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앞으로 암과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조금만 더 음악을 만들어볼 생각입니다.”
2014년, 중인두암이 발견된 이후에도 치료와 회복에 힘쓰며 오리지널 앨범 《async》(2017년)를 발매하고, 세계 곳곳에서 앨범과 연계한 공연 및 전시를 여는 등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던 류이치 사카모토. (저자 이름은 책 본문에서는 ‘사카모토 류이치’로 표기하되, 표지 및 홍보 자료의 경우 널리 알려진 영어식 표기인 류이치 사카모토를 따름.) 그러나 2020년 6월, 직장암 진단을 받고 암이 재발하였음을 알게 되어 뉴욕의 암 센터에서 다시 항암 치료를 시작한다. 그리고 같은 해 12월, 일본에서의 검사 결과 직장암이 폐와 간, 림프에도 전이되어 치료를 받더라도 5년 이상 생존율은 50퍼센트에 불과하다는 진단을 받는다. 이후 2년간 종양 제거를 위해 모두 여섯 번의 수술을 받게 되는데, 1월의 첫 번째 수술 직후, “저는 앞으로 암과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조금만 더 음악을 만들어볼 생각입니다. 여러분이 지켜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p.46)라고 소속사를 통해 상황을 전했다. 암과 ‘싸운다’가 아닌, “살아간다”는 표현을 택한 것에서, 그리고 “조금만 더 음악을 만들어”보겠다는 말에서 그가 앞으로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내고자 하는지 그 마음과 의지를 읽어낼 수 있다.
“나는 앞으로 몇 번의 보름달을 볼 수 있을까.”
이 책은 제목이자 류이치 사카모토가 음악으로 참여한 영화 〈마지막 사랑〉(1990년)의 대사이기도 한 문장으로 시작된다. 시간의 유한함과 생의 소중함을 담고 있는 이 문장을 류이치 사카모토는 20시간에 걸친 대수술이었던 첫 번째 수술 이후 혼잣말처럼 읊조렸다고 한다. 가족들에게 암의 재발을 알리고, 언제 들이닥칠지 모를 죽음에 대비해 여러 가지 준비를 해나가던 와중에, 그는 『음악으로 자유로워지다』가 출간된 2009년 이후의 발자취를 이번 기회에 다시 되돌아보며 정리하기로 마음먹고 일본의 문예지 《신초》에 칼럼 연재를 시작한다.
그렇게 2022년 7월부터 이듬해인 올해 2월까지 연재된 글을 모아 책으로 엮은 것이 『나는 앞으로 몇 번의 보름달을 볼 수 있을까』이다. 책에 덧붙일 에필로그 원고 집필을 남겨두고 류이치 사카모토는 2023년 3월 28일 7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결국 저자의 에필로그를 대신해 칼럼 연재 당시 인터뷰 및 원고 정리를 담당했던 전 《GQ JAPAN》 편집장 스즈키 마사후미가 사카모토의 마지막 순간에 관해 담담히 기록해 덧붙였다. 유족 측에서 제공한 사카모토의 일기 일부도 그대로 인용하였는데, 큰 수술이 끝나고 섬망 증세를 자주 겪던 시기인 2021년 1월 31일부터 그가 숨을 거두기 직전인 2023년 3월 26일까지의 일기가 수록되어 그의 목소리를 대신한다.
시간의 유한함에서 자유로웠던
류이치 사카모토의 작품 세계
책은 기본적으로 류이치 사카모토의 그간의 음악적 여정을 따라 전개되어, 오리지널 앨범 《Out of Noise》 발매(2009년), 피아노 솔로 콘서트 방식의 유럽 투어(2009년), 오누키 다에코와의 컬래버레이션 앨범 《UTAU》 발매(2010년), 북미에서 31년 만에 콘서트를 하는 등 YMO로서의 활동 재개(2011년), 베네치아 국제영화제 심사위원 위촉(2013년), 그의 음악활동 후반에 큰 영향을 끼친 영화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2015년)의 음악감독으로서의 경험 등의 이야기가 차례로 언급된다. 그러나 단편적인 연대기식의 전개라기보다는 “시간은, 말하자면 뇌가 만들어내는 환상”(p.27)이라고 말하는 사카모토가 시간을 감각하는 방식처럼, 책의 흐름은 시간의 틀에서 종종 벗어나 그의 세계관과 철학이 엿보이는 깊고 자유로운 사유와 담론으로 이어진다.
