 하늘 아래 허물없이 하루가 갔다 _「산경」 전문(『해인으로 가는 길』, 2006) 그의 시편들에서 자연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