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제공 책 소개
작은 식물 하나가 어떻게 대영제국의 재정적 생존을 좌우하고
현대 글로벌리즘 기원의 핵심 역할을 했을까
아미타브 고시는 전작 《대혼란의 시대》 《육두구의 저주》와 동일한 문제의식을 견지한 채 이 책 《연기와 재》에서 ‘아편’이라는 작은 식물을 통해 식민지 지배자인 서구 열강의 악덕과 탐욕을 파고든다. 더불어 식민지 피지배 국가의 존재감과 행위 주체성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그들의 명예 회복에 앞장선다. 그는 이 책 전반에 걸쳐 초지일관 산자이 수브라마니암(Sanjay Subrahmanyam)의 ‘연결된 역사’ 개념과 그가 오랫동안 지켜온 관점에 기대어, “역사적으로 근대성은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퍼져나가는 바이러스가 아니라 전 지구적이고 상호 결합적인 현상”이라고 주장한다.
이 책은 기념비적 연작 소설 이른바 ‘아이비스 3부작’(《양귀비의 바다》 《연기의 강》 《쇄도하는 불》)의 연장선에 놓여 있다. 일련의 과정에서 그는 19세기 선원과 병사 들의 삶이 인도양의 해류뿐 아니라 그 해류가 대량으로 실어 나른 소중한 상품, 즉 아편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크게 놀란다. 하지만 무엇보다 놀라운 사실은 자신의 정체성과 가족사가 그 이야기와 긴밀하게 뒤얽혀 있다는 점이다.
《연기와 재》는 여행기이자 회고록이며, 수십 년 간의 고문서 연구를 기반으로 한 역사 에세이다. 이 책에서 고시는 아편 무역이 영국, 인도, 중국 그리고 세계 전반에 끼친 막대한 영향을 추적한다. 이 무역을 획책한 대영제국은 자국의 거대한 무역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 인도 아편을 중국에 수출했으며, 그에 따른 수입은 제국의 재정적 생존에 필수적이었다. 그 이익에 대해 더 깊이 파고들던 고시는 아편이 세계 최대 기업 중 일부, 애스터와 쿨리지 등 미국의 가장 강력한 가문, 아이비리그, 그리고 현대 글로벌리즘 기원의 핵심이었음을 확인했다.
고시는 《연기와 재》에서 원예사·자본주의 신화·식민주의의 사회문화적 영향 사이를 솜씨 좋게 누비면서, 하나의 작은 식물이 재앙의 가장자리에서 비틀거리면서 우리 세계를 형성하는 데 어떤 역할을 맡아왔는지 파헤친다.
서구 중심의 역사를 비판하고, 늘 제국주의의 그늘에서 핍박받아온 식민지 피지배자의 편에 서고자 하는 저자는 철저한 고증과 끝없는 확인을 통해 역사 논픽션으로서 이 책을 완성했다. 90여 쪽에 달하는 미주는 그의 성실함과 노력을 말해주는 작은 증거일 뿐이다. 냉철하면서도 따듯한 고시의 작품은 그 자체로 감동이다.
서구 중심의 세계관이 서구뿐만 아니라 비서구에까지 스며들다
아미타브 고시는 중국과 국경을 맞댄 인도 서벵골주에서 태어나고 중국인 커뮤니티가 들어선 캘커타에서 자랐지만, 중국의 역사·지리·문화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처음으로 중국을 방문하고 싶다고 생각한 것은 소설 《양귀비의 바다》를 쓰기 시작한 2004년이었다. 1962년 중·인 전쟁의 패배와 이후 중국을 향한 두려움·분노·적대감이 켜켜이 쌓인 때문이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저자는 1962년 전쟁이 중국에 대한 관점을 형성하는 데 어떤 역할을 했을까 자문한 뒤 “중국에 대한 나의 시각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그 나라가 내 인식 속에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나는 이것이 중국뿐만 아니라 세계 전반을 바라보는 특정 시각, 즉 서구만이 지나치게 도드라져서 다른 모든 것을 보이지 않게 만드는 시각이 낳은 결과라고 생각한다”고 고백한다. 즉 서구 중심의 세계관이 서구뿐만 아니라 비서구에까지 스며든 현상에서 원인을 찾는다.
행위 주체성
중국은 우리의 물질적·문화적 삶에서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지만, 그 존재는 종종 주목받지 못한 채 간과되곤 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 질문과 씨름하는 과정에서 저자는, “내 세계에서 중국의 역사적 존재를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한 이유는 그것이 대부분 비언어적이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즉 중국은 대체로 근대사를 서술하는 데 큰 역할을 맡아온 ‘발전’ ‘진보’ 같은 모종의 담론적 개념과 연관되지 않았다.
