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고] 위기브 고향사랑기부제 보드배너](https://an2-img.amz.wtchn.net/image/v2/RxnUqIIUbhVRwcPaJ4NB2Q.jpg?jwt=ZXlKaGJHY2lPaUpJVXpJMU5pSjkuZXlKdmNIUnpJanBiSW1KbklsMHNJbkFpT2lJdmRqSXZjM1J2Y21VdmNISnZiVzkwYVc5dUx6UTVPVEUzT1RrME5URXhOREl4TVNKOS40RzQyRFphdS03anZOWWY5U1FBVWZFWmpzaWdBQmdOSnZvRG9VSHc3Uk04)
![[광고] 위기브 고향사랑기부제 보드배너](https://an2-img.amz.wtchn.net/image/v2/i69HSjdDu0FbqFRTyouubA.jpg?jwt=ZXlKaGJHY2lPaUpJVXpJMU5pSjkuZXlKdmNIUnpJanBiSW1KbklsMHNJbkFpT2lJdmRqSXZjM1J2Y21VdmNISnZiVzkwYVc5dUx6RXhOekExTURBNU9UVTRORGMwTXpNM0luMC5yN1dOc1RvM3BEY0I5ZTRuUXEtZWQ1N1FyalQ0RzRfSm1hTWhLbi1wRmg4)
경제학자들은 결코 말하지 않는 기업의 소유와 경영에 관한 진실. 자본주의 경제학은 물론이고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도 정면으로 묻지 못했던 자본주의 내부로부터 자본주의의 극복의 길 찾기를 시작하는 것, 이 책의 의미는 한마디로 바로 여기에 있다 할 것이다. 이 책은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라는 질문에서 시작된다. 오늘의 자본주의를 금융자본주의라 하든 어떻게 이름 붙이든 그것을 작동시키는 지배원리는 주식회사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자본의 소유권을 당연시하고 전황을 방치하는 한 민주주의는 껍데기로 남겨질 수밖에 없다. 이런 의미에서 이 책은 민주주의에 대한 본질적인 물음을 제시하고 ‘다른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책이기도 하다. 민주주의는 정치와 경제 영역으로 따로 나누어서는 안 되며 삶의 총체성이라는 측면에서 하나로 사고될 수 있을 때 죽은 민주주의는 다시 그 실체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기업의 경영자를 왜 노동자가 직접 선출하면 안 되는가’라는 물음으로 시작하는 이 책은 인간의 자유가 자본에 영구히 종속되는 모순을 극복하는 ‘다른 민주주의’의 길로 우리를 안내한다. 이 책을 다음과 같은 지은이 말로 요약할 수 있다. “기업을 참된 의미의 생산 공동체로 만들기 위해 우리에게 남은 과제는 노동자들에게 경영권을 돌려주는 일이다. 이를 위해 많은 일을 할 필요는 없다. 누구에게 부당하게 피해를 줄 필요도 없다. 필요한 것은 하나의 법률조항, 바로 이것이다! 주식회사의 이사는 종업원 총회에서 선임한다!”
저자/역자
목차
머리말
1. 바보같은 물음
-사장을 노동자가 뽑으면 안 되는가?
물음의 시작
기업이 된 국가
자유로운 시민, 예속된 노동자
국가보다 더 커져버린 기업
만남이 성장해 온 역사
기업을 폴리스(polis)로
노동자에 의한 잉여가치의 관리
세 가지 변화
시장과 자유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사이에서
2. 자유와 소유 그리고 권력
-근본 개념들의 새로운 규정
다른 사람들의 의견
자유와 소유
사람은 소유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권력은 소유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경영권은 소유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
3. 주식회사의 소유권과 경영권
-주식회사의 네 가지 고유성에 대하여
주식회사의 주인은 누구인가
주식회사의 법인격
보론: 법인 본질론에 대하여
주주의 유한책임
주식양도 자유의 원칙
소유와 경영의 분리
4. 주식회사의 다양한 변이들
-나라별 주식회사의 지배구조
독일의 주식회사 지배구조
미국의 주식회사 지배구조
한국의 재벌 기업 지배구조
일본의 재벌해체
다음으로 건너감
5. 주주에겐 배당금을 노동자에겐 경영권을
-노동자 경영권의 근거에 대한 철학적 성찰
실정법의 혼란과 주주 경영권의 불가능성
기업과 기업경영
칸트와 유기체의 개념
기업 조직과 서로주체성의 이념
주주와 노동자의 만남
실천을 위한 순서
6. 새로운 시작을 위한 맺음말
상상력과 의지를 위한 간단한 준칙
출판사 제공 책 소개
책 소개
경제학자들은 결코 말하지 않는 기업의 소유와 경영에 관한 진실!
