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배수아의 소설은 가난과 광기의 세계로 추락해 그 파멸의 힘으로
영원한 꿈이 된다. 잃어버린, 사랑했던 것들이 그 꿈 속에서 다시 떠오른다.
_강지희(문학평론가)
“이 비밀스러운 결속이 나는 기쁘다.”
―한국문학의 가장 낯선 존재, 이상하고 아름다운 세계, 배수아 신작 소설
한국문학에서 ‘배수아’라는 이름은 이국(異國)의 뉘앙스를 품고 있다. 이전 세대나 동시대 한국문학의 영향 혹은 수혜를 받은 흔적이 보이지 않는 그의 작품들, 서사보다는 이미지, 분위기, 그리고 목소리에 가까운 편편은 종종 ‘이것을 소설이라 부를 수 있는가?’라는 의문을 품게도 하였다. 그러나 이 낯선 존재가 펼쳐 보이는 이상하고도 아름다운 세계는, 지난 24년, 열세 권의 장편과 여덟 권의 소설집을 통해 꾸준히 마니아층을 형성해왔다. 그 세계에 번역가라는 새로운 푯말 하나를 더 꽂으며 배수아는 자신의 이름만큼 이국적인 새 이름들을 한국의 독자들에게 소개하고 있다. 페르난두 페소아, 로베르트 발저, W. G. 제발트, 막스 피카르트, 사데크 헤디야트, 토마스 베른하르트… “소설가보다는 번역가 아이덴티티로서 『악스트』에 참여하게 된 것 같다”는 그의 말에 따르면, 격월간지 『악스트』의 편집위원으로서 해외문학을 담당하게 된 경위 역시 비슷한 맥락임을 알 수 있다.
번역가 배수아를 통해 해외문학의 지평이 넓어진 것이 반가운 만큼 작가 배수아의 소설을 기다리는 시간도 길어졌다. 2010년 『올빼미의 없음』(창비) 이후 7년 만의 소설집 『뱀과 물』을 펴낸다. 2016년 경기문화재단 지원사업의 결과로 출간된 소설집 『밀레나, 밀레나, 황홀한』(테오리아)이 있으나, 단 두 편의 단편만으로는 긴 기다림이 해소되기엔 아쉬움이 컸다.
“기나긴 어린 시절 내가 가장 좋아한 것은 나를 상상하는 놀이였다.”
―어린 시절이라는 악몽에 대하여
아홉번째 소설집에서 배수아는 어린 시절(소녀 시절)로 독자를 이끈다. 작품 속 어린 시절은 ‘비밀스러운 결속’(38쪽)과 환상적인 시공간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여리고 순수한 것과는 동떨어진 일들. 부모의 부재, 그들을 찾아 떠나는 길, 무거운 가방, 눈이 내리거나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날들. 일곱 살이 되면 더는 남자아이 행세를 하지 않아도 되지만, 소중한 존재를 지킬 힘이 여전히 나에게는 없다. 그리고 죽음에 눈을 뜬다. 그러므로 무구한 시절을 거쳐 성인이 된 뒤 혼탁해지는 것이 삶이 아니라는 것. 아련한 마음으로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는 것은 망상에 다름없다는 것. 그 망상 속 어린아이는 ‘누런 개처럼 돌아다니는 유령’일 뿐이다.
“어린 시절은 망상이에요. 자신이 어린 시절을 가졌다는 믿음은 망상이에요. 우리는 이미 성인인 채로 언제나 바로 조금 전에 태어나 지금 이 순간을 살 뿐이니까요. 그러므로 모든 기억은 망상이에요. 모든 미래도 망상이 될 거예요. 어린아이들은 모두 우리의 망상 속에서 누런 개처럼 돌아다니는 유령입니다.”