‘시간’은 사카모토 후반기 작품활동의 커다란 화두로, “너무 마음에 들어서 아무한테도 들려주고 싶지 않다”고 말할 정도로 애정을 표했던 오리지널 앨범 《async》 또한 삶의 유한성을 맞닥뜨린 후 품게 된 ‘시간에 대한 회의감’이 작품에 영향을 끼쳤다고 밝힌 바 있다. 앨범 제목은 ‘비동기’(asynchronization)의 축약어로, 모든 것이 동기화되어가는 시대의 흐름에 의도적으로 등을 돌려 문자 그대로 ‘비동기’(非同期)로 향하고자 하는 마음을 담은 것이다. 앨범을 구상할 당시, 가장 큰 영감을 준 것이 바로 이우환 화백의 작품이었다고 하는데, 인간의 사고나 상상을 제거하고 ‘모노’(もの), 즉 돌이나 나무 같은 자연 소재를 가공하지 않고 그대로 전시하는 ‘모노파’의 연장선에서, “모든 사물에서 의미를 찾아내려는 뇌의 습성을 부정하고자”(p.224) 했다. 이에 따라, 소리의 관계를 치밀하게 구축하는 보통의 작곡 방식과 달리, 이 앨범을 제작할 때는 그와 정반대의 방법론으로 뉴욕 길거리에서 돌을 주워 두드리거나 문질러도 보고, 교토의 숲에 가서 필드 레코딩을 진행하기도 하는 등 여러 ‘소리’를 모아 레코딩을 진행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제작했기에 자연의 소리를 들을 때처럼 3차원의 공간에서 청취 체험을 해야만 《async》의 진가를 알아차릴 수 있다며, 앨범 발매 이후 그를 토대로 〈설치음악전〉같이 연주회이자 무대 예술, 설치 작품으로서의 성격을 갖춘 퍼포먼스를 여러 차례 진행했다. 2018년 5월부터 5개월간 서울의 갤러리 ‘piknic’에서 진행된 전시 〈Ryuichi Sakamoto Exhibition: LIFE, LIFE〉의 경우도 〈설치음악전〉이 기획의 씨앗이 되었다고 한다.
전 세계 예술가들과 나눈
깊은 우정과 예술적 교감의 현장
류이치 사카모토가 전 세계를 무대로 전방위적으로 활동한 예술가인만큼, 전위예술가 백남준과의 인연, 모노파 이우환과 나눈 영감과 교감, 설치예술가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와의 교류, 글라스 하우스에서 열린 쿠사마 야요이 전시의 오프닝 퍼포먼스, 피아노 솔로 MR(혼합현실) 작품 촬영 등 그 활동의 궤적을 좇다 보면 현대 예술사의 여러 흥미로운 단면과 마주하며 그 생동하는 현장감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앞 세대에 속하는 백남준, 이우환,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안드레이 타르콥스키부터 동시대 예술가 카스텐 니콜라이(알바 노토), 다카타니 시로, 이냐리투, 그리고 새로운 세대에 속하는 뮤지션 플라잉 로터스나 썬더캣, 새소년, 방탄소년단 슈가 등 나이와 장르의 경계를 뛰어넘어 전 세계 아티스트들과 예술적 교감을 나누는 그의 모습은, 사카모토가 뛰어난 창작자로서 많은 이들에게 어떻게 자리매김하고 있는지 실감하게 한다. 특히 사카모토가 스승으로 존경하며 영감을 받아온 이우환과는 마지막 오리지널 앨범 《12》의 커버를 위해 이우환이 그려준 작품을 완화 케어를 받을 당시 병실 벽에 걸어놓을 정도(p.381)로 깊은 교감을 나눈 것으로 보인다.
“내가 정말 유명해서 팔 수 있는 이름이 있다면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이용해야 한다”
2007년, 숲 가꾸기 활동을 하는 사단법인 ‘모어 트리스’를 설립한 이후 환경운동에 본격적으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류이치 사카모토는, 2011년 3·11 동일본 대지진 이후 피해 지역 복구를 위한 여러 구호 활동을 이어가는 동시에 일본 정부에 맞서 탈원전 시위 및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등 활동가로서의 행보를 이어갔다. 이렇듯 사회적 발언을 시작한 계기는 20세기 말, U2 보노를 주축으로 진행되었던 아프리카 최빈국의 대외 채무 탕감 운동 ‘주빌리 2000’에 초대받아 참여한 것으로, 그 이후 ‘이름을 판다’는 야유를 듣는 것에 신경 쓰지 않고 “팔 수 있는 이름이 있다면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이용해야 한다”(p. 330)는 쪽으로 마음먹게 됐다고 한다.
‘모어 트리스’ 이외에도 3·11 대지진을 계기로 ‘어린이 음악 재생 기금’을 설립하였는데, 지진 피해 지역의 약 2,000개 학교의 망가진 악기를 무상 수리하고, 수리가 불가능한 악기의 경우엔 기금을 지원해 교체해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