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 이상이 모여

김유림님 외 2명
24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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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방식으로, 그리고 여전히, 책과 출판이 “셋 이상이” 모일 수 있는 기회라고 말하는 책이다. 작가마다 자신의 공간을 할당받는 일반적인 선집의 형태와 달리, 이 책은 주차 별로 편집되었다. 1주 차에 영화에 대한 것은 아닌(강보원), 4주 차에 우린 집에 돌아갈 수 없어(나일선)가 합류하고, 7주 차에 이르면 계획시집(김유림)까지 세 종의 글이 모인다. 이것은 주제의 변주도 응답도 아니지만, 17주 차까지 세 종의 글은 서로를 압박하거나 배려하거나 무관심한 채로 이어진다. 18주 차에 강보원이 퇴장하고, 20년 8월 19일에 이르러 김유림의 시만으로 책이 맺어질 때, 우리가 어떤 순수함을 기대할 수 있을까? 좌철로 제본된 책의 흐름 속에서 강제적으로 만난 세 편의 글은 그러나 읽는 존재인 당신과 함께 자율적으로 변화한다. 그것이 작가의 이름보다 진행되는 시간에, 셋이라는 숫자에, “모여”라는 명령문에 집중해야 하는 이유이며, 다음의 소개글은 따라서 책의 해설이라기보다 이 책의 독자가 남긴 하나의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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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영화에 대한 것은 아닌 9-197 우린 집에 돌아갈 수 없어 31-227 계획시집 84-239 출판선언문 240-243 웹 페이지