다시 선거를 앞두고 너도나도, 혹은 이 당도 저 당도 내세우는 ‘재벌개혁’이 과연 노동자로 살아가야 하는 우리들을 기업의 노예상태에서 해방시킬 수 있을까? 혹은 재벌과의 대타협을 주장하는 ‘스웨덴식 생산적 복지국가’가 모순으로 가득 찬 한국자본주의의 해답이 될 수 있을까?
노벨 경제학상에 빛나는 밀턴 프리드만이 “기업은 기업을 소유한 주주들의 도구일 뿐이다”라고 말하거나,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의 고명한 석좌교수인 마이클 젠슨과 도날드 츄가 “경영자들의 목적은 그 기업을 소유한 주주들의 목적과 자주 충돌한다”고 말할 때, 그들은 모두 주주들이 기업을 소유하는 것 마치 자명하고 당연한 일이라는 듯 전제하고 있다. 이들이 설파하는 주주자본주의의 교리는 미국이나 이를 추종하는 한국사회에서 오랜 시간 종교와도 같은 위력을 발휘해온 결과 대부분의 사람들은 누가 주식회사의 주인이 누구냐고 물으면 마치 당연한 듯이 주주들이 주인 아니냐고 반문하게 된다.
영·미권에서 학위를 받은 한국의 경제학자들 역시 이 주주자본주의 체제를 불변의 현상으로 간주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 모른다. 이들은 다만 체제 내의 경제운용에만 관심을 가질 뿐, 그 체제가 만들어내는 모순과 파행을 극복해야 할 필요성도 가능성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니 이들이 국가의 경제정책을 결정하고 주도해온 덕에 이 나라는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국가가 아니라, 기업을 위해 존재하며, 기업에 의해 통제되고 조종되며, 기업의 이윤추구의 수단이 되어버린 기업지배국가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쪽’의 사정은 얼마나 다른 것일까? 그간 시민단체 등에서 주로 활약해온 ‘비판적’ 경제학자들의 경우에도 기업의 소유와 경영이라는 문제에 있어 사정은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 경제적 정의의 관점에서 이들이 소액주주운동 등을 통해 재벌기업의 탈법과 비리를 고발하고 이를 시정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온 점은 높이 평가한다 하더라도 한국식 주주자본주의가 지닌 모순의 핵심인 재벌의 기업경영권을 근원적으로 문제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한계를 지니는 것이었다. 기이하게도 이들은 이 문제 앞에서는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입을 싹 다물어 왔다.
‘자본주의의 극복’을 이야기해온 진보진영의 사정은 또 어떨까? 이들은 마르크스-엥겔스의 가르침을 ‘생산수단의 국유화’로 상상력을 제한시킨 채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를 괴로워할 뿐 자본주의 극복의 ‘다른 길’에 대해서는 자신들의 목소리로 이야기한 바가 따로 없다. 그래서 자본주의의 전 지구적 위기가 심화되는 현실을 모두 신자유주의의 원죄로 돌릴 뿐 정작 자본주의 ‘내부’로부터 자본주의를 극복할 방안 같은 것은 제시할 줄 모른다. 그저 자본주의 기업(=주식회사)은 폐지되어야할 ‘악’에 불과한 것이므로 그것의 소유와 경영에 관한 문제는 무시해도 좋을 부차적인 문제로 간주해도 되는 것일까?
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보지 못하는 것일까? 전면적인 위기를 맞이한 오늘의 자본주의는 이미 그 극복의 단초가 그 ‘내부’로부터 준비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기업의 경영권을 주식을 가진 주주들이나 단지 몇 퍼센트의 지분밖에 갖지 못한 자본가의 소유물로 생각하는 것은 과연 현대 주식회사의 원리상으로도 합당한 사고일까? 자본주의 경영학의 교과서로 알려진 피터 드러커는 이미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에서 오늘과 미래의 자본주의를 본래적 의미에서의 자본주의라 부를 수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바 있다. “연금기금은 종업원들의 예금”이라는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러므로 만약 연기금이 어떤 기업의 최대주주라면, 그것은 실질적으로 익명의 노동자들이 최대주주라는 말과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익명의 노동자들이 출연한 자본으로 매입한 주식의 주주권을 노동자들의 경영권을 위해 행사하는 것도 사리에 맞는 일이 아니겠는가?
