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힘으로 돈을 벌어 자기 자신을 먹여 살린다는 것
그 혹독하고 숭고한 일에 몸과 마음을 쏟아붓고 있는
우리 모두의 매일매일에 대하여
월급사실주의 소설 동인의
지극히 현실적인 밥벌이 이야기 그 두번째!
동시대 한국사회에서 먹고살기 위해 일하는 보통 사람들의 삶에 대해, 발품을 팔아 사실적으로 쓴다는 규칙을 공유하며 결성된 ‘월급사실주의’ 동인의 단편소설 앤솔러지 『인성에 비해 잘 풀린 사람─월급사실주의 2024』가 출간되었다. 월급사실주의는 우리 시대의 노동 현장을 담은 소설이 더 많이 발표될 필요가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비롯된 한국소설의 새로운 흐름이다. 소설가 장강명에 의해 촉발된 이 움직임은 2023년 첫 앤솔러지 『귀하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출간으로 이어진 바 있으며, 『인성에 비해 잘 풀린 사람』은 이 동인이 내놓는 두번째 결과물이다.
올해 새롭게 월급사실주의 동인으로 합류한 작가는 남궁인 손원평 이정연 임현석 정아은 천현우 최유안 한은형이다. 사회의 단면들을 예리하게 감지해온 작가들이 작심하고 직장을 무대로 써낸 이야기들이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산문으로 뜨거운 사랑을 받아온 남궁인, 천현우 작가가 성공적으로 완성해낸 첫 단편소설이 수록된 점, 『아몬드』 『서른의 반격』 등의 장편소설로 사회적 약자들이 세계와 관계 맺는 다양한 방식을 포착해온 손원평의 최신작을 접할 수 있다는 점이 더욱 기대를 모은다.
책의 제목은 소설가 임현석의 단편소설 제목에서 따왔다. 생계유지를 위해 자신이 가진 시간과 에너지를 내놓아야 하는 노동시장에서 모두가 한 번쯤은 경험했을 인간적인 갈등 관계를 자연스럽게 연상시키는 힘을 지닌 제목이다. 제목이 그러하듯 이 책에 수록된 여덟 편의 단편소설 역시 다양한 삶의 현장을 핍진하게 그려내며 진한 공감을 이끌어낸다. 자기 자신을 먹여 살리기 위해 오늘 하루도 애쓰고 있는 모든 일하는 존재들을 위한 이 책은 5월 1일 근로자의 날에 맞추어 발행된다.
남궁인, 「오늘도 활기찬 아침입니다」
지방 방송국에 공채로 입사했지만 프리랜서로 계약되어 일하는 아나운서 ‘지민’의 하루 일과 이야기. 아침 방송을 진행하기 위해 매일 새벽같이 기상해 열심히 일하지만 직장에서 받는 월급보다 각종 행사로 버는 부수입이 더 높은 여성 아나운서의 삶은 생각보다 화려하지 않다. 하지만 지민은 팬들의 응원과 관심에 기쁨을 느끼고 그것에서 일할 이유를 찾는다. 더 젊은 후배 아나운서들에게 점차 일거리를 내주고, 꾸려나가던 방송 프로그램이 폐지되어도 막을 길이 없고, 퇴근 후에도 SNS 활동을 하며 자기 자신을 홍보해야 하는 고단한 일상을 그리는 이 단편은 TV에 드러나 보이지 않는 방송인들의 낯선 면모를 생생하게 조명한다.
나는 열심히 살고 있었다. 친구들도 모두 열심히 살고 있었다. 부지런히 뉴스를 진행하고 방송을 맡고 행사에서 마이크를 잡고 지인들을 챙겼다. 부지런히 헤어를 고정하고 메이크업을 받고 잠들기 전 내일 의상을 고민하고 인스타를 업데이트했다. 영원한 건 없어도 열심히 할 수 있는 건 있었다. 어떤 미래가 있을지 몰라도 지금 주어진 일은 내가 하고 싶던 것이었다. 꿈을 이룬 사람은 불평해서는 안 되었다.(35~36쪽)
손원평, 「피아노」
어렵게 구한 자가에서 어린이 공부방을 운영하던 ‘혜심’. 여생을 보내고 싶은 집을 찾은 그녀는 갈아타기를 시도하다가 부동산 시장의 농간으로 자가였던 공부방에 세입자로서 살아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분노한 혜심은 공부방을 그만두고 지방으로 내려가기로 결심하고, 중고 거래로 세간을 처분하며 이사를 준비한다. 아이들을 아끼는 마음으로 공부방에 들였던 피아노만큼은 팔기를 망설였지만, 피아노는 팔리지도 않아 결국 폐기물로 처리되어 버려진다. 그런데 어느 날 혜심은 중고 거래 앱에 들어갔다가 자신이 버린 피아노가 버젓이 팔리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피아노 판매자의 집으로 찾아간 혜심은 그 집에서 자신을 많이 따르던 아이 ‘준용’을 마주한다.
