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제공 책 소개
“이 눈부신 그림책이 포착한, 낯선 이를 향해 아무렇지도 않게 가하는 폭력과 증오는
도저히 잊혀지지 않아 차라리 고통스럽다.”_가디언지, 2008.5.
보일 수도, 보이지 않을 수도 있는 어떤 ‘장벽’
한 남자가 바닷가에 닿았다. 허름한 뗏목과 함께 파도에 떠밀려 온 벌거벗은 남자는 무력하다. 섬 사람들이 남자를 발견했다. 그가 이곳에 왜 왔을까, 무얼 어쩌려는 걸까, 경계의 눈빛으로 남자를 본다. 누군가 남자를 당장 돌려보내야 한다고 소리치자 마을 사람들이 동요한다. 그러자 어부가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그를 이대로 내보내면 틀림없이 죽고 말 거라고. 바다에는 검은 물결이 세차게 일렁이고 있다. 사람들은 마지못해 남자를 섬 한 구석 염소 우리로 데려간다. 남자를 그곳에 두고, 우리 문에 못질을 한 뒤 사람들은 일상으로 돌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남자가 마을에 나타났다. 사람들은 당황하여 남자를 붙들고 소리를 지른다. 힘도 없고 의사를 전할 능력도 없는 남자는 먹을 것이 필요하다는 뜻을 전하려 애를 썼다. 어부가 나선다. 어찌됐든 섬에 함께 있게 됐으니 자신들이 힘을 합쳐 남자를 도와야 하지 않겠냐고. 마지못해 식당 주인이 돼지들에게 주던 남은 음식을 남자에게 주기로 한다. 남자는 다시 염소 우리로 돌아갔지만 섬 사람들은 밥을 먹을 때도, 술을 마실 때도, 잠을 잘 때도 남자 생각에 사로잡힌다. 아이에게 겁을 주려는 엄마, 학교 선생, 지역의 신문까지도 남자 때문에 자신들이 입은, 아니 입을지도 모르는 피해와 잠재된 공포에 대해 떠들어 댄다. 마침내 사람들은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섬 남자들은 염소 우리로 몰려가서 이방인을 끌어낸다. 그리고 그를 바다로 밀어 보냈다. 어부의 배도 불태워 버렸다. 그리고 섬 둘레에 높은 장벽을 쌓기 시작한다. 꼭대기에 망루를 새우고 지나가는 새마저 모두 쏘아 버렸다. 섬 바깥에 사는 누구도 섬 안의 소식을 들을 수 없게 하기 위하여.
불편한 이야기, 그러나 일상적인 이야기
아민 그레더의 《섬》은 2002년 독일에서 초판이 출간됨과 동시에 독자와 평단의 뜨거운 반응을 불러일으킨 문제작이다. 이 책의 직설적인 언어와 가감 없이 적나라한 묘사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큰 돌을 던졌고, 그것이 만든 파문의 실체는 놀라움, 거리낌, 탄성, 혹은 침묵과 같이 다양하다.
어느 날 섬에 오게 된 한 남자, 그리고 그를 둘러싼 섬 사람들의 소요가 한편의 영화처럼 극적으로 전개된다. 실체 없는 공포가 사람들을 완전히 장악하고, 스스로 몸을 불리며 겉잡을 수 없이 커져 간다. 마침내 섬 전체가 집단적인 광기에 둘러싸인다. 섬 사람들은 그저 자기들과 다른 사람과 함께 있기 싫었던 것뿐인데, 무엇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아니 과연 잘못된 것일까?
책장을 덮은 독자들의 머릿속을 채울 질문은 간단하지 않다. 경계를 넘은 사람, 배타적인 주류 사회,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소수, 팽팽한 대립, 선동, 불안, 전쟁과 파탄, 합리화의 희생양, 그리고 평화를 가장한 더 큰 불안. 어쩐지 익숙한 양상이다.
볼로냐 라가치 상 수상 작가 아민 그레더의 밀도 있는 조형 언어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미지의 존재에 가하는 폭력과 그 기저에 깔린 심리에 대한 아민 그레더의 탐구는 깊고 섬세하다. 아민 그레더는 그림책의 화면이라는 물리적인 공간을 메시지의 전달을 위해 빈틈없이 직조한다. 의도에 따라 정확히 연출된 화면과 감성적인 드로잉은 뭉크, 혹은 캐테 콜비츠의 화법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가 그려 낸 이야기는 어른과 아이를 가릴 것 없이, 태어나자마자 필연적으로 사회의 일원이 되는 모든 인간에게 화두를 던진다. ‘안전하고자 하는 욕망’이 다른 모든 것을 집어 삼킨 시대, 선과 악의 경계가 모호한 시대의 우리들은 누구나 이쪽에 서 있기도, 또 저쪽에 서 있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