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세기의 가장 급진적인 사상가 이반 일리치의 교육론
“학교는 불평등을 심화하고 배움의 자유를 억압한다.”
“학교는 타고난 배움의 능력을 교육의 ‘필요’로 바꾸고 하나의 서비스 상품으로 판매하는 기업적 제도다. 많은 사람의 믿음과 달리 학교는 더 이상 기회의 사다리를 제공하지 않는다. 학교에 다닐수록 우리는 가난해지고 배움의 기회를 잃는다. 학교는 졸업장과 점수로 사람들의 등급을 매김으로써 사회적 기회를 차단하고 불평등을 심화하며, 제도적 서비스에만 의존하는 무능력한 인간을 길러낸다. 교육의 문제는 학교교육이 적어서가 아니라 너무 많아서 발생한다. 불평등한 사회가 불평등한 교육을 낳은 게 아니다. 학교에 원래 내재된 불평등이 사회를 더욱 불평등하게 만든 것이다. 따라서 중요한 건 학교를 해방시키는 것이 아니라 학교로부터 사회가 해방되는 것이다.”
진보와 끝없는 성장에 대한 기대가 팽배하던 1970년대 초, 『학교 없는 사회』는 사람들의 통념과는 정반대되는 메시지로 단숨에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된 책이다. 이반 일리치의 이 책은 지금 다시 읽어도 오늘의 교육 현실에 큰 울림을 준다. 배움의 가치를 교육이라는 이름의 ‘서비스 가치’로 바꾸고, 승리자보다는 패배자를 양산하며, 학교교육이 아니면 직업도 사회적 지위도 얻을 수 없는 극단적 독점을 실현한 곳이 학교다. 저자는 제도화된 가치만을 가치로 소비케 하는 자본주의적 생산-소비 체제의 밑바탕에는 학교가 있다고 본다. 학교는 이 체제에 최적화된 인간을 길러내고, 그들의 소비 수준에 맞춰 구축된 계급 피라미드를 공고히 하는 곳이다. 학교는 참된 배움보다는 가르치기 위해 가르치는 교육으로 결국 교육전문가와 교사들의 필요에 봉사하는 곳이기도 하다.
『학교 없는 사회』는 이반 일리치의 이름을 전 세계에 알린 책으로, 후일 완성된 그의 반성장주의, 반제도주의, 생태주의의 밑그림을 보여준다. 교육뿐 아니라 산업화된 서비스들에 꽁꽁 얽매임으로써 삶의 자율적 능력과 자기결정권을 잃어버린 우리들에게 희망을 회복하는 길을 밝혀주는 책이기도 하다.
■ 제도 비판의 서막을 알린 책
1971년에서 1976년 사이 이반 일리치는 현대 산업사회의 기본 이데올로기를 구축하고 주입하는 제도들을 비판하는 책을 연달아 펴냈고, 이 책들은 모두 베스트셀러가 되어 저자의 이름을 전 세계에 알린다. 이 책 『학교 없는 사회』를 비롯하여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 『의료의 한계』(‘병원이 병을 만든다’로 번역), 『공생공락의 사회』(‘성장을 멈춰라’로 번역) 등이 그 책들이다. 일리치 사상의 밑그림이 완성된 시기의 책들로, 이후 일리치는 이 그림에 기초하여 근대 사회가 형성된 자본주의 초기의 역사를 탐구하고 현대인의 의식이 만들어진 역사적 조건을 탐색하는 저작들을 쓴다. 따라서 일리치 사상의 뼈대인 현대의 생태적, 사회적, 정신적 위기에 대한 관심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시기의 저술들 특히 『학교 없는 사회』에 표현된 생각들을 읽는 게 중요하다.
그렇다면 왜 일리치는 처음부터 제도 비판에 몰두했을까? 교육, 의료, 교통 등의 기본 제도들은 인간의 자율적 삶을 근대 산업체제에 포획하는 대표적 제도들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이 자연에서 자율적으로 얻고 누리는 ‘사용가치’를 시장의 ‘교환가치’로 바꾸어 공급하는 독점적 제도들이기도 하다. 이 제도들은 학교가 아니면 배울 수 없고, 병은 병원에 가야만 고칠 수 있으며, 차가 없으면 가까운 거리도 이동할 수 없다는 서비스 소비의 신화를 우리에게 주입한다. 그 결과 사람들은 이런 상품과 서비스 생산체제에 사로잡혀 자율적 삶의 가능성을 전문가들에게 헌납하는 불구의 존재가 되어버렸다는 것이 일리치의 진단이다. 특히 의무교육으로 강제되는 학교교육은 제도의 역생산성, 가치의 독점, 현대화된 가난과 같은 병폐를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제도로 일리치의 첫 번째 타깃이 된다. 그렇다면 일리치가 고발하는 학교 제도의 병폐는 무엇인가?