무릇 모든 위대한 사고는 지극히 단순할 수도 있는, 지금까지 모든 사람들이 무심히 지나쳐온 ‘상식적인 현실’로부터 시작된다. 자본주의 경제학은 물론이고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도 정면으로 묻지 못했던 자본주의 내부로부터 자본주의의 극복의 길 찾기를 시작하는 것, 이 책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의 의미는 한마디로 바로 여기에 있다 할 것이다. ‘기업의 누구의 것인가?’라고 하는, 어찌 보면 지극히 당연해 보이는 사실을 곧장 뒤집어 물구나무 세우는 이 물음 그 자체를 한 번 응시해 보도록 하자.
오늘의 자본주의를 금융자본주의라 하든 어떻게 이름 붙이든 그것을 작동시키는 지배원리는 주식회사이며, 이에 대한 자본의 소유권을 당연시하고 전황을 방치하는 한 민주주의는 껍데기로 남겨질 수밖에 없다는 의미에서 이 책은 민주주의에 대한 본질적인 물음을 제시하고 ‘다른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책이기도 하다. 민주주의는 정치와 경제 영역으로 따로 나누어서는 안 되며 삶의 총체성이라는 측면에서 하나로 사고될 수 있을 때 죽은 민주주의는 다시 그 실체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기업의 경영자를 왜 노동자가 직접 선출하면 안 되는가’라는 물음으로 시작하는 이 책은 인간의 자유가 자본에 영구히 종속되는 모순을 극복하는 ‘다른 민주주의’의 길로 우리를 안내한다.
출판사 리뷰
왜 사장은 노동자가 뽑으면 안 되는가? 노동자가 경영에 참여하면 기업이 망한다고?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기 전 루이 14세는 ‘짐이 곧 국가다’라고 했다. 이는 허세가 아니라 왕권신수설이라는 제법 심오한 이론에 의해 뒷받침된 확고한 시대정신의 표현이었다. 지금에 와서는 지난 시대의 농담이 되었지만, 그 시대에는 오늘날 우리가 삼성이 이건희의 것이라 해도 조금도 의심하지 않듯이 대다수 사람들이 왕이 국가의 주인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생각의 힘은 무서운 것이어서 철학자들이 왜 국가가 왕의 것인가 묻기 시작했을 때, 왕의 절대적 지배도 흔들리기 시작했고 결국 그 동요는 혁명으로까지 이어졌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기업을 그렇게 민주화하지 못할 까닭이 있을까?
이 책은 아주 ‘바보 같은’ 물음에서 시작한다. 그것은 ‘왜 기업의 사장은 노동자가 뽑으면 안 되는가?’라는 질문이다. 예를 들어, 서양에는 많은 교향악단이 주식회사였고 또 지금도 주식회사이다. 베를린 도이치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대표적인 경우이다. 교향악단의 노동자가 연주자들이라면, 경영자는 지휘자이다. 그러므로 지휘자를 교향악단의 단원들이 선출한다는 것은 주식회사 경영자를 종업원들이 선출하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다른 모든 주식회사도 교향악단처럼 운영되면 안 될 까닭이 있을까? 이 질문이 이 책의 출발점이다.
먼저 경제·경영학자들이나 법학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그들이 주식회사에서 소유와 경영의 분리를 설명하는 것을 들어보면, 마치 담합이라도 한 것처럼 같은 말을 반복한다. 즉, 현대의 거대 기업은 주식분산이 잘 이루어지고 주주의 수가 엄청나게 많아지고 항상 변동하기 때문에 주주들이 경영에 참여할 수 없고 전문경영인에게 맡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설명은 맞는 것일까? 실상은 이렇다. 주식회사에서 소유와 경영이 분리될 수밖에 없는 까닭은 주식이 너무 광범위하게 분산되어 있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주식의 소유와 기업의 경영권 사이에 아무런 필연적 관계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주식을 전혀 소유하지 않은 사람도 주식회사의 경영을 맡을 수 있고, 반대로 모든 주식을 소유한 사람도 경영을 남에게 맡길 수 있는 것이다.
더 어처구니없는 사실로는 이런 것이 있다. 주식회사에는 사외이사를 두게 되어 있다. 하지만 왜 주주들은 회사에 직접적인 이해관계도 없고 주주가 아닐 수도 있는 사람을 그것도 절반 이상이나 이사진에 임명해야 할까? 학자들은 그 까닭을 기업경영의 독립성을 위해서라 한다. 얼마나 터무니없는 설명인가? 이것은 마치 국정의 독립성을 기하기 위해 국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