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설 엿보기
벤야민(W. Benjamin)은 「생산자로서의 저자」에서 현대 작가의 가장 긴요한 과제를 “작가가 자신이 얼마나 가난한지를 깨닫는 것, 그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기 위해 그가 얼마나 가난해져야만 하는지를 인지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가난의 다른 이름은 궁핍 혹은 결핍이다. 자신과 세계의 궁핍을 보지 못하는 시인은 시인이 아니다. 자신과 세계의 가난을 깨닫는 것이야말로 시의 출발이고, 그런 출발을 하기 위해서 시인은 누구보다 “가난해져야만” 한다. 물론 여기에서 말하는 가난이란 물질적 가난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시인이라고 해서 왜 경제적으로 없이 살아야만 하겠는가. 벤야민이 말하는 가난은 궁핍에 대한 ‘민감한 인지의 상태’를 의미한다. 시인은 예민한 안테나로 자신과 세계의 헐벗음을 포착한다. 이 포착의 순간, 자아와 세계는 문제적인 것(the problematic)이 되며 시인은 문제적인 사유를 시작한다. 가령, 왜 존재는 빈 구멍으로 가득한가. 세계는 왜 존재들의 행복으로 충일하지 않은가. 이 시집의 제목처럼 “세상의 두근거림은 다 어디로 갔을까”. 시인이 세계의 궁핍을 따지듯 건드릴 때 비로소 시적 사유가 시작된다. 이처럼 가난, 혹은 가난에 대한 인지야말로 시인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기” 위한 전제 조건이다. 그러므로 횔덜린(F. Holderlin)이 말하는 “궁핍한 시대”란 시인을 필요로 하는 모든 시대이다. 시인은 궁핍한 시대에 궁핍이 없는 시대를 꿈꾼다는 점에서 반시대적이다.
손영희 시인의 이 시집은 제목에서 이미 드러나다시피 중요한 어떤 것들이 사라진, 그리고 사라지고 있는 세계에 관한 질문과 성찰로 이루어져 있다. 소수의 영웅이 세계의 주인이 아닌 것처럼, 세계는 거대 서사의 콘텐츠만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세계의 궁핍은 “쓰잘데없이 고귀한 것들”(도정일)의 부재 때문에 생긴다. “고귀한 것들”의 리스트를 “쓰잘데”만으로 작성하는 자들은 쓰잘데없는 것들의 고귀함을 모른다. 세계는 크기나 부피만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다. 아무런 영향력도 없을 것 같은 작은 것들의 끝없는 연쇄가 세계를 만든다. “흙덩이 하나가 바닷물에 씻겨 내려가도/유럽의 땅은 그만큼 작아진다”는 말은 시인 존 던(J. Donne)의 엄살이나 허풍이 아니다. 쓰잘데없는 존재는 없다. 다만 쓰잘데없어 보이거나 쓰잘데없다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존재만 있을 뿐이다. 손영희 시인은 이 시집에서 우리를 궁핍하게 만드는, 우리를 가난하게 만드는 것들의 목록을 작성한다. 그것들은 쓰잘데없어 보이지만 고귀한 것들의 목록이다.
느티나무 정자가 하루 종일 성업이다
노숙을 자처한 살림살이도 한몫하는
딱 한 평 저승꽃 만발한 마을 속의 섬
저 명품에 끼지 못한 어정쩡한 나는
발치에 걸터앉아 귀동냥 삼매경인데
느티가 저녁이 가깝다며 그늘을 거둔다
― 「느티나무 정자」 전문
“딱 한 평”밖에 되지 않는 “느티나무 정자”는 “저승꽃 만발한” 노인들로 “하루 종일 성업이다”. 노인들은 평생의 에너지를 거의 다 소진한, 이제 특별히 할 일도 없는, 어찌 보면 가장 비생산적인 존재들이다. 시인의 시선은 이렇게 ‘쓰잘데없는’ 존재들에게 가 있다는 점에서 효용성과 생산성을 중시하는 근대성의 대척점에 있다. 근대성이 존재의 ‘쓸모’를 따진다면, 시적인 것은 ‘쓸모’와 무관한 다른 것을 찾는다. 화자는 생산성 바닥인 “저승꽃”들을 “명품”이라 높이고, 자신을 그것에 “끼지 못한 어정쩡한” 존재로 낮춘다. 화자가 하는 일은 쓰잘데없지만 고귀한 존재들의 “발치에 걸터앉아” 그들의 이야기를 “귀동냥”하는 것이다. 그러나 텍스트의 어디에도 왜 그들이 중요한 존재인지에 관한 직접적인 언급이 없다. 심지어 “느티나무 정자”는 마을에서도 분리된 “섬”이다. 그러나 그곳엔 죽음이 가까워지도록 한 마을에서 함께 살아온 사람들의 소중한 공동체가 있다. 근대의 개인적 삶(가령 이 시에서의 젊은 화자의 삶)이 공동체적 층위에서 떨어져 나온 것이었다면, “명품”인 노인 세대의 삶은 개인과 사회적 층위가 촘촘히 얽혀 잘 구분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너의 삶은 나의 삶이었고, 나의 삶은 너의 삶이었다. 그들은 먼 옛날부터 다 늙어 죽음을 앞둔 지금까지 늘 ‘함께’ 지내왔다. ‘함께’야말로 이들 삶의 모토이다. 거대한 그늘을 만들어 이 작은 공동체를 지속 가능케 한 “느티나무”는 이 명품 공동체의 오랜 역사를 암시하는 상징물이다. 그것은 수백 년의 역사를 통해 이 마을에서 일어난 온갖 개인사/사회사를 지켜봐 왔으며, 지금도 거대한 품으로 그런 삶을 살아온 개체들을 품고 있다. 공동체가 깡그리 깨져버린 시대의 시적 화자가 “귀동냥 삼매경”을 하는 것은 바로 이 오래된 공동체 혹은 이 오래된 미래의 지혜이다.
― 오민석(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