달리 말해, 서구가 강박에 가까운 단어 및 개념의 정교화를 통해 영향력을 휘두른 반면, 중국은 관행의 확산과 사물을 통해 거의 보이지 않는 미묘한 방식으로 영향력을 행사했다. 사물은 말이 없는 데다 그 자체로 제 존재에 대해 설명하지 않기에, 사물이 실제로 소통하고 있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인식하려면 개념적 전환이 필요하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다. 우리 앞에 놓인 물건들을 모두 사물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 이를테면 ‘차’라고 할 때 찻잔, 쟁반은 분명 사물이다. 그렇다면 차 자체도 사물일까? ‘차’는 다양한 형태로 실재하는 방대한 식물 물질의 복합체다. 즉 하나의 사물이 아니라 끊임없이 진화하고 새로운 표현 방식을 찾아내는 살아 있는 실체로서의 무언가다. 우리가 아무 문제 없이 ‘차’라고 규정했던 것이 모종의 생명력을 지니고 있으며, 눈에 보이든 보이지 않든 무수히 많은 방식으로 제 스스로를 드러내는 생명체라는 뜻이다.
식물을 이런 식으로 바라보면, 인간이 특정 식물과 상호 작용할 때 그 관계가 일방향적인 게 아니라 사람 역시 그 관계에 의해 변화한다는 점을 인정하게 된다.
이는 결코 인간의 역사적 ‘행위 주체성’의 중요성을 축소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이 서로서로와 맺은 관계 속에서 수많은 종류의 비인간 존재를 이용해왔다는 점을 강조한다.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오직 인간에게 우선권을 부여하지 않은 채 역사를 생각함으로써만, 그리고 식물의 역사적 행위 주체성을 인정함으로써만, 차 같은 식물과 관련해 인간이 지닌 의도의 진정한 본질을 인식할 수 있다.
차나무의 씨앗으로 시작하는 이야기
가장 오래된 찻잎은 215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중국 가경제(嘉慶帝)의 무덤에서 발견되었다. 엘리트층의 관례로서 시작된 차 음용은 중국 전역으로 삽시간에 퍼졌으며, 중세 초기에 이르러 광범위하게 확산했다.
중국 차는 찰스 2세(Charles II)의 아내 캐서린(Catherine of Braganza)에 의해 영국에 도입되었다. 영국에서 차 마시는 문화는 순식간에 인기를 누렸으며, 영국이 인도에 제국을 구축하기 전인 18세기 초에 이미 중국 차는 영국 경제의 중요한 교역품으로 자리 잡았다.
18세기와 19세기 대부분 시기에 걸쳐 차에 부과한 세금은 영국 세수의 10퍼센트를 육박했고, 차가 영국 경제에 안겨준 혜택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영국 상선 대부분은 중국에서 영국으로뿐 아니라 영국에서 여러 식민지로까지 차를 실어 나르는 데 관여했다. 요컨대 산업혁명의 대부분 기간 동안 영국 정부의 재정은 차에 크게 의존했는데, 그 대부분을 중국에서 수입했다.
문제는 영국이 그 대가로 중국에 판매할 게 별로 없었다는 점이다. 중국인은 대부분의 서양 제품에 관심이 없었을뿐더러 필요성도 거의 느끼지 않았다. 이는 여러 가지 이유에서 영국을 짜증나게 만들었다. 그중에는 금전적인 이유가 아닌 것도 포함되었다. 그러나 서양인에게 더 시급한 고민은 중국 상품을 수입할 때 대개 은으로 그 값을 치러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무역 불균형으로 인해 막대한 양의 은이 서양에서 중국으로 흘러 들어갔다.
이 문제에 대한 간단한 해결책은 인도에서 차 재배를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러던 차에 인도 북동부에서 카멜리아 시넨시스라는 품종이 자생한다는 사실은 영국 관리들의 주목을 끌었다. 인도에서 식민지 차 산업은 처음부터 철저하게 중국의 전문 지식과 노동력 그리고 “중국 대리인”에 의존했다. 영국이 중국으로부터 차용하지 않은 것은 차를 생산하는 방식인 소작 형태였다. 인도에서 차는 주로 백인 농장주가 소유한 광활한 농장에서 땀 흘려 일하는 계약직 노동자들의 반(半)자유 노동에 의해 재배되었다.
인도 아대륙에서 차 산업은 느리게 시작되었지만 빠른 속도로 발전해 수출량이 이내 중국을 앞질렀다. 대영제국의 차가 우위를 점한 것은 결정적으로 중국 차는 더럽고 비위생적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