_94쪽, 「1979」에서
그러므로 작가가 말하는 어린 시절이란 시간을 거슬러올라가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 ‘어린 시절-성장-성년’의 공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린 내가 자라서 지금의 내가 되는 것이 아니다. 어린 나와 지금의 나는 같은 존재가 아니며, 그사이에 순차적 단계는 없다. 작품집 첫머리에 자리한 「눈 속에서 불타기 전 아니는 어떤 꿈을 꾸었나」(이하 「눈 속에서」)의 ‘나’가 머물던 유원지. 그 한가운데 자리한 것은 거대한 대관람차이다. “지구 자체, 혹은 그 이상으로 커다란 어떤 것”이자 “올라타는 사람도 내리는 사람도 없는 그 대관람차”가 “사실은 대관람차가 아니라, 시간의 실체를 실어나르는 바늘 없는 시계”라는 것은 그러므로 중요한 지표이다. 배수아의 시계에는 바늘이 없으며, 독자는 1분 1초라는 질서의 세계가 아닌 ‘시간의 실체’를 비틀어 펼친 몽상적 세계의 완전히 새로운 문법으로 작품에 미끄러져 들어갈 수밖에 없다.
현재의 나는 정말 존재하는 실체인가? 어린 시절 나의 상상 속 인물은 아닌가? 미래가 이미 도래하지 않은 것이 확실한가? 삶에서 겪은 모든 일들이 정말 일어났던 일이라 확신할 수 있는가? “만일 그것이 정말로 일어났다면, 모든 기억이 이토록 생생할 리가 없다”(188쪽)는 믿음은 어떤가.
우리는 배고픔도, 갈증도, 더위도 잊었다. 바다는 모든 것의 경계 너머에 있는 먼 세상으로 우리를 데리고 갔다. 그곳에서 파도의 흰 거품이 우리의 어린 시절을 처형했다.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우리는 어느덧 늙고, 네이팜탄에 불타고, 유방암을 앓고, 초록 개구리에게 먹혔으며, 이 모두를 원한이나 공포 없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그 누구도 행복하거나 불행하지 않았다. 머리 위에서 이글거리던 태양이 어느덧 살짝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_168쪽, 「도둑 자매」에서
또하나 흥미로운 지점은 편편에 ‘쌍’으로 등장하는 소녀들이다. 연작처럼 읽히는 「눈 속에서」와 「노인 울라에서」의 ‘나’와 ‘눈먼 소녀’. 「눈 속에서」는 유원지에서 아버지가 사라졌음을 발견한 ‘내’가 스키타이족의 무덤으로 떠나기까지의 이야기이고, 「노인 울라에서」는 ‘내’가 거인 아버지를 찾아 가장 북쪽에 있는 역인 노인 울라에 도착하면서부터 벌어지는 이야기다. 「눈 속에서」의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읽어준 책은 빨치산 소녀 ‘눈(snow) 아이’가 등장하는 『눈 아이』이며, ‘나’는 이름을 묻는 경찰관에게 자신의 이름이 ‘눈 아이’라 대답한다. 미아 센터에 앉아 아버지를 기다리는 ‘나=눈 아이’, 뒷모습이 얼핏 아버지와 닮은 남자가 리본을 맨 ‘눈먼 소녀’의 손을 잡고 가는 것을 목격한다. 리본을 맨 눈먼 소녀는 「노인 울라에서」에 또다시 등장하며 이 소녀의 이름이 ‘눈 아이’이다. 눈먼 소녀는 『눈 아이』 속 빨치산 소녀처럼 목이 꺾인 채 교수형을 당하고, 소녀의 리본을 내가 매달며 나와 눈먼 소녀는 비밀스러운 결속을 이어간다.
「얼이에 대해서」의 ‘나’와 ‘얼이’도 한 쌍이다. 나의 여동생이 태어난 때 얼이는 유괴당해 죽는다. 나는 하나의 탄생에는 하나의 죽음이 필요함을 깨닫고, 자신이 원한 건 아니었지만 자신의 여동생이 태어나 얼이는 죽었다는 죄책감에 시달린다. 어른이 된 나는 어린 시절 모습에서 확대된 얼이를 한 번 만난다. 나는 얼이를 알아보지만 얼이는 나를 나로 알아보지 못한다. 다만 “미친년이 간다!”라고 매번 놀림당한 얼이 어머니와 똑 닮은 나를, 마을의 미친 여자인 나를 오래오래 바라볼 뿐이다.
「1979」의 키 큰 소녀와 작은 리우진도 있다. 반에서 가장 성숙한 ‘키 큰 소녀’에게 미묘한 성적 끌림을 느끼며 집착하는 남자 교사가 우연히 목격한 장면은, 이 소설집 곳곳에서 마주할 수 있는 아찔하고 몽환적인 장면 중 하나이다.
