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제공 책 소개
우치다 타츠루가 스승 레비나스의 예지가 담긴 ‘사랑의 현상학’을 밝혀준다
우치다 타츠루는 이 책에서 자신이 스승으로 삼은 레비나스의 ‘사제론’, ‘타자론’, ‘에로스론’에 대한 저자 자신의 개인적 고찰을 레비나스의 논리전개를 따라 담아낸다. 또 레비나스의 예지를 칭송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서두에서 밝힌다. 레비나스 철학의 핵심은 타인의 존재가 삶에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 밝혀내는 데 맞추어져 있다. 따라서 레비나스는 기존 서양 철학의 자기중심적 존재론을 비판하고 타자에 대한 책임을 우선시하는 윤리학을 전면으로 내세우는 ‘타자성의 철학’을 정립한다. 이 책에서 우치다 타츠루는 레비나스의 철학을 더욱 수월하고 명쾌하게 풀어낸다.
「1장 타자와 주체」에서 우치다 타츠루는 레비나스를 ‘완벽한 스승’이며 그의 텍스트는 ‘완전기호’라며 ‘스승을 섬기는 것이란 어떤 일인가?’라는 물음에서 시작한다. 레비나스와 그의 스승인 슈샤니 옹과의 관계를 통해 유대교적 탈무적 전통의 스승상을 추적해간다. 아울러 사제관계란 ‘타자’와의 만남에서 가장 기본적 양태임을 밝히면서, 스승은 ‘최초의 타자’라는 점을 거론한다. 우치다 타츠루는 이처럼 스승의 문제에서 시작해 레비나스의 타자론을 전개한다. 레비나스의 타자론에서 ‘나’와 ‘타자’는 미리 독립된 두 항으로서 자존적으로 대치하는 게 아니라, 사건 안에서 동시에 생성한다는 점을 이끌어낸다.
「2장 비-관조적 현상학」에서는 레비나스가 후설 현상학을 어떻게 읽어들이고, 후설적 ‘타아’와 모습을 달리하는 색다른 ‘타자’개념을 이끌어냈는가를 철학사적 맥락 안에서 다루고 있다. 레비나스의 철학적 이력은 1930년대 후설 현상학과 하이데거 존재론의 비판적 진술로부터 시작된다. 레비나스는 후설적 ‘타아’를 물리치고 상호주관적 기층에서 서로 통하지 않는 절대적 타자를 ‘자아’에 대면시켰다는 것이다. 레비나스의 ‘비-관조적 현상학’은 의미에 초점을 둠으로써 현상학의 쇄신을 시도했다는 것이다.
「3장 사랑의 현상학」: “Ⅰ.집과 여성”에서는 집의 현상학적 의미를 읽어나간다. 레비나스는 ‘집’은 ‘격리된 존재자’ 다시 말해 ‘에고이스터적인 자아’가 ‘타인 자’라는 양식을 향유하기 위해 만들어낸 ‘피난처’라고 말한다. 레비나스가 ‘여성’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 그것은 경험적 의미가 아니라 현상학적 차원을 다룬다. 세계를 창시하거나 대지의 찬탈이 정지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빛으로부터 벗어나’ 장소를 비워야 한다. 레비나스는 그 창조적 증여자를 경험적 성별과 다른 차원에서 ‘여성’이라 부른다. “Ⅱ.여성과 주체”에서 우치다 타츠루는 레비나스가 시도한 ‘여성적인 것의 복권’은 이전으로 회귀가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여성’ 개념을 제시했다는 것이다. 우치다 타츠루는 이와 관련해 이리가라이가 레비나스를 부권론자로 몰아붙이는 것에 강하게 반론을 제기한다. “Ⅲ.찢어진 인간”에서는 궁극적으로 정의와 자애, ‘말하는 것’과 ‘말해지는 것’, 전체성과 무한, 초월과 내재, 남성과 인간 등 인간성의 조건은 ‘하나이면서 둘이라는 것’, 찢어져 있음으로써 지성과 자유를 확보하는 곤란한 선택 안에 존재한다는 점을 적시한다.
■ 책 내용
사랑의 현상학, 존재와 의식을 뛰어넘어 타자를 향한 현상학의 진화
레비나스는 독일 프라이부르 대학에 머물며 당시 현상학의 대표자인 후설과 하이데거에게 지도를 받는다. 초기에는 후설과 하이데거의 현상학을 프랑스에 처음 소개한 독일 현상학 연구의 권위자로서 활동하였다. 프랑스 현상학을 대표하는 사르트르 역시 후설에 관한 레비나스의 박사학위 논문을 읽고 처음 현상학에 입문했다. 이후 레비나스는 기존의 현상학과 입장을 달리하여 ‘타자성의 철학’이라는 독창적인 철학을 전개하여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된다. 또 기존의 서양철학을 자기중심적 지배를 확장하려 한 존재론이라고 비판하고 타자에 대한 책임을 우선시하는 윤리학을 제1철학으로 내세운다.
