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처럼 쏟아지는 위험을 얼리는 영점의 쓰기
얼음이 된 위험 위를 걸어가는
묵직한 가벼움, 진전 있는 발걸음
2016년 《한국경제》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한 시인 이서하의 두 번째 시집 『조금 진전 있음』이 민음의 시 315번으로 출간되었다. 첫 번째 시집 『진짜 같은 마음』에서 무심히 걷 던 속도를 늦추고 멈춰 서서 세상의 구석구석을 살핀 뒤 ‘진짜’와 ‘진짜 같은 것’의 차이를 묻던 시인 은, 두 번째 시집 『조금 진전 있음』에서 멈췄던 발걸음을 새로이 떼고, 옮기며, 나아간다. 시집 『조금 진전 있음』은 시인이 내딛는 그 조심스럽고도 거침없는 보폭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처음 시집을 열 어 차례를 펼치면 우리는 시인이 수집한 ‘가장 위험한’ 것들의 목록과 마주하게 된다. 이것은 시인이 탐색한 석연치 않은 슬픔의 집합이기도 하다. 두 번째 시집을 묶으며 시인은 아마도 세상을 웅덩이 로 인식한 것처럼 보인다. 웅덩이의 특징은 움푹 파였다는 것, 그리고 물이 고여 있다는 것이다. 이 작은 패임은 늪보다는 작아 빠져나오기 더 쉽지만 애써 조심하게 되지 않아 언제든 빠지기도 쉽다. 슬픔이 물처럼 고인 웅덩이가 도사린 삶에서, 고여 있지 않고 지나가기 위해 시인이 택한 방식은 문 장을 찢고 잇고 덧대고 제작하는 것. 우리는 시인의 문장을 다리삼아 슬픔의 웅덩이를 건널 수 있 다. 이때 웅덩이에 고인 것들은 이서하의 문장 사이사이로 비칠 뿐이라서, 우리는 슬퍼도 슬프지 않 은 채로 그것을 들여다볼 수 있다.
■급속 냉동 위험 취급 주의
이서하가 ‘위험하다’고 지목하거나 분류하는 것들은 물과 가까운 성질을 띠는 것처럼 보인다. 시집 의 도처에는 시인이 감각하는 위험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오는데, 그것은 삽시간에 불어나는 물, 갑 자기 쏟아져 내리는 비, 그리하여 예기치 못하게 물에 빠지고 젖게 되는 우리의 몸과 옷과 집이다. 난데없이 물을 뒤집어쓰게 된 시인은 비명을 지르거나 발을 구르는 대신 이 상태를 어떻게 규정하 고 수집할지 고민한다. 위험의 종과 수, 생태와 번식을 관찰하고 연구하기 위해 그 표본을 수집하는 위험학자가 된 듯, 우리를 적시는 위험을 담아 보려 애쓴다. 위험을 담기 위한 시인의 도구는 이상하 고 고유하다. “엉성하게 엮인 매듭”(「가장 위험한 심심하지 않은」)으로 이루어진 주머니와 “옛것에 각 별한” “삽”(「가장 위험한 제자리는 어디에」), “어중간”한 “실내화 가방”(「가장 위험한 한때」)과 “무엇이든 올려놓을 수 있는” “숟가락”(「가장 위험한 뜬구름」). 이것은 시인의 무기이자 장기, 흐르고 쏟아지는 위험을 구체적인 모양으로 단단하게 얼리는 시의 언어다. 이서하가 급속 냉동한 위험은 이제 우리의 손안으로 들어온다. 그것을 쥘 수 있고 집어 들어 주머니에 담을 수 있다. 오래 들여다볼 수 있다. 뜬구름 잡듯 슬퍼하지 않고 건조하고 딱딱한 채로 슬퍼할 수 있다, 이서하는 자신의 소중한 위험 채 집통을 우리 앞으로 밀어준다. 우리 역시 위험을 연구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미리 아는 듯이.
■덧쓰기, 이어 쓰기, 새로 쓰기
시인이 그렇듯, 우리가 가장 자주 맞는 위험-물벼락은 ‘상실’일 것이다. 가장 자주 헛디뎌 빠지는 슬 픔-웅덩이에도 역시 살아가며 잃을 수밖에 없는 갑작스러운 이별과 상실 들이 찰랑이고 있다. 위험 이 내릴까 하늘을 두리번거리며, 슬픔에 빠질까 땅을 샅샅이 보며 걷는 이 느린 걸음의 나날에, ‘조 금 진전 있음’을 알려주는 유의미한 깨달음은 “고독을 면할 길이 없다”(「가장 위험한 녹았다 언 아이스크림」)는 사실이다. 상실은 보이는 것보다 깊은 구덩이다. 얕은 웅덩이인 줄 알고 금세 젖은 발을 털 수 있을 것 같지만 실은 구덩이가 아닌 구멍이어서 영영 빠져나오지 못할지도 모른다. 상실이라 는 구멍을 메우고, 바닥을 만들기 위해 시인은 책을 빌린다. 책의 문장, 책의 두께, 책의 시간과 파편 을 쌓아 상실한 자리의 디딜 곳을 마련한다. 그러다가 남이 쓴 책이 여의치 않으면 스스로 책을 만 들어 낸다. 『파란 하늘』과 『검은색 하늘』(「가장 위험한 전집」, 78쪽)이 그것이다. 상실의 구덩이에서 올려다볼 수 있는 상상의 하늘을 쓰기.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우리에게 새로운 것을 주기도 한다는 사실을 시인은 알고 있다. 독서와 인용은 구덩이로부터 올라오게 하는 사다리가 되고, 전체의 구멍 을 메우는 퍼즐의 마지막 조각이 되고, 상실한 현실을 덧쓰는 새로운 현실이 된다. 시인은 말한다. “이 상실에 대한 경험으로 그에게 새로운 구석 하나를 만들 수 있는 구실이 되었다는 것은 얼마나 기괴한가.”(가장 위험한 감상문, 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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