아이들은 낡은 담벼락 앞에서 멈추어 서더니 각자의 손가락을 담벼락의 구멍 속으로 집어넣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것을 지켜보던 교사는 거칠고 딱딱한 흙과 광물, 바스러진 뱀의 알과 곰팡이, 죽은 애벌레의 감촉을 손가락에 느꼈다. 마침내 구멍 깊숙한 곳에 숨어든 한낮의 꿈과 같이 미끈미끈한 온기에 손끝이 닿자, 교사는 자신도 모르게 온몸을 움찔거렸다. 잠시 후 손가락을 구멍에서 꺼낸 리우진이 이번에는 자신의 입속에 손가락을 넣어 붉은 사탕을 꺼냈다. 그러더니 그것을 키 큰 소녀의 입속에 넣었다. 키 큰 소녀는 입을 벌려 그것을 받아먹으며, 손끝으로는 입가에 묻은 침과 설탕물을 닦아냈다. (…) 교사의 입속으로, 마치 어린 시절과도 같은 혼몽하고 은은한 단맛이 퍼졌다. 교사는 손끝으로 입가에 묻은 침과 설탕물을 닦아냈다.
_113~114쪽, 「1979」에서
“나이 많은 자매는 시간을 앞서 비추어진 거무스름한 거울이다”라는 문장이 인상적인 「도둑 자매」에는 우연히 만나 언니와 동생이 된 자매가 등장한다. 소설집 도처에서 만나게 되는 손을 잡고 걷는 소
샌드
3.5
소설집이지만 하나의 작품이라고 생각해도 맞다고 생각이 들 정도로 관통하는 하나의 정서, 감성, 문체 등이 강렬하게 느껴집니다. 다 읽고 나면 뭘 읽었는지를 떠올리기보단 다시 꾸고 싶지 않은 악몽을 꿨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데, 상상하기 끔찍할 정도로까지 나가면서 인상적인 그림을 만듭니다. 난해하고 어려운 책이기도 한데, 사실 너무 어두운 곳으로만 파고 드는 게 좀 과하고 부담스럽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 책이였습니다. 아무래도 소설집이라 그렇게 판단하는 게 어려울 순 있겠지만 템포가 너무 빨랐고, 빠져드는 책이 아니라 계속해서 휘감고 찌르는 듯한 책이라 지나침에서 오는 거부감이 있습니다. 모든 책에서 이야기성이 중요한 건 아니지만, 이 책은 이미지에 대한 집착의 정도가 좀 심하다는 게 저는 단점으로 걸렸습니다. 그래도 이 책을 좋아한다고 얘기할 수 있는 건, 어두운 지점을 묘사하는 데 오는 기괴함이 강렬했고, 책을 들면 맨 끝까지 단숨에 읽을 정도로 빨려들게 하는 흡인력이 있어서, 누구에게나는 절대 못하겠지만 몇몇 사람에겐 충분히 추천할 수 있을 정도인 책이기 때문입니다.
Carol
4.0
배수아라는 장르, 여전히 매혹적이다. 특히 어린 아이의 눈으로 본 이번 세계 역시 뼈가 아플 정도로 염세적이어서 나는 더욱 좋은 것이야.. 성장통인지 환상통인지 모를 이야기들. "나는 기다리고 있었다. 얼이가 나에게 말을 걸면, 설명해주리라. 나는 아프다고. 오래오래 아팠다고. 그래서 집으로 돌아와 있는데, 옳은 결정이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고."
