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지원을 받은 갑신정변은 청군에 의해 진압됐다. 청군은 자연스럽게 점령군이 됐고, 청나라의 입김이 강해졌다. 이는 청군에서 주요 역할을 한 위안스카이의 퍼스낼리티도 작용했지만, 근본적으로는 열강에 침탈당하고 있던 청나라의 사정상 마지막 남은 ‘속국’ 조선을 놓치지 않으려는 몸부림이기도 했다. 이는 한-중 관계에서 새로운 국면이었다.
조선은 건국 초부터 명을 사대의 대상으로 하는 외교 정책을 택했다. 그러나 내정 간섭은 받지 않았다. 물론 조선의 내부 사정 때문에 왕위 계승이나 세자 책봉 등을 승인받는 과정에서 애를 먹은 경우도 있지만, 크게 보면 자주권이 보장됐다. 조선 중기 종주국이 명에서 청으로 바뀌었지만 그런 대세에는 변화가 없었다. 오히려 청은 명을 대신해 중국 본토를 차지하는 과정에서 조선을 무력으로 제압하는 험악한 꼴을 보였지만 명이 멸망한 이후에는 조선을 심하게 압박하지 않았다.
그런데 청 말기이자 조선 말기, 동아시아 전체가 서양 세력의 침탈을 받게 되면서 청이 조선을 보는 눈은 달라졌다. 류큐와 타이완, 베트남 등 전통적으로 영향권 아래 있던 나라들이 모두 제국주의 열강의 손에 넘어가면서 유일하게 조선만 남은 것이다. 청은 이제 조선을 과거의 느슨한 조공국 체제가 아니라 조금 더 고삐를 죄는 방식을 모색했다. 서양 열강의 식민지 편입에 좀 더 가까운 모습으로 말이다.
그 첫 번째 계기가 임오군란이었다. 대원군에게 권력을 빼앗긴 고종과 민 왕후는 청군에 의지해 권력을 되찾을 수밖에 없었고, 청군은 점령군이 되었다. 대원군은 청나라로 잡혀갔다.
이런 상황에서 고종과 민 왕후는 개방의 대세와 청의 압박에 휩쓸려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재정 상태도 엉망이어서 매관매직과 당오전 발행 등 비정상적인 방법을 동원해야 했다. 결국 일본 같은 나라에서 돈을 꾼다는 생각까지 하게 됐고, 그것이 김옥균과 박영효 등 젊은 개화파들이 고종에게 접근하는 계기가 됐다.
김옥균 등은 고종의 환심을 사기 위해 차관 도입을 위해 노력하는 한편(그것은 결국 실패했다), 무력을 동원한 쿠데타를 준비했다. 서재필 등이 일본으로 군사 유학을 떠나고, 윤치호의 아버지 윤웅렬과 박영효는 유사시에 동원할 수 있는 군대를 비밀리에 양성했다.
차관 도입 등으로 일본을 드나들던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파는 결국 일본 세력을 등에 업었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개화사상 전파에 그치지 않고 인력까지 대주며 김옥균 세력의 움직임을 밀어주었다. 조선에 주재하는 다케조에 공사는 본국 정부의 훈령도 기다리지 않고 김옥균 등의 쿠데타 계획을 지원했다.
결국 김옥균 일파는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고종을 붙잡아 두고 ‘혁명정부’를 구성했으나, 의욕만 앞서 금세 한계를 드러냈다. 고종을 허수아비 취급해 적으로 만들었고, 고종은 청의 주둔군과 연락을 했다. 당시 서울에 주둔하고 있던 청군 병력 1,500명은 일본군의 10배였으니 아무리 고종을 붙잡고 있다 해도 버티기 어려웠다. 정변은 삼일천하로 끝났다.
정변 실패의 여파로 일본이 일시 물러나자 조선은 청나라 세상이 됐다. 리훙장은 조선을 쥐고 흔들기 위해 독일인 묄렌도르프를 대리인으로 조선에 보냈다. 그러나 묄렌도르프는 엉뚱하게도 러시아를 조선으로 끌어들이는 데 다리를 놓았다. 러시아의 관심을 유럽이 아닌 아시아 쪽으로 돌리려는 모국 독일의 의도에 따른 것이었다.
이와 같은 사태 전개는 또 다른 열강 영국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유라시아 대륙 전체를 무대로 러시아와 ‘그레이트게임’을 벌이고 있던 영국은 러시아가 조선을 매개로 동아시아에서 세력을 확장할 가능성이 생기자 차단에 나섰다. 그것이 거문도 점령이다. 한반도는 이제 여러 외세의 각축장이 돼버렸다.
이런 시기에 조선의 위정자들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청나라는 과거와 달리 실제적인 이득을 챙겨가려 했고, 고종은 열강의 외교전을 이해할 능력이 없는 상태에서 자신을 지켜줄 ‘후견 국가’ 찾기에만 골몰했다. 그러는 가운데 외세의 침탈은 본격화하고 민씨 척족 등 내부의 부패가 더해져 민생은 더욱 어려워지고 있었다. 갑신정변 실패 후, 또 하나의 파국이 잉태되고 있던 시기의 역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