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정치는 왜 끝없이 타락하는가?
정치는 왜 자본의 도구로 전락하고 말았는가?
‘시장’과 ‘경제’ 배후에서 민주주의를 갉아먹는 위험한 세력,
‘극단적 중도파’는 누구이며 어떻게 탄생했는가?
요즘 한국은 그야말로 극심한 몸살을 앓는 중이다. 이른바 최순실 사태로 시작된 국정 혼란으로 나라 전체가 총체적 패닉 상태에서 쉽사리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몇 년간 시민들이 겪어온 모든 비합리적이고 비정상적인 정치적 결정들의 실체가 밝혀지던 순간의 충격이 아직도 완전히 가시지 않았다. 이 상황에서 대부분의 언론과 여론은 (비판의 세부적인 맥락은 다를지라도) 한목소리로 박근혜 체제에 격렬한 비판을 가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모든 흐름에 근본적인 질문 하나가 빠져 있는 것은 아닐까? 지금의 이런 혼란 및 정치적 부패의 정황들은 흔히 박근혜 정부의 문제, 좀 더 넓게 보면 이명박 정부 시절부터 시작된 보수 정권 10년의 문제로 인식된다. 헌데 이것이 과연 보수 정권만의 문제일까? 물론 국정 혼란과 정치적 부패는 항상 어떤 정권의 특수한 문제점과 결부되어 있으며 그런 점에서 박근혜 정부가 유례없는 특수성을 보여준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문제는 실로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역자의 설명대로, 신자유주의적 합의를 수용했다는 점에서만큼은 진보 정권 역시 그들과 공통된 혐의를 띤다. 결과적으로 양 정권이 별반 다르지 않은 정책을 답습해왔음을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특히 민주화 이후 가장 개혁적인 정부로 여겨졌던 노무현 정부가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무비판적으로 추종하면서 실패한 것은 여러 모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국판 극단적 중도파 대연정은 이미 오래전에 시작된 것이다.
대선 레이스의 중도론 유행, 어떻게 볼 것인가?
이렇듯 좀 더 시야를 넓혀보면, 현대 사회에서 정치가 전반적으로 소멸해가는 근본 이유가 결코 특정 정권의 부패 때문은 아니라는 사실을 마주하게 된다. 이런 맥락에서, 시기가 앞당겨질 것을 대비하여 가동된 최근의 대선 레이스는 최순실 사태만큼이나 의미심장하다. 대선 구도에서 두드러지는 점 중 하나가 바로 ‘중도론’이기 때문이다. 특히 박근혜와 친박 세력을 비판하며 나오는 목소리들 중엔 중도파(중도우파, 중도좌파) 혹은 (개헌론을 중심으로 한) 제3지대가 자리 잡아야 한다는 의견이 적지 않다. 게다가 “경제는 진보, 안보는 보수”라는 중도정당 노선을 내세운 안철수와 중도우파를 표방한 반기문의 ‘제3지대’ 연합 구축을 외치는 목소리마저 등장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처럼 중도론이 꽤나 우세한 것을 보면, 차기 대권에서도 ‘탈신자유주의적 비전’을 모색하는 길은 요원해 보인다. 핵심은 결국 좌든 우든 극성향을 지양하고 중도를 지향하자는 것인데, 이러한 목소리들의 요체는 도대체 무엇인가? 또한, 중도는 정말 그 이름에 걸맞게 중앙에서 균형을 추구하는 세력인가? 앞서 언급했듯,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이 이 책 《극단적 중도파》가 말하고 있는 핵심이다.
타리크 알리, 현대 정치의 고질병을 진단하다
타리크 알리의 책 《극단적 중도파》는 현대 정치에 내재한 이런 뿌리깊은 질병을 추적하는 작업이자 그에 맞서 대안을 모색하는 시도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정권 내지는 정당의 교체로 해소되지 않는 좀 더 심층적인 고질병이 자리 잡고 있음을 간파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민주 대 반민주 혹은 개혁 대 수구와 같은 전통적인 이분법을 고수하는 방식으로는 국내 및 세계 정치가 나아가고 있는 전체적인 방향을 파악할 길이 없다. 타리크 알리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자신이 ‘극단적 중도파’라고 명명하는 세력을 통해 구체화한다.
