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체근대

지그문트 바우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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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우만은 이 책에서 안정적이고 견고한 ‘고체’와 달리 끊임없이 변화하는 성질을 가진 ‘액체’ 개념에 기초하여, 우리가 어떻게 ‘무겁고’ ‘고체적이고’ ‘예측/통제가 가능한’ 근대에서 ‘가볍고’ ‘액체적이고’ ‘불안정성이 지배하는’ 근대로 이동해왔는지 탐구한다. ‘액체 근대’의 도래는 인간 조건의 모든 측면에 심오한 변화를 불러왔다. 그 변화는 인간 조건을 해명해주던 낡은 개념들을 재고하도록 요청하고 있다. ‘액체 근대’에 대한 일련의 작업의 출발점이며 가장 핵심적인 통찰을 담고 있는 이 책에서 바우만은 그 요청에 응해 해방, 개인성, 시/공간, 일, 공동체--이 다섯 가지 인간 조건을 둘러싼 주요 개념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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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책머리에| 가벼움 그리고 액체성에 관하여 1 해방 자유라는 축복의 양면성 비판의 우연성과 그 변화하는 운명 시민과 개인의 전쟁 개인들의 사회에서 비판이론이 처한 곤경 다시 생각해보는 비판이론 생활정치 비판 2 개인성 자본주의--무거움과 가벼움 차를 가져라. 그러면 여행할 수 있다 그만 말하고 이제 내게 보여줘! 강박관념이 중독으로 소비자의 몸 액막이 의식으로서 쇼핑 맘껏 하는, 혹은 그렇게 보이는, 쇼핑 따로 떨어져서 우리는 쇼핑한다 3 시/공간 이방인이 이방인을 만나면 뱉어내는 장소들, 먹어치우는 장소들, 비(非)-장소들, 그리고 빈 공간들 이방인에게 말 걸지 말라 시간의 역사로서 근대성 무거운 근대로부터 가벼운 근대로 유혹적인 ‘존재의 가벼움’ 순간적인 삶 4 일 진보 그리고 역사에의 믿음 노동의 부흥과 쇠락 결혼에서 동거로 여담 : 미루기의 간략한 역사 유동적 세상에서의 인간의 유대 자기 영속화된 확신 부재 5 공동체 민족주의는 두번째 일체성-동질성을 통한, 아니면 차이를 통한? 안전을 위한 값비싼 대가 민족국가 이후 공백 메우기 짐 보관소로서의 공동체들 보유:글쓰기와 사회학적 글쓰기에 관하여 |옮긴이의 글| 액체 근대와 개인의 고립

출판사 제공 책 소개

마르크스가 “모든 견고한 것들이 녹아 사라진다”고 말했을 때, 견고한 것들이 녹아 사라진 자리에 들어선 것은 더욱더 견고하고 완벽해진 새로운 질서였다. 그러나 지금 여기 ‘액체 근대’ 세계에서는 정말로 모든 것이 녹아 사라지고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게 된다. 바우만은 이 책에서 안정적이고 견고한 ‘고체’와 달리 끊임없이 변화하는 성질을 가진 ‘액체’ 개념에 기초하여, 우리가 어떻게 ‘무겁고’ ‘고체적이고’ ‘예측/통제가 가능한’ 근대에서 ‘가볍고’ ‘액체적이고’ ‘불안정성이 지배하는’ 근대로 이동해왔는지 탐구한다. ‘액체 근대’의 도래는 인간 조건의 모든 측면에 심오한 변화를 불러왔다. 그 변화는 인간 조건을 해명해주던 낡은 개념들을 재고하도록 요청하고 있다. ‘액체 근대’에 대한 일련의 작업의 출발점이며 가장 핵심적인 통찰을 담고 있는 이 책에서 바우만은 그 요청에 응해 해방, 개인성, 시/공간, 일, 공동체--이 다섯 가지 인간 조건을 둘러싼 주요 개념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하고 있다. 과거 비판이론의 목표였던 ‘해방’의 과제는 어떻게 조정되어야 하는가? 