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성

케이트 쇼팽 · 소설
32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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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후반의 미국 남부 사회를 배경으로 자신의 진정한 자아를 찾고 영혼의 자유를 추구하기 위해 애쓴, 여주인공 에드나의 삶과 죽음을 이야기하는 케이트 쇼팽의 소설. 한 남자의 아내로서도 아닌, 아이들의 엄마로서도 아닌, 무엇보다 먼저 자기 자신한테 솔직하고 싶었던 여자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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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책 소개

이 명박한 세상을 여자가 느껴 깨칠 때, 각성The awakening ■ ‘인습과 편견의 평원 위로 날아오르려는 새’들을 위하여 이 소설은 19세기 후반의 미국 남부 사회를 배경으로 자신의 진정한 자아를 찾고 영혼의 자유를 추구하기 위해 애쓴, 여주인공 에드나의 삶과 죽음을 이야기한다. 한 남자의 ‘아내’로서, 그리고 두 아들의 ‘엄마’로서 에드나는 겉보기엔 남부럽지 않은 물질적 풍요와 안락한 생활을 누리며 산다. 하지만 그 이면엔 고독한 삶이 감춰져 있다. 이러한 삶의 비극은 우선, 에드나 자신이 ‘남편의 헌신적인 사랑을 받고 현실 세계에서 어느 정도 품위를 유지하며 살기 위해 낭만과 꿈의 세계로 가는 문을 굳게 닫고’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결혼을 한 그 선택에서 파생한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 문제는, 한 사람의 여자를 인격을 지닌 의지적 주체로 보지 않고 남편의 소유물로 보는 남성 중심의 권위적이고 억압된 가부장적인 결혼 제도에 있다. 19세기 후반인 그 당시만 해도 ‘자아’, 특히 ‘여성의 자아’는 불확실하고 낯선 개념이었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주제가 아니었다. 그렇더라도 이 소설은 미국 문학사에서 여성의 자주적인 삶을 진지하게 탐구한 최초의 소설로, 동시대의 여느 사람들을 앞서는 통찰력 있는 의식을 제시한다. 그렇기 때문에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작가 케이트 쇼팽이 페미니즘의 선구자로 부각되면서 이 작품의 의미가 재평가된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여주인공인 에드나 폰텔리에는 남편 레옹스 폰텔리에와 함께 그랜드 아일에서 휴가를 보내는 동안 거기서 많은 사람과 교류한다. 그중 아름다운 아델 라티그놀레 부인은 현모양처의 전형이라고 할 정도로 남편을 공경하고 손에서 늘 바느질감을 놓지 않으며 아이를 낳는 일을 인생의 축복으로 여긴다. 그런 라티그놀레 부인은 에드나에게 아내와 어머니의 바람직한 역할이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일깨우려고 한다. 그에 반해 라이즈 양은 개성과 자기주장이 강하고 사교성이 부족한 독신 여성으로, 직업이 피아니스트다. 라이즈 양은 사회적 관습과 체면에 얽매이지 않고 사회적 인정과 지지를 중요시하지 않는 만큼 사람들의 외면과 멸시 속에서 고독한 삶을 살고 있다. 이 두 여인은 서로 대비를 이루는 삶을 살며 에드나의 양 극단에 서 있다. 한편, 에드나는 별장 여주인의 아들인 로버트를 만나 급기야 깊은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로버트는 다른 사람의 아내인 에드나와의 사랑을 결코 이룰 수 없다는 걸 깨닫고 멕시코로 갑자기 떠나버린다. 그렇게 여름휴가가 끝나고 뉴올리언스로 돌아온 에드나는 예전과 전혀 다른 삶을 살기 시작한다. 진정한 삶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자신의 영혼에서 울리는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랜드 아일에 머무는 동안 로버트와의 사랑이 계기가 되어 정신적으로 새로운 눈을 뜨게 되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그동안 남성 지배 이데올로기에 잠식당한 삶을, 자신의 열정과 꿈을 망각한 채 사회적 관습에 속박되어 다른 사람들의 시선과 평가에 예민한 삶을 살아왔으며, 그 길고긴 꿈에서 마침내 깨어났음을 깨닫는다. 그리하여 ‘자신을 옥죄던 사슬에서 벗어난 듯한 홀가분함을 느끼고’ 자신이 중심이 아닌 타자 중심의 삶에 비로소 권태를 느낀다. 그래서 에드나는 자기를 억압하던 일상의 법칙들을 하나씩 거부하기 시작한다. 그 첫 걸음으로 화요일마다 마치 종교 의식처럼 손님들을 접대하던 행사를 과감히 중단한다. 이런 에드나의 변화를 남편이 탐탁지 않게 여기는 것은 당연했다. 