‘극단적 중도파’는 “사회 정치체제의 중심축(신자유주의)이 다른 어딘가로 조금이라도 움직이지 못하게 가로막는 정치 세력”을 가리킨다. 이 명칭은 특정 세력을 시사하는 듯한 인상을 주지만(그리고 그것이 사실이지만), 동시에 현 시대를 짓누르고 있는 거대한 압력이 무엇인지를 직시하게 하는 유의미한 틀이기도 하다. 좀 더 들여다보면, ‘극단적 중도파’라는 명칭 자체가 흥미롭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극우’나 ‘극좌’만 있는 게 아니라 ‘극중앙’도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중앙’이란 현재 형성돼 있는 세력 관계 속의 합의 혹은 균형”을 말하며, “지난 수십 년간 이 ‘중앙’이란 다름 아니라 신자유주의 합의였다”. 다시 말해, ‘극단적 중도파’란 신자유주의라는 축을 절대 교리로 삼아 왼쪽이든 오른쪽이든 그로부터의 어떤 이동도 용납하지 않는 강경한 정치 세력이다. 타리크 알리는 이러한 중도 세력에 ‘극단적’이라는 수사를 추가함으로써 중도가 결코 균형을 지향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폭로한다. 이들 개개인은 사적 이윤을 극단적으로 추구하면서도, 신자유주의 체제에 의문을 던지거나 최소한의 공공 영역을 수호하려는 모든 시도들을 구시대적 유물로 간주하여 비난한다. 이런 시장 극단주의야말로 이들의 강력한 이데올로기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에서 타리크 알리는 사회주의 몰락 이후 영국(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의 정치 상황을 집중적으로 서술하면서 ‘극단적 중도파’가 어떻게 출현했고 현재와 같은 주요 정치 세력으로 발전하게 되었는지를 추적한다. 분석의 또 다른 큰 축은 유럽연합 그리고 워싱턴 DC의 지구 자본주의 및 군사적 제국주의의 메커니즘을 겨냥한다. 특히 미국은 정치·경제·군사를 비롯한 모든 영역에서 세계 패권국이며, 미국이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는 나라는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여전히 중요하다. 물론 본문에서도 언급되듯, 최근 들어 경제 위기에 바탕을 둔 미국 쇠퇴론이 빈번하게 등장하고 있다. 하지만 타리크 알리는 이런 쇠퇴론이 희망 섞인 관측에 지나지 않는다고 판단한다. 그는 워싱턴 체제가 기울고 있다는 허무한 낙관론에 맞서 미국 권력에 대한 철저한 분석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혹자는 세계 정치에 대한 알리의 분석이 한국의 현실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다. 하지만 분석 대상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것이 한국에서도 진행 중인 엄연한 현실이거나 닥쳐올 미래상이라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다. 특히 의료민영화는 최근 ‘박근혜-차움병원-최순실’ 연합을 통해 상세히 폭로된 바 있고(다른 부문들의 민영화/사유화는 말할 필요도 없다), 미국의 지구적 군사 권력 역시 지난여름 한반도를 뜨겁게 달군 ‘사드 배치’를 통해 구체적으로 체감되고 있는 현실이라 할 수 있다.
사회주의 몰락과 ‘극단적 중도파’의 탄생
이른바 ‘극단적 중도파’는 이렇게 개혁 혹은 수구라는 이분법이 무너져내린 현대 정치의 상황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타리크 알리에 따르면, 이 수치스러운 탄생은 베를린 장벽의 붕괴로 상징화된 사회주의의 추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사회주의가 붕괴한 후, 적대 세력을 손쉽게 물리치게 된 자본주의는 완전한 승리를 구가하게 되었고, 최소한의 수준에서나마 진보적 구상을 모색하는 것이 정치적 의제에서 사라졌다. 즉, 자본주의가 체제를 독식하자마자, 민주주의는 곧바로 황혼기에 접어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서유럽의 사회민주주의는 별다른 비전을 제시하지 못했고, 자신들을 뽑아준 유권자들에게 그 어떤 효과적인 정책도 제시해줄 수 없다는 무력함만을 재차 확인했다. 그리고 이들은 곧 신자유주의라는 대세와 제국주의 전쟁의 요구에 기꺼이 굴복했다.
오늘날 세계 도처에서 발생하는 경제적 불평등과 공적 영역의 붕괴가 바로 그러한 대전환의 결과라 할 수 있다. “실업 혹은 반半실업, 가계 부채, 무주택 신세, 이에 더해 각종 서비스(보건, 교육, 공공주택, 대중교통, 공영방송, 저렴한 공공요금 등) 이용 가능성 축소와 삶의 질 저하 등이 그것이다.” 미국, 즉 워싱턴 DC가 주도한 이 일련의 과정은 우리에게 흔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