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전반에 지성적 자극을 준 대학자 얀 아스만
문화사 인식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
역사학을 뛰어넘는 학문적 성취
독일의 이집트 학자이자 문화사학자, 종교학자인 얀 아스만 교수의 이름이 낯선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1980년대 이래 아스만 교수처럼 인문학 전반에 걸쳐 지성적 자극을 준 학자는 드물다. 그는 인문학과 사회과학에 걸쳐 다양한 학제 간 연구를 모범적으로 실천했으며 평생 25권의 저서를 출간해 역사학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2024년 2월 19일 85세로 별세했을 때 여러 나라에서 많은 부고 기사가 쏟아진 것이 그의 학문적 위상을 보여준다. 그 핵심인 문화적 기억 이론은 역사학으로만 한정해도 진위 구명에 방점이 찍힌 실증적 연구에 균열을 내면서 그 외연을 넓히는 데 기여하고 있다.
전통과 과거 혹은 역사와 신화를 포괄하다
문화적 기억이란 말 그대로 문화적으로 창출된 기억이다. 집단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기대와 희망이 그 속에 담겨있다. 이 책은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고대 이래 그것이 어떤 메커니즘을 통해 형성, 발전, 변이, 망각, 재생되었는지, 그것이 어떤 기능을 수행해 왔는지, 그리고 그것이 핵심 고대문명의 발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등을 고찰한다.
무엇보다 아스만은 초창기 문명의 형성 및 발전 과정을 이끈 다양한 문화적 요소 중, 우리가 전통, 과거 혹은 역사의식, 신화적 세계관, 자기 인식 등으로 부르는 모든 것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문화적 기억”을 제안한다. 나아가 고대문명의 성쇠와 밀접하게 연관된 그러한 문화적 요소들을 역사/신화전설의 이분법적 틀을 넘어서 문화적 기억의 관점에서 재해석한다. 국내외의 많은 연구자가 고대보다는 근현대의 사례들에서 문화적 기억의 다양한 양상을 추구하듯이, 그의 이론은 실상 시대를 초월하여 적용되고 있다.
카논(경전)의 성립에서 유지, 발전으로 본 문명사
아스만은 모리스 알박스가 제시한 “집단기억”을 “소통적 기억”과 “문화적 기억”으로 구분한다. 대략 80년을 넘지 않은 동시대인이 공유한 기억인 소통적 기억과 달리, 문화적 기억은 다양한 기억술을 동원하여 수천 년까지도 거슬러 올라가며 현재와 미래의 희망을 담아 조성한 구성적 기억이다. 과거를 원래 그대로 보존할 수 없는 문화적 기억은 신화와 역사 사이의 구분 없는 기억된 역사일 뿐이다.
아스만은 이러한 문화적 기억의 연결구조에서 문자와 글쓰기 문화의 역할을 가장 강조한다. 초창기 문자는 수백 년 동안 일상생활 문서로 사용되다 다양한 장르의 문학성 문헌을 분출한다. 이들 중 일부가 중요성을 인정받아 고전의 일종으로 자리 잡은 이후, 정치‧문화‧종교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일자 일획도 고칠 수 없는 경전이 출현한다. 이 책의 후반부는 고대문명 각각의 경전이 형성, 유지, 발전되는 다른 양상이 고유한 문화적 기억과 정체성을 낳아 그 성쇠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음을 논증한다.
시대와 지역을 초월한 역사 해석의 틀
그런데 그 경전이 반드시 문헌일 필요는 없다. 아스만은 예컨대 20세기를 이끈 핵심 동력인 민족주의나 마르크스-레닌주의, 반공, 페미니즘 등도 재경전화된 양상으로 주목한다. 많은 사회가 그러한 다른 경전을 만들어내고 내면화하는 과정의 차이로 인해, 다른 방식으로 기억 문화를 빚어내며 각각 다른 정체성을 유지했다는 것이다.
문화적 기억의 관점에서 한국사와 한민족 정체성을 되돌아보면 어떤 새로운 그림이 나타날까? 역사와 신화전설이 뒤섞인 교과서 버전 거대 고조선 서사는 문화적 기억의 전형인가? 그 고조선을 필두로 만주에서 한반도에 이르는 여러 정치체를 아우르며 통일신라까지 이어지는 매듭 많은 단선적 고대사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일연의 《삼국유사》에서 신채호의 민족사학을 거쳐 20세기 후반 완성된 단선적 고대사를 가능케 한 문화적 기억의 연결구조는 무엇일까? 21세기 한국의 경제적, 문화적 발전에 일조했을 한민족 정체성을 추동한 문화적 기억의 경전이 있었을까?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우리 학계의 성숙도를 보여주는 기억 연구 기반
1부 이론적 성찰과 2부 사례 연구로 나뉜 책의 구성은 독특하고 문체는 난해하다. 하지만 고대 근동사와 고대 중국사 전문가인 역자들이 힘을 합친 이 번역서의 출간은 비록 늦은 감은 있지만 우리 학계의 성숙도를 보여준다. 사실 그의 문화적 기억 이론은 서양사 학자들에 의해 2000년대 초반 국내에도 본격적으로 소개되었다. 이후 경북대학교 변학수 교수가 얀 아스만의 《이집트인 모세: 서구 유일신교에 새겨진 이집트의 기억》(그린비, 2010)과 함께, 그의 부인 알라이다 아스만의 《기억의 공간: 문화적 기억의 형식과 변천》(그린비, 2011)까지 번역 출간한 바 있다. 이제 그 원조 격인 이 책이 번역, 출간되어 더욱 탄탄한 기억 연구의 기반을 갖추게 되었으니 우리 역사학계를 위한 반가운 선물이라 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