레옹스 폰텔리에는 그 누구보다도 사회적 위계와 평판에 신경 쓰고, 지위와 효용성을 척도로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에드나는 집단의 인습과 편견을 거부하고 자신이 중심이 된 삶, 자신의 영혼과 교감하는 삶을 살기 위해 꾸준히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간다. 책을 더 가까이하고, 산책을 하루의 중요한 일과로 삼으며, 백일몽도 즐긴다. 그러는 동안에는 자기만의 세계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편견과 어리석음으로 가득 찬 세상과 점점 더 멀어진 채 스스로 고독을 기꺼이 즐기며 마비되었던 감각이 더 예리하게 살아나는 걸 느낀다. 그리하여 예술적인 창조성을 한껏 발휘해 자신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그림 그리는 일에 몰두하고, 남편이 뉴욕으로 장기 출장을 떠난 사이 작은 집으로 거처를 옮겨 경제적 독립을 꾀하며 온전한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어간다. 자유로운 정신과 영혼을 추구하는 삶이 그동안 누리지 못한 새로운 차원의 행복과 만족감을 주었기 때문에 에드나는 얼마쯤 경제적 빈곤과 사회적 소외를 감수할 만한 각오가 되어 있었다. 더불어 강한 개성을 소유하고 마치 사람들의 편견과 어리석음을 비웃듯이 세상의 흐름에 초연한 라이즈 양과 자연스럽게 깊은 교류를 한다. 반면 라티그놀레 부인의 사는 모습에서 에드나는 생의 열정이 빠진 듯한 권태로움을 느낀다. 그렇지만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아가는 대가로 고독과 빈곤 속에서 사는 라이즈 양의 삶을 자신의 이상향으로 여기지도 않는다. 의무와 구속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삶을 영위하기 시작한 에드나에게 로버트와의 사랑을 이루는 데 걸림돌이 될 만한 것은 없어 보였다. 사교계에서 유명한 자유 연애주의자 알세 아로빈과 교제를 하면서 육체적으로도 눈을 뜨자, 로버트에 대한 갈망은 한층 더 깊어져간다. 그러던 어느 날 로버트가 멕시코에서 돌아오고, 에드나는 자신의 열정이 이끄는 대로 로버트와의 사랑이 결실로 맺어지길 간절히 바란다. 하지만 로버트는 여전히 갈등하며 머뭇거리다가 끝내 영원한 작별을 암시하는 쪽지를 남기고 다시 사라진다. 로버트가 떠났을 때, 에드나는 절망감을 느낀다. 그리고 곧 이런 사실을 깨닫게 된다.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는 로버트가 지금 당장 떠나지 않았어도 ‘로버트 역시 그리고 로버트에 대한 생각도 언젠가 자신을 홀로 남겨두고 자신의 존재 밖으로 사라져버릴 때가 오리라’는 것을. 결국엔 이 사랑도 단지 하나의 망상일 뿐이라는 사실을 자각한다. 또 에드나는 ‘아이들마저 자신을 압도하는 적대자들처럼 느낀다. 자신을 제압해서 남은 생을 영혼의 노예로 만들어버리고자 하는.’ 예전처럼 남편의 곁으로 돌아가 또 다시 자신의 영혼이 잠식당하는 삶을 살 수도 없었다. 고립무원의 느낌에 강하게 사로잡힌 나머지 생존의 위기마저 느낀다. 자신의 영혼과 정체성이 다른 외부의 힘에 의해 제압당하는 것은 에드나에게 생존이 걸린 문제가 된 것이다. 이렇듯 세상 그 어디에도 구원을 받을 데가 없다는 뼈저린 절망감 속에서 에드나의 발길이 닿은 곳은 바로 바다다. 이 소설에서 바다는 자유와 해방의 상징이다. 에드나는 작년 여름 그랜드 아일의 바다에서 누구의 도움 없이 수영을 할 수 있게 되면서 처음으로 자신이 스스로 무언가를 해냈다는 성취감과 아울러 타인의 속박에서 해방된 듯한 자유를 만끽했다. 그 다음 날에는 자신을 옥죄던 쇠사슬에서 풀려난 듯한 해방감을 마구 분출하듯이 배를 타고 먼 바다까지 나아갔었다. 바다는 에드나가 새로 태어난 곳이었다. 에드나는 다시 그랜드 아일의 바다 앞에 서서 파도에 몸을 내맡기고 관능적인 감촉을 느끼며 거침없이 헤엄쳐 앞으로 나아간다. 에드나의 자살을 암시하는 이 마지막 장면은 한편으로 한 여성이 세상과 부딪치며 자아를 실현해나가는 삶이 19세기 후반 청교도 중심의 미국 사회에서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는지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삶에서 참된 것과 진실한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고, 자신의 영혼이 감동할 수 있는 일을 도모하며, 가슴 속의 열정을 불사르기 위한 노력은 그 자체로 가치 있는 시도일 것이다. 중심 없이 세상의 흐름에 따르다보면 스스로 삶에 표류당하고 만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스스로 확신하지 못하고 외부에서 실마리를 찾는 삶은 무의미하고 무가치하다. 끊임없이 자신이 자신을 창조하는 삶이야말로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삶이다. 케이트 쇼팽이 이 작품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바로 이런 사실들일 것이다. 곧, 궁극적으로 자신을 더 진실하고 분별 있게 이해하고 창조의 의욕을 불태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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