레비나스의 키워드로서 알려져 있는 수많은 술어―‘타자,’, ‘얼굴,’, ‘일리아,’, ‘유책성’, ‘무관심성(d?sint?ressement)’, ‘제3자’, ‘그임(illeity)’(‘그’라는 성격―역자) 등―는 모두 다 하나의 정의로만 해석되지 않는다. 이처럼 레비나스의 개념은 무척 난해하기 때문에 레비나스가 ‘뭘 말하는지 잘 모르겠다’는 ‘레비나스 효과’가 발생한다. 우치다 타츠루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자는 레비나스에게 뭔가 개인적인 소환명령을 받은 듯한 느낌을 갖게 되고, 그만 자신이 이해한 레비나스를 말해버린다는 것이다. 이 개인적으로 소환되는 느낌을 레비나스는 ‘영감(inspiration)’이라는 말로 설명한다.
우치다 타츠루는 레비나스가 현상학을 무엇보다도 결코 회의론에 빠지지 않는 방식으로 지성의 불능을 성찰하게끔 하는 방법으로 간주했다고 지적한다. 이처럼 레비나스의 현상학은 무엇보다도 ‘방법’이었기에 ‘누군가’가 ‘사용’함으로써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현상학은 여러 세대에 걸쳐 한 사람 한 사람의 현상학자가 그때그때 자기에게 고유한 철학적 난문과 씨름하기 위해 그때그때 독특한 방식으로 활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공동으로 개척해야 할 지적 자원 내지 수단으로서의 현상학이라는 구상은 다른 곳에서도 되풀이된다.
레비나스는 ‘표상’ 혹은 ‘재현전화(repr?sentation)’의 선행성, 이것이 후설에게 고유한 경향이라고 파악했는데, 그는 현상학의 본래 대상은 결코 ‘표상적인 것’에 한정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의식이 지향하는 것은 ‘관조된 대상(objet contempl?)’만이 아니다. 지향성이라는 작용은 단순히 ‘표상하는 사유’와 ‘관조된 대상’ 사이에만 생기는 사황이 아니다. ‘표상하지 않는 사유’와 ‘비-관조적 대상’ 사이에 발생하는 지향성의 경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레비나스는 후설이 그러한 가능성을 충분하게 음미하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여기에서 레비나스의 ‘비-관조적 현상학’이 태동한다.
우치다 타츠루는 레비나스의 ‘비-관조적 현상학’은 의미에 초점을 둠으로써 현상학의 쇄신을 시도했다고 평가한다. 레비나스적 타자는 관조적 대상도 아니며, 상호주관성을 매개로 간접적으로 주어지는 타아도 아니다. 그것은 상상도 공감도 초월한 낯선 사람이다. 그러한 타자와 나 사이에 커뮤니케이션의 험로가 있는데 어떻게 그런 타자와 비-관조적 만남이 가능해지는가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무한한 타자를 향한 끊임없는 탐색, 그 타자를 꼭 끌어안는 ‘사랑의 철학’
우치다 타츠루는 레비나스는 철학사에서 걸출한 ‘완벽한 스승’이며 그 텍스는 ‘완전기호’라는 점을 밝힌다. 그는 레비나스를 읽는 방법 그 자체를 레비나스로부터 배운 것이며, ‘레비나스로부터 배운 독법에 기초해서 레비나스의 텍스트를 읽는 사람’, ‘연구자’라는 것은 이미 적절한 호칭이 아니기에 ‘제자’라는 호칭을 참칭한다. 우치다 타츠루는 스승을 개인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최초로 만나는 타자라고 한다. 따라서 사사(師事)한다는 것은 ‘타자가 있다’는 사실 그 자체를 학습하는 경험이라는 것이다. 우치다 타츠루는 이처럼 스승의 문제에서 레비나스의 ‘타자성의 철학’을 이끌어낸다.
사실 레비나스가 현대철학에 불어넣은 활력은 매우 인상적이다. 현상학적 전통의 관점에서 후설과 사르트르가 ‘의식’에, 하이데거가 ‘존재’에 몰두하며 현상학을 발전시켰다면, 레비나스는 ‘타자’라는 개념을 현상학의 중심에 끌어들였다. 이 타자 개념에 대한 사유로부터 서구 문화 전반의 전체주의적 성격에 대한 반성에 가속도가 붙었다. 레비나스의 사상은 현대 종교 철학에도 영감을 불어넣었는데, 고통 받는 타자와의 마주침이 어떤 것인가를 진지한 철학적 사유 속에서 살펴본 사상가인 것이다.
게다가 그의 윤리학은 단순히 ‘머리’에서 나온 사상이 아니라 ‘몸’에서 나온 사상이라는 점에서 다른 윤리적 철학과 차별화된다. 레비나스의 다음 구절은 타자를 향한 그의 철학적 태도를 응축해 보여준다. “내가 당신을 향해 ‘안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