상맹
4.5
물질화되지 않은 유령들, 타자의 목소리들, 불안함과 강박 그리고 자기파괴와 희열. 프로이트식으로 주체가 현실에서 겪은 강렬한 사건들이 흔적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감정의 열도를 소거한 뒤 남는 잔상들의 원형을 찾아가는 바슐라르적 방식. 그렇기에 무의식의 세계가 개인이 아닌 인류 보편으로 향해가는 것. 수많은 분열이 작가 혹은 개인으로 쉽사리 향하지 않는 것이 신기하다. 그렇다고 하기엔 분열되어 보여지는 타자의 모습들이 너무나도 섬세하고 다양하기 때문일까. 둥둥 떠다니는 여러개의 자아가 겹칠 듯 안 겹칠듯, 타자의 목소리들로 합창하는 것이 가장 큰 매력이다. 심리묘사가 아닌 서사와 이미지를 중심으로 해서 그런가. 언어화되지 않은 감각들.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을지도 모르는 우리의 망령들. 이해와 사유 이전에 있는 어떤 감각적인 것을 통해 세계의 타자와 마주하는 일. 그 세계까지 감각하고 하나의 자아로 환원하지 않고 열어 놓으려는 작가님. 오랜만에 한국 소설에서 오래오랫동안 사유를 품어 은밀하고 끈적한 진주를 발견한 것 같다.
이대해
1.5
반두를 찾아가는 통과의례의 여정 한국 소설의 지평을 조금 늘렸다는 의의가 있을 수 있으나 독자와의 접점을 찾지못한 한계가 있다. 이소설을 읽는 독자는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가 대부분이다. 있다면 뭔가 있어보이는 그럴듯 함과 책 뒤의 휘황찬란한(?) 해설로 압도당하고 만다. 하지만 곰곰히 뜯어보면 이또한 벌거벗은 임금님이 아닌지 하는 의구심이 생긴다. 멋지고, 새로운 패션이라고 떠들어대지만 기실은 임금님은 벌거벗었다. 책 뒤의 평자 강수아는 배수아의 소설을 두고 프로이트적이 아닌, 원형적 심상을 쫒는 바슐라르적이라고 말한다. 물론 현실의 상처는 마음속에 상처를 남기고 그것은 꿈이라던가 다른 어떤 이미지를 통해 치유하고자하는 욕망을 가진다. 배수아의 소설은 그점에서 카프카의 소설들과 닮아 있다, 배수아의 소설 중한편은 자신이 번역한 카프카의 <꿈>의 해설 대신 쓴 글이기도 하다. 카프카의 꿈들은 그의 알레고리적인 소설들 예를 들면 <법앞에서> 처럼 현실의 억압과 강제를 뚫고 나오려는 몸부림의 결과물이다. 나는 모든 심리적 기제들이 자신의 억눌린 감정들을 해소하는 방편으로 알고 있다. 그것은 프로이트나 바술라르라고 별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이것을 굳이 프로이트, 이것은 바슐라르적이라고 나눌 필요가 있을까. 하여간 배수아의 소설들은 한가지 공통점은 카프카의 수법처럼 알레고리적이고, 꿈과 같다고 할수있다. 배수아 소설은 일종의 꿈들이고 심리적 방어기제의 일종이다. 꿈들이기에 배수아 소설의 서사는 종횡무진이고, 나쁜말로하면 미친년 널 뛰듯한다. 그래소 배수아 소설 속에는 백일몽이 자주 등장하고, 공간또한 현실적이지 않다. 도둑자매 이외의 공간은 모두 꿈속처럼 어렴풋하다. 인물들 또한 구체적이지 않고 흐릿하거나 과장되어 있다. 느릅나무 모양의 수염을 지닌 아버지, 등등. 인물에서 거론되는 점은 동일인 듯한 사람들이 분열되어 있다 도둑자매도 같은 인물인듯보인다. 뱀과 물에서는 동일인이 과거의 자신이 미래의 자신을 죽이기도 한다. 알레고리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자. 알레고리는 풍유로 알려지기도 한다. 이솝우화의 이야기들이 대표적인 알레고리로 알고 있다. 알레고리란 일종의 추상화로 뼈대만 남기고 모든것을 지워 다른 것으로 치환한다. 카프카의 언어가 그토록 단순한것은 그런 알레고리로 작용키위한 사전작업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배수아의 언어는 그 알레고리를 차용하는듯 하면서도 이것저것의 잡다한 요소들을 집어넣고 언어마저도 화려하다. 여기서 그 알레고리로서의 작업도 문제를 표출한다. 