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제공 책 소개

2018년 『미미한 천사들』, 2020년 『메블리도의 꿈』, 2022년 『찬란한 종착역』을 통해 한국에 소개된 프랑스 작가 앙투안 볼로딘의 단편소설집 『작가들』 한국어판이 출간되었다(조재룡 옮김). 『작가들』은 앙투안 볼로딘의 이름으로 발표된 열여덟 번째 작품이자 『바르도 오어 낫 바르도』(2025년 한국어판 출간 예정)에 이은 두 번째 단편소설집으로 작가의 자전적인 면이 반영되기도 한 작품이다. 『작가들』 속 일곱 편의 단편에 등장하는 일곱 명의 작가들은 죽음과 실패의 문턱을 오가며 소진되어 가는 자들로, 이들이 반추하는 각자의 삶은 실패하는 글쓰기를 통과하면서 소외된 소수의 문학으로 수렴한다. 책의 부록으로는 『작가들』 출간 당시 공개되었던 앙투안 볼로딘의 인터뷰를 수록했다. 일곱 편의 단편, 일곱 편의 투쟁 선언문 실패한 작가들에 대한 이야기는 언제나 매혹적이다. 이 책의 일곱 작가들은 작품 활동과 삶 모두에서 명백히 실패해 있다. 누군가에게 좀처럼 읽히지 않는 작품을 꾸준히 생산하며 살아가는 이들의 삶은 죽음과 맞닿아 있는 형태다. “요양원에 보내진 마티아스 올반은 총을 들고 마음속으로 정해 놓은 숫자를 천천히 세어 가며 자살을 미룬다. 감옥에 갇힌 린다 우는 포스트엑조티시즘과 작가들의 정치적 참여를 환기한다. 마리아 300-10-3이라는 이름의 벌거벗은 여인은 감옥에서 즉흥적으로 이미지 이론을 강연한다. 동료 수감자들에게 고문을 당하는 ‘나’는 폭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종말이 다가왔음을 깨닫는다. 수상 소감을 말하는 자리에서 ‘저’는 작가로서 자신이 성공하는 데 이바지한 사람들에게 유머러스하게 감사를 표한다. 보그단 타라셰프는 성공과는 거리가 먼 작품을 발표하고 여러 건의 살인을 저지르며, 자신을 낳고 죽은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죄책감을 품고 있던 니키타 쿠릴린은 실종 사건의 진실을 조사하며 절대로 출간될 수 없는 소설을 구술로 쓴다.”(「옮긴이의 글」 중에서) 연이은 실패가 빤히 예견된다면, 이를 우회하는 선택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들은 그러지 않는다. 이들은 왜 읽히지 않는 글을 쓰고 들리지 않는 말을 해야만 했을까? 이 책의 작가들 중 한 명인 보그단 타라셰프가 자신의 책을 위한 신간 안내문으로 밝힌 대목이 하나의 힌트가 될 수 있다. 타라셰프는 제 책을 “글쓰기 자체에 대한 적극적인 경멸의 표시이자, 책이라는 개념, 작가라는 개념과 작가와 관련된 잘못된 가치들을 조롱하고 비하하기 위한 일종의 자해 표시”라고 소개하며, 이를 “글쓰기에 대한 혐오와 공식 출판계에 대한 증오가 혼합된 적대감의 선언으로 받아들여야 한다”(93~94쪽)고 밝혔다. 글쓰기를 반박하기 위한 글쓰기. 읽히지 않는다는 예정된 결과를 개의치 않고 써내려 갈 수 있다는 것, 그것은 그 자체로 글쓰기에 대항한 투쟁이 되고 선언이 된다. 또한 이 책의 부록으로 실린 인터뷰에서 저자 앙투안 볼로딘이 직접 밝힌 것처럼, “이들은 게다가 글을 쓰는 것보다는 오히려 말을 해야 한다는 절박함에 의해 움직”이기도 한다(174쪽). 들리든 들리지 않든 무관히 말을 해야만 하는 이들의 실패는 행동의 산물이다. 시도하고 선언하고 분투한 결과다. 