■ 현대의 종교가 되어버린 학교
우선 일리치가 바라보는 학교는 가르침의 장소가 아니라 종교적 의례를 집행하는 곳이다. 즉 신앙을 종교적 의례로 대체한 교회처럼 학교는 교육과정 이수와 성적으로 배움을 대체한 현대의 종교기관이다. 헌법이 국교 설립(establishment of religion)을 금지했듯이 의무화된 학교교육을 폐지(disestablish)해야 한다고 일리치가 주장한 첫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신자들을 양떼처럼 돌본다는 교회의 이념은 근대 들어 자본주의 산업체제에 표준화된 시민을 길러내는 국민교육 체제로 옮겨갔고, 그 결과 사람들은 신앙이 약해서 삶의 불행이 찾아온다고 믿었듯이, 이제는 인생의 실패가 학교교육을 제대로 받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이데올로기를 체화하게 되었다. 사회적 기회의 박탈이나 가난 역시 학교교육을 중단한 때문이고, 이런 믿음으로 인해 가난한 처지의 사람들이 더 나은 삶을 일궈갈 시간과 비용마저 학교에 빼앗기는 이중의 불평등을 감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일리치는 바로 이런 점에서 “사회 전체가 학교화되었다(schoolized)”고 말한다. 학교교육은 졸업 후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일생을 지배한다. 많은 사람들이 ‘평생교육’이나 ‘자기계발’과 같은 변형된 형태로 학교교육을 평생 지속하는 것도 그러하고, 실패의 이유를 학교교육의 부족에서 찾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 책 『학교 없는 사회』의 원제목인 ‘Deschooling Society’에는 이 같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저자는 단순히 학교를 개혁하자는 데 그치지 않고, 아예 사회를 ‘탈학교화’해야 한다는 근본적 주장을 이 책에서 펼치고 있다.
■ ‘교육과정’이라는 이름의 불평등 상품
학교는 우선 배움의 타고난 욕구를 교육의 필요(needs)로 바꿈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교육을 하나의 서비스로 강제 소비하게 만드는 곳이다. 이를 위해 학교교육은 ‘기회의 사다리’ 곧 사회적 지위를 얻기 위한 필수적 통과 의례인 것처럼 선전된다. 그러나 우리는 학생이 학교교육에서 성공할 수 있는 확률이란 것이 부모의 부와 학력에 의해 결정되며, 학생의 능력이란 것 역시 부모의 능력 덕분임을 안다. 결국 학교란 졸업장과 성적이라는 가격표로 애초의 불평등을 추인하고 확대 재생산하는 의례적 절차를 시행하는 곳에 불과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더구나 학교는 교육과정(curriculum)이라는 이름의, 개인적 조건과 편차를 고려하지 않는 획일화된 패키지 상품을 강요함으로써 교육이라는 ‘의례’를 시행하는 곳이다. 학교 시스템은 초등학교 입학부터 대학 졸업까지 한순간의 이탈도 허용하지 않는다. 학교가 집행하는 교육과정은 또한 전일제 수업, 교재, 학비, 교우관계까지 모든 것을 하나의 상품으로 묶은 것이기도 하다. 이 상품을 소비하면 할수록 그 소비 능력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은 더한 불평등을 겪을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이 교육과정은 사회에까지 연장되어 ‘숨은 교육과정’ 즉 교육 서비스를 소비하지 않으면 불이익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신화를 주입한다. 학교가 불평등을 재생산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이며, 여기에는 의무교육으로 짜인 교육 시스템이 결정적으로 작용한다. 왜 국교의 수립은 법적으로 금지하면서 자발적 배움의 기회를 봉쇄하는 학교교육은 법으로 보장하는가? 일리치는 교육과정을 강제하는 데는 교육전문가와 교사 등 전문가적 이익이 걸려 있다고 본다. 교육과정은 전문가들의 도구이다. 삶에는 아무런 쓸모가 없는, 가르치기 위해 가르치는 교육, 천편일률의 교육과정이 진짜 가르침을 대신하게 된 이유이다.
■ 제도화된 가치에 대한 고발
이반 일리치가 학교를 제도 비판의 첫 번째 과녁으로 삼은 이유는 무엇보다 그것이 산업적인 서비스 제도의 생산양식을 대표하기 때문이다. 그는 학교의 이런 기능을 ‘가치의 제도화’라는 말로 표현한다.
“학교는 학생들을 ‘학교화’함으로써 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