남는 과제는 그 꿈속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심상들을 분석해 내는 일이다. 자매 혹은 동일인의 분열, 소설곳곳에서 자매가 등장하고, 동일인이, 예를들면 김길라는 현재의 길라, 늙은 길라등으로 분열한다. 눈아이라는 이름도 한명이었다가 다시 두명으로 분화한다 과거는 망상이라는 전언, 배수아는 과거 특히 어린시절은 망상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시각은 현재만 있는 동물과 비교 되어 인간은 왜 기억이라는 긴 꼬리를 달고 사는가 하는 뇌과학이라던가, 종교적, 특히 불가의 자아 허구론에서 많이 거론되어온 부분이기도 하다. 별로 새로울 것도 없다. 배수아 소설의 많은 끝은 죽음으로 연결되어 있다. 하지만 얼이에 대하여에 나와 있듯, 얼이의 죽음은 동생의 탄생으로 연결된다. 즉 죽음이 환생으로 연결된다. 마지막으로 반두로 상징되는 공간이다. 반두는 여왕이 지배하는 땅이고, 빼앗긴 땅이고, 흉노의 땅이고, 유목민의 땅이고, 여기 소설 제목인 노인 울라(몽고에 실제하는 공간이다)의 땅이고, 스키타이의 무덤이 있는 땅이다. 소설 곳곳에서는 이 반두가 소환된다. 소설 속의 화자는 노인 울라에서 아버지를 찾는다고하고, 스키타이 무덤을 찾아간다고 한다. 이 반두는 뭘까. 화자는 끊임없이 이 반두를 향해가고 반두에 되돌아가서 왕이 되어야 한다고 한다 나는 이 반두란 작가가 인식하는 세계 전체를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반두란 곰과 범이 사람이 되기 위해 견뎌내야하는 공간으로 생각한다,여기서의 반두란 기실 세상과 다르지 않다. 그곳은 암으로 죽음직전의 어머니가 누워있는(도둑자매)의 공간과도 같다. 참담한 세계인식 그 끝에서 작가의 말이 환기된다. 어린시절은 일종의 망상과 같다. 그 반두에서의 탈출, 혹은 반두의 회복이 항상 이 작가의 화두이다. 그것은 무엇을 통해가능할까, 그 끝에 죽음이 놓여있다,그것이 어머니의 죽음(도둑자매)이고, 나의 죽음이고, 얼이의 죽음(얼이에 대하여)이다. 그러나 그 죽음 끝에 작가는 환생을 노래한다. 얼이는 죽은 후 여동생으로 환생한다고 믿는다. 나는 죽어 별이되어, 별똥별로 지상에 떨어져 불가사리로 환생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 죽음끝에 나는 비로소 일곱살이 되어 더이상 남자인척할 필요가 없다,이제는 머리를기르고 한명의 여자로 탄생하게 된다, 반두에서 출발하여 비로소 한명의 여인으로 탄생하기까지의 과정, 즉 통과의례의 여정이라 할수 있다. 소설의 권말 평론은 배수아의 소설을 샤먼의 노래라고 칭하는데, 나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나로서는 이 작가가 좀더 현실에 발을 붙여 좀더 현실적인 지옥의 공간인 <반두>를 그려내길 소망한다.
134340
4.5
삶을 환영에 가깝게, 죽음을 현실에 가깝게 표현한다. 하지만 그 경계가 무척 희미하다. 아이들은 시선은 동화적임과 동시에 실제와 가깝고, 산만하지만 본질을 꿰뚫는다. 하지만 그 마저도 희미하다.
푸코
3.0
여리고 순수한 것과는 동떨어진 일들을 벌이며 고정된 시공간을 끊임없이 탈주하는 꿈속의 꿈속의 꿈 같은 작품. 2021년 3월17일 79.
이제
2.5
내가 감히 읽을 수 있는 것은 문장이 전부였다. 몇몇 이미지는 불타듯이 강렬했지만 끝내 어딘가에 가닿지 못하고 검게 바스러졌다. 결국 남겨진 것은 정직한 피곤함이었다.
김수한무거북이와두루미삼천갑자동방삭
3.5
:염세적인 사람은 일생에 걸친 일기를 쓴다. 그가 어린시절에 대해서 쓰고 있는 동안은 어린 시절을 잊는다. 갖지 않는다. 사라진다. :어린 시절과도 같은 혼몽하고 은은한 단맛 :눈을 감으면 뜨거운 기름과 설탕 냄새가 코끝에서 아른거리다가 눈을 뜨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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