공부방에 피아노를 들인 건 혜심의 허영심이 극에 달했을 때였다. 일을 낭만으로 여기고 열정이 돈을 대신할 수 있을 거라 믿었던 시절, 공부방에 공부를 하러 온 아이들도 휴식 시간에 잠깐 피아노를 친다면, 그렇게 아이들의 선율이 공부방을 채운다면 행복할 거라고 생각해서 들였던 피아노였다.
(……) 혜심은 계속해서 피아노를 가져갈 누군가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결국 돈을 내고 폐기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고 있었지만 이왕이면 돈을 받고 버리고 싶었다. 그래야 자신이 피아노에 담았던 순수한 마음이 조금이나마 보상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44~46쪽)
이정연, 「등대」
복어 전문점에서 벌어지는 범죄 스릴러. 전 직장에서 억울하게 해고된 ‘설희’는 유심히 보아둔 복어 전문점에 수습 직원으로 들어가게 된다. 홀과 주방을 오가는 동안 설희는 복어의 독이 얼마나 치명적인지 배운다. 정직원 전환을 앞두고 직접 손님을 맞아 서빙을 하게 된 설희는 복어 전문점의 은밀한 룸들이 불법적인 거래를 위한 장소로 활용되고 있음을 확인한다. 설희가 억울하게 범죄에 연루되었을 때, 식당 직원들은 과연 궁지에 몰린 설희를 보호해줄까? 설희는 전 직장에서 겪었던 상황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룸에서 복어 독을 얻을 방법을 재빠르게 살핀다.
조리실 앞에 음식 카트 넉 대가 줄지어 세워져 있었다. 설희는 빈 카트를 내려다보며 앞날을 그렸다. 발음하기 어려운 테트로도톡신의 위험이 있는 곳에서 일하느니 화를 뿜어내는 사람을 상대하는 게 안전할지 모르지. 위험은 피하는 게 상책이었다. 설희는 복어 독으로 사망에 이른 사고들을 곱씹으며 더이상 직장에서 사람들에게 휘둘려 누명을 쓰는 일은 없을 거라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러다 잠깐 자신을 구석으로 몬 사람들에게 테트로도톡신을 먹인다면 어떨까 하는 공상에 빠졌다.(78쪽)
임현석, 「인성에 비해 잘 풀린 사람」
화장품 프랜차이즈 업체의 본사 영업부에서 일하는 ‘진영’은 본사의 입맛에 맞게 가맹점주를 다뤄나가야 한다. 전혀 잘될 것 같지 않은 입지에 들어선 새 점포를 관리하며 진영은 점주 ‘선영’과 조금씩 교류해나간다. 진영의 눈에 선영은 바보 같고 물정을 모르는 등쳐먹기 좋은 인간이다. 진영은 선배들에게 배운 대로 선영을 구슬리고 압박하면서도 내심 찝찝함을 느낀다. 영업부 회식 날, 본부장은 화장품 가게는 다른 업종에 비해 일이 많지 않아 점주의 불만이 많은 것 같다는 농담을 하고, 주위에 앉은 직원들은 그 농담에 웃는다. 하지만 점주에 대한 배려 없이 철저히 본사의 이익만을 위해 일해야 했던 진영은 그 말에 웃지 않는다.
매뉴얼엔 손님을 어떻게 맞을지만 나와 있다. 회원번호가 없는 상황엔, 피부를 보면서 제품을 추천해야 한다. 하지만 장사는 그런 일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점주들의 하소연을 듣다보면, 언제나 매뉴얼을 넘어서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여기가 혹시 술집이냐고 묻는 주정뱅이가 들어오고, 누군가 매일 새벽에 컵라면을 먹고 문 앞에 놓고 가서 점포 오픈할 때마다 쓰레기를 발견하고, 담배를 꼭 그 앞에서만 피우는 무리가 있고, 정말 저 포스터 모델이 이 브랜드 쓸 것 같냐면서 빈정대는 손님을 마주하거나 테스터 제품 대신 포장이 뜯긴 제품을 뒤늦게 발견하는, 그런 일들이 벌어진다.(118~119쪽)
정아은, 「두 친구」
남편이 직장을 잃는 바람에 졸지에 가장이 되어 간호조무사로 일하기 시작한 ‘지현’은 병동에서 환자들의 잔심부름까지 하고, 간호사들의 눈치를 보고 때로는 혼나기도 하면서 돈을 버는 중이다. 어느 날 신경질적인 환자를 만난 지현은 그 환자가 자신의 중학교 동창 ‘승미’임을 눈치챈다. 예전부터 승미는 사람을 끄는 에너지를 발산해왔고, 지현은 그 에너지에 휘둘리고 싶지 않아 승미와 멀어졌었다. 중년이 되어 다시 만난 승미는 겉으로는 여전히 화려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