해방은 축복인가 저주인가? 비판이론가들은 예속된 처지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상황과 타협하며 자유를 얻을 기회를 거부하는 ‘밑바닥 계층의 부르주아화’(‘행동’ 대신 ‘현상 유지’를 내세운다는 점에서)를 지적하며 해방의 기획이 지닌 곤경을 토로했다. 반면에 비판이론가들의 주장과는 달리 해방이 행복을 보장해주지 않는다고 보는 학자들도 있었다. 불확실성 속에서 무언가 끊임없이 결정을 할 때마다 개인들은 괴로움에 시달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이 보기에 오히려 인간을 진정으로 해방시키는 것은 ‘규범’이었다. 사회적 규범을 따르는 것이 바로 해방적 힘이며 인간이 합리적으로 자유를 향유케 할 유일한 희망이 된다. 이런 견해는 인간이 근대의 도래와 함께 이미 모든 자유를 얻었다는 견해를 지지한다. 우리 사회 구성원들에게 베풀어진 전대미문의 자유는 전대미문의 무능을 동반하고 온 것이다. 그러나 레오 스트라우스의 지적처럼 “우리 사회 구성원들에게 베풀어진 전대미문의 자유는 전대미문의 무능을 동반하고 온 것”이었다. 자유로운 개인들이 ‘비판’의 역할을 등한시한 것은 아니었으나 이들의 ‘비판’은 그들의 삶의 조건에 근본적인 변화를 불러올 수 없었다. 이는 우리 사회가 비판적 사고와 행동을 수용하는 하나의 방식을 만들어내면서 그러한 수용이 초래하는 결과에 둔감해졌기 때문이었다. 현대의 ‘비판’은 캐러밴 이동주택 단지가 운영되는 방식과 닮아 있다. 바우만은 이를 무기력한 ‘소비자 스타일의 비판’이 비판이론가들이 수행하던 ‘생산자 스타일의 비판’을 대체한 것이라고 표현한다. 모든 운전자는 각자의 여행 일정표와 시간 계획표가 있다. 단지의 관리자에게 이들이 원하는 것은 작다면 작고, 크다면 크다고 볼 수 있는 소망, 즉 자신을 그냥 내버려두고, 간섭받지 않게 해달라는 것이다. 그 대가로 그들은 관리자의 권위에 도전하지 않고, 사용료를 제때 내겠다는 약속을 한다. 돈을 내기 때문에 때로는 요구사항이 있을 때도 있다. (……) 그러나 이들이 이동주택 단지의 관리 철학에 질문을 던지거나 이를 두고 교섭하려고 마음먹는 일은 결코 없다. 하물며 단지를 운영하는 책임을 떠맡는 일은 두말할 나위 없다. 기껏해야 앞으로 이곳에 다시는 오나봐라 하며 친구들에게도 이곳이 좋지 않다고 말해주자고 마음먹는 정도이다. 각자가 자신의 일정에 따라 단지를 떠날 무렵, 그곳은 이들이 도착했을 때 그대로 남아 있다.(41-42쪽) 비판이론의 과제는 전도되었다. 텅 비어버린 아고라, ‘사적 영역’이 지배하는 세계. 비판이론이 비판의 대상으로 삼았던 근대성과 그 인식론적 틀은 오늘을 사는 세대들의 삶을 구성하는 근대성과는 너무나도 다른 것이었다. 비판이론가들이 경험한 ‘고체 근대’ 세계에는 전체주의의 기억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따라서 그들의 관심은 온통 개인의 자유와 자율성 문제에 투사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모든 과제와 책임이 사회에서 개인의 어깨 위로 떨어진 ‘액체 근대’ 사회를 살아가고 있다. 또 하나 기억해야 할 것은 현 단계의 개인화는 ‘주어진 것’으로서의 인간의 정체성이 아니라 ‘개인화를 하나의 과제’로 삼아 그 과제를 수행할 책임을 행위자에게 지운다. “내가 누군가이기 위해서는 그 누군가가 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기반이 해체된 시대의 개인들은 새로운 기반을 구축할 수 있는 전망이 없다. 운명으로서의 개인성과 자기주장을 위한 실제적 능력으로서의 개인성 간에 좁힐 수 없는 간격이 존재하는 것이다. 개인화의 또 다른 문제는 그것이 ‘시민의식’의 점진적 해체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개인은 ‘공공의 선’이나 ‘대의명분’에 대하여 회의적이다. 