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제공 책 소개

엔드리스(Endless) 시리즈는 도서출판 넥서스가 ‘문학의 영원함’을 캐치프레이즈로 삼아, 세대를 초월하는 탁월한 한국문학 작품을 엄선하여 독자들에게 널리 소개하고자 2024년 새롭게 시작한 재출간 프로젝트입니다. Endless 02 ≪나는, 자정에 결혼했다≫ 2006년 등단 후 첫 출간된 한지수 작가의 소설집으로 문단에서 호평받은 작품성이 탁월한 단편소설들이 수록되었다. 일곱 편의 작품들은 어느 것 하나 부족함이 없는 수작들로, 특유의 빛나는 감성과 상상력을 엿볼 수 있다. 특히 공간적 배경이 주변부에 머무르지 않고 먼 나라 낯선 이국의 심층부까지 이르고 있어 서사의 영역이 두루 광범위하다. 화자가 여성은 물론이고 남성, 몸속의 자궁이 되기도 하고 외국에서 이주해 온 동남아 여성이 되기도 한다. 국적과 성별, 사회적인 지위를 아우르는 작가의 시선과 주제의 스펙트럼이 눈부시다. 동시에 어느 것 하나 소홀하지 않고 성실한 자료 조사와 깊이 있는 사유로 등장인물의 내면과 환부의 고통 한가운데를 직시하는 끈질긴 산문정신이 소설 쓰기의 전범을 보여준다. 생명의 기원, 사랑의 고뇌, 인간 관계의 단절, 야만적 폭력에 저항하는 절박한 외침이 담긴 그의 작품들은, 소설가 서영은의 표현대로 삶의 오묘하고도 격정적인 지도로서, 독자를 사로잡을 것이다. 당신에게 내 주소를 다시 말해주어야겠다. 당신이 지금처럼 배꼽에 손목을 대고 아래를 향해 주먹을 쥐어보면, 바로 그 위치에 주먹보다 조금 작은 크기의 내가 있다. 횡격막 아래의 골반 안쪽에서 당신과 더불어 39년째 살아왔다. 나는 당신의 자궁이다. ● ‘내 몸의 피를 갈고 싶은’ 사람들의 슬픔 ‘내 몸의 피를 갈아버리고 싶은’ 사람이 있다. 소심한 성격에서 벗어나기 위해, 타인의 요구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삶을 살아온 우유부단함 때문에, 또는 열등감과 소외 의식 때문에 그들은 자신의 피를 모두 다른 피로 갈아 넣고 싶을 만큼 고통스럽다. <페르마타>에서 주인공인 치과의사는 성공을 강요하는 어머니에게서 악착같이 의사가 되길 바라는 아내의 삶으로 이동하며 자신의 정체성과 존재 가치를 잃어버린다. 한번도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보지 못했던 그는 ‘공황이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에, 자신을 구하는 수단’이라는 말처럼 탈출구를 끝내 찾지 못한 사람이다. 작가는 <미란다 원칙>의 착하게 살고 싶지 않은 사회복지사와 공황장애를 앓는 치과의사를 위해 잠시 쉬어 갈 수 있는 <페르마타>를 구상했다고 말한다. (이탈리아에서는 정거장을 페르마타라고 표시한다.) 한편 <열대야에서 온 무지개>에 등장하는 사이란은 태국에서 이주해 한국 남자와 살고 있는 여성이다. 그녀는 남편과의 관계를 어렵사리 회복하면서 서툰 한국말로 ‘한우를 낳고 싶다’는 고백을 한다. 소를 수입해서 3년간 기르면 ‘국내산’이라고 표기할 수 있지만 진짜 한우는 본래 이 땅에서 태어나 자란 소를 말한다는 남편의 설명을 듣고 그녀가 내린 결론이다. 진짜가 되고 싶은 열망, 이주민이 아닌 정착민으로서 온전히 그들과 동등해지고 싶은 꿈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생존’의 의미가 되기도 한다. ● 불친절한 세상에 대한 화답 저자는 2010년 10월 첫 소설집을 내면서 ‘나를 둘러싼 불친절한 세상에 감사한다’라고 말했다. ‘만약 세상이 내 앞에서 언제나 친절했다면, 소설 쓰기를 계속했을까’라는 질문을 던지며, 그러한 환경이 의식을 확장하고 세계관을 갖는데 밑거름이 되었다고 밝힌다. 이 소설집에 실린 일곱 편의 작품들은 모두 저자가 소설을 쓰기 위해 직접 그 공간을 방문하고 문제의식에 치열하게 천착한 끝에 얻어낸 결실이다. <천사들의 도시> 주인공인 제임스를 만나기 위해 방문했던 필리핀의 앙헬레스 시티. 그곳에서 본 이민자들의 모습이 소설로 이어졌고, 오산시청에서 주최하는 다문화가정의 도우미로 일하며 여성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친 경험이 <열대야의 무지개>로 피어났다. 여성과 자궁에 대해 공부하여 <배꼽의 기원>을 창작했으며 마감 날짜에 쫓겨 소설의 배경이 된 모텔방 506호에 입실해 피 말리는 자기와의 싸움 끝에 쓴 소설이 <이불 개는 남자>이다.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에 빠져 초현실적인 세계의 풍경 속에서 그리듯 쓴 소설이 <나는, 자정에 결혼했다>이다. 저자는 이 소설 속에 등장하는 모든 이들이 진심으로 행복하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