그리고 그것은 이 책의 작가들 중 또 다른 한 명인 린다 우가 감옥에서 힘겹게 이어 가고 있는, “소진된 자들 혹은 죽은 자들에 의해, 그리고 죽은 자들을 위해 발성된, 쓸모없고 몽환적인 최후의 증언”(32쪽)으로 남는다. 이 “무관심과 실패로 막다른 골목에 익명으로 남겨진 작가들의 초상화를 전시한 갤러리”(「옮긴이의 글」 중에서)는 쓸모없는 말들이 이루는 미완의 공동체로서 스스로의 실패를 전시한다. 그리고 이를 개의치 않는다. 이미지와 목소리 『작가들』은 이미지와 목소리의 관계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보게 하는 소설집이기도 하다. 이는 특히 단편 「마리아 300-10-3의 이미지 이론」에서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사망 판정을 받아 감방에서 안치실로 이송되었지만 자신의 몸 구멍을 막아 줄 라마승 역시 사망하는 바람에 삶과 죽음 어딘가에서 달리고 있는 여인, 마리아 300-10-3은 “우리 포스트엑조티시즘 세계”에서는 “오로지 이미지만이 중요”하다고 단언한다(108쪽). 그의 말에 따르면 “이미지는 처음부터 모든 중요성을 가지고 있”으며, “목소리는 덤으로” 온다(108쪽). 이미지에 뒤따라오고 덧붙여지는 그 목소리는 결국 “이미지에 속하는 목소리, (…) 이미지의 언어적 표현 자체인 목소리”로, 이 “무성(無聲)의 목소리”는 “이미지 고유의 자연적인 힘들을 전제”하기에 그리고 “이미지 안에 존재하는 것”이기에, “자연스러운 목소리”가 된다(109쪽). “모든 이미지가 말을 하지. 모든 이미지가 언어 없이, 무성의 목소리로, 자연스러운 무성의 목소리로 말을 하지.”(116쪽) “이미지가 나타나면 거기에는 침묵이 있을 수 없습니다.”(116쪽) 마리아 300-10-3은 이미지에 목소리가 뒤따라온다는 주장을 증명하고자 여러 영화의 어떤 장면들을 경유한다. 잉마르 베리만의 「제7의 봉인」과 「수치」, 벨라 타르의 「파멸」, 데이비드 린치의 「이레이저헤드」, 프리드리히 무르나우의 「노스페라투」, 왕자웨이의 「동사서독」, 안드레이 타르콥스키의 「잠입자」, 구로사와 아키라의 「살다」, 베르너 헤어초크의 「난쟁이도 작게 시작했다」, 세르조 레오네의 「옛날 옛적 서부에서」, 안드레이 타르콥스키의 「이반의 어린 시절」과 「거울」이 주요한 예시가 되며, 이는 이 책의 저자인 앙투안 볼로딘이 어떤 이미지들을 주목하고 있는지 부분적으로 보여 준다. 실제로 볼로딘은 예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글을 쓸 때 제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항상 이미지입니다. (…) 반드시 그렇지는 않더라도 촉각이나 냄새의 질서에 대한 감각 또한 포함되어야 하기에, 다수의 장면이 어둠 속, 그게 아니라면 절대적인 어둠 속에서 발생합니다.”(178쪽) 그렇다면 앙투안 볼로딘이라는 작가의 글은 이미지에서 시작되거나, 어둠이라는 이미지에서 시작된다. 자신은 책을 읽는 사람인 동시에 영화를 보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볼로딘은 “이미지와 영화를 외면하기란 불가능”하다고 고백한다(178쪽). 이렇게 『작가들』은 이 시대의 독자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작가의 책임을 스스로 증명해 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