전체의 이해란 집단적 감정이나 이웃에 대한 공포심이 가져온 이기주의의 조합으로 축소되고, 공적 사안은 공적 인물들의 사생활에 대한 호기심 정도로 격하된다. 비판이론이 그렇게도 우려했던바, ‘공적인 것’이 ‘사적인 것을’ 식민화한다는 말은 이제 옳지 않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비판이론의 과제는 전도되었다. 과거의 비판이론의 과제는 전지전능하고 비인격적인 국가와 그러한 국가의 수많은 관료주의적 촉수들, 또는 그보다 규모가 작은 복제물들의 압제적인 규칙 아래에서 괴로워하는 사적인 자율성을 ‘공공영역’의 전진 부대로부터 수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비판이론의 임무는 사라져가는 공공영역을 수호하는 것, 아니 그보다는 빠르게 비어가는 (……) 공적 공간을 정비하여 사람을 채워 넣는 일이다.(64쪽) 개인화는 전례 없는 자유를 가져다주었지만 자유의 결과와 대면해야 하는 전례 없는 과제 역시 안겨주었다. 과거 비판이론의 목표가 오늘날 의미를 지니려면, 사적으로 추구되던 문제들을 개인적 관심들의 단순한 총합이 아닌 더 넓은 차원의 공적 관심사로 응축해내고, 지금까지 생활정치가 떠맡아오던 것들이 다시 대문자 ‘정치’의 장에서 논의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또한 ‘망각된’ 시민의 기술과 도구들을 개인들이 다시 되찾을 수 있도록 힘을 실어주어야 할 것이다. ‘여호수아 담론’에서 ‘창세기 담론’으로 : 무한한 가능성과 불확실성의 집합의 세계로 바우만은 나이젤 드리프트의 ‘여호수아 담론’과 ‘창세기 담론’ 구분법을 빌려온다. 무질서가 규칙이고 질서가 예외인 창세기 담론과 달리 여호수아 담론에서는 질서가 규칙이고 무질서가 예외이다. 여호수아 담론을 떠받치고 이를 믿을 만한 것으로 만든 것은 포드주의적 세계였다. “설계와 실행, 주도하는 자와 따르는 자, 자유와 복종이 세심하게 구분되고, 이러한 대립 항들을 단단히 결합시키면서 전자로부터 후자로 명령을 순조롭게 전달”시키는 포드주의의 세계가 질서를 목표로 하는 사회공학의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성취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무거운 자본주의에서 가벼운 자본주의로 이동하면서 ‘창세기 담론’이 ‘여호수아 담론’을 대체하게 된다. 무질서가 지배하는 ‘창세기 담론’의 사회에서는 추구할 가치가 있는 목적들을 ‘절대화’할 능력을 갖춘 ‘최고 권력기구들’이 사라진다. 때문에 인간은 자명한 목적을 위한 수단을 찾아내는 문제가 아니라 어떤 목표를 선택할지의 문제를 고민하면서 살아가게 된다. 그러면서 세상은 무한한 가능성의 총집합이 되어버렸다. 외견상 무한한 기회 속에 산다는 것은 ‘대단한 사람이 될 자유’의 달콤한 향을 풍긴다. 하지만 이 달콤함은 뒷맛이 쓴데, ‘된다’는 것은 어떤 것도 아직 끝나지 않았고 모든 것이 그대로 저 앞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게임이 계속되리라는 것, 아직도 일어날 일들이 많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지만, 그것은 영원한 불확실성, 절대로 충족되지 않는 갈망, 고뇌 상태가 계속될 것이라는 사실을 보장하는 것이기도 하다. 소비자의 불행은 선택의 결핍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과잉에서 비롯된다.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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