출판사 제공 책 소개

세 개 이상의 시간, 세 개 이상의 세계 1894년, 프랑스의 작가 겸 출판업자 우잔느는 인쇄의 죽음을 이야기했지만, 여전히 우리는 읽을 필요에 시달리며 2019년 기준 65,432권의 새로운 책이 우리의 시달림을 연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몇 개의 세계에 살고 있을까? 2020년, 한국에서는 온라인 문학 플랫폼 '던전(d5nz5n.com)'이 만들어졌고 평론가 강보원, 소설가 나일선, 시인 김유림이 각기 에세이, 소설, 시를 연재했다. 다사다난한 20년 봄부터 겨울까지, 몇 개의 시간이 존재했을까? 이 책은 웹의 공간에서 인쇄물의 공간으로 넘어왔지만 스스로를 기념품에 불과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 책은 또 다른 방식으로, 그리고 여전히, 책과 출판이 “셋 이상이” 모일 수 있는 기회라고 말한다. 작가마다 자신의 공간을 할당받는 일반적인 선집(Anthology)의 형태와 달리, 이 책은 주차 별로 편집되었다. 1주 차에 영화에 대한 것은 아닌(강보원), 4주 차에 우린 집에 돌아갈 수 없어(나일선)가 합류하고, 7주 차에 이르면 계획시집(김유림)까지 세 종의 글이 모인다. 이것은 주제의 변주도 응답도 아니지만, 17주 차까지 세 종의 글은 서로를 압박하거나 배려하거나 무관심한 채로 이어진다. 18주 차에 강보원이 퇴장하고, 20년 8월 19일에 이르러 김유림의 시만으로 책이 맺어질 때, 우리가 어떤 순수함을 기대할 수 있을까? 좌철로 제본된 책의 흐름 속에서 강제적으로 만난 세 편의 글은 그러나 읽는 존재인 당신과 함께 자율적으로 변화한다. 그것이 작가의 이름보다 진행되는 시간에, 셋이라는 숫자에, “모여”라는 명령문에 집중해야 하는 이유이며, 다음의 소개글은 따라서 책의 해설이라기보다 이 책의 독자가 남긴 하나의 기록이다. 영화에 대한 것은 아닌 “진지한 작가라면 에세이는 쓰지 않는 법”이라던 강보원은 에세이를 썼으며 “영화에 대한 것은 아닐” 것이라 선언하고서는 영화에 대하여 쓴다. 그리고는 사실 이 모든 글이 “시를 쓰기 위한” 것이라 고백하는데, 이쯤 되면 ‘작가’란 무엇이며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존재라는 것만을 믿게 된다. 평론을 실증적인 위치로 만들려는 욕망은 주관성의 요소를 인상비평이라는 오명으로 치워버렸고, 기성품이 된 사상을 퍼즐처럼 맞춰보는데 급급하게 만들었다. 강보원은 매 회차 날짜가 달린 일기의 형식 속에서, 마치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영화를 보고 책을 읽고 가족 몰래 피운 담배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목적(object)과 대상(object)를 이리저리 돌려보고 있는 강보원의 글을 잘 쫓아가지 않으면, 같이 놀던 친구가 어느새 보이지 않는 것처럼 작가는 사라져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음에 이어질 시와 소설이 어쩌면 당신과 발 맞춰 쫓아가 줄지도 모르겠다. 계획시집 “만드는 데 힘이 적게 드는 작품일수록 좋다, 만드는 데 돈이 적게 드는 작품일수록 좋다, 만드는 기술이 특별한 것이 아니어서 누구나 똑같이 만들 수 있는 작품일수록 좋다, 운반하기 쉽고 편리한 작품일수록 좋다, 좀 찢어진다든가 더럽혀진다든가 약간 부서져도 괜찮은 작품일수록 좋다”. 미술작가 김용익이 말했던 ‘좋음’을 김유림의 시에서, 그리고 김유림의 시를 조금 찢어내 에세이와 소설 사이에 놓은 이 책에서 발견할 수 있다. 문학의 특수성과 활자 문화의 보편성이 점점 멀어지고 있을 때, “라이트 포엠 라이트(Light Poem Writes)”라고 선언하는 이 시들은, “짧고 장난 같다”는 작가 본인의 말처럼 그 “같음”을 통해 이 여백을 건너 뛰어 버린다. 언어가 도구의 도구, 도구의 도구의 도구처럼 쓰이고 있을 때, 아주 간단한 도구만을 갖고서 만들어 낸 김유림의 시는 당신의 손에 어느 새 자신의 시를 쥐여 주고, 당신은 어느새 “할 거야!”라고 말하고 있을 것이다. 우린 집에 돌아갈 수 없어 최대한의 존중을 담아 이렇게 말하고 싶다. 나일선은 생각이 없는 사람이다. 강보원의 말에 따르면 나일선은 근황으로 먹고 사는 사람이다. 그러니 나일선의 소설에 등장하는 낯설고 수많은 고유명사들에 당황할 필요는 없다. 나일선의 소설에 한 독자는 이런 말을 남겼다. “서로 초면인 차에 우연의 일치로 죽이 잘 맞는 친구가 될 수 있는 게 아니라면 재미있을 수가 없”다고. 그렇다면 동시대 담론의 흐름을 빌려, 이 소설이 아카이브나 링크에 대한 취향이라고, 박식함이나 교양을 드러내 보이려는 충동이라 말해야 할까? 앞서 말했지만 나일선은 생각이 없으니 그럴 수가 없다. 잡담처럼 보이는 소설의 이러한 계기들은, 비난을 위해 흔히 동원되는 말처럼 “자폐적”이지 않다. 오히려 명확하게 우리가 공유할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지식이라는 오염된 말을 접어두고, 읽는 우리들의 폭넓은 경험에서부터 시작할 때, 이 소설을 하나의 사태라고 부르게 한다. 그러니 나일선의 소설을 읽기 위해 수많은 고유명을 ‘알’ 필요는 없다. 오히려 이 사태는 우리가 무언가를 말한다는 것이, 어떤 종류의 앎을 수반하며 요구하는 것인지 다시 사고할 것을 요구한다. 나무에 대해 말하는 사람은 식물학자일까? 혹은 나무 애호가일까? 그렇지 않고도 나무와 함께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지 않을까? 이 책은 그 시간을, 강보원과 김유림이라는 상이한 두 개의 시간과 마주해서 이끌어간다. 셋 이상이 모인다면 240쪽에서 책은 끝나지만 목차에서 암시하듯 웹 페이지로 이어진다. 20년 12월 7일부터 약 일주일간, 책의 웹 페이지에서는 작가들의 추가 에세이, 비평, 번역, 제작기 등이 공개되며, 물리적 한계로 싣지 못한 색인과 참고문헌 리스트가 제공된다. ‘장난’을 허용하듯 누구에게나 편집이 허용된 이 페이지들은 웹에서 인쇄물로, 인쇄물에서 다시 웹으로 순환하며 또 다른 모임의 방식을 제시한다. 이러한 구성을 네트워크라고까지 부르기가 너무 거창하다면, 잠정적인 놀이터로서, 책을 가지고 노는 작은 재미들을 더할 것이다. 이 책은 언제나 셋 이상이 (그리고 방역 수칙에 따라 열이나 백 이하로) 모이기를 바란다. 웹 페이지 주소: https://www.notion.so/0ef0acd429db476085ffc3885b5b4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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