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고통을
제 삶으로 연결해낸
공모자-저항자들
“이 세계 다수는 사실상 연루자다”
나에게 인류학적 세계 읽기란 단단한 이해를 거쳐 책임 있는 비판을 길어내는 과정이었다. 이해가 모든 앎의 가능성을 확신하는 오류에 빠져서도 안 되었고, 비판이 손쉽게 조준할 과녁만 찾는 것도 피하고 싶었다. 이해가 홀연한 불가지론에 닻을 내리면서 불의에 눈감게 되는 사태도 저어됐고, 비판이 제 수사적 고향을 판단의 유일한 준거로 삼는 것도 우려됐다. 타자를 이해하는 과정이 우리가 당연시해온 믿음, 가치, 윤리, 삶의 방식을 비판적으로 성찰하게 하길 바랐고, 이러한 비판이 무수한 세계의 마주침을 이끌어 삶의 이해를 확장하길 원했다. 이 과정은 때로 자기수양에 가까워서 ‘더’라는 어중간한 단어를 붙들 수밖에 없다. 더 단단한 이해를 거쳐 더 책임 있는 비판을 시도하기. 그리하여 진리를 포획한 권위로부터 이해와 비판을 해방시키기. _「서문」
“조문영은 함부로 희망을 선언하지 않는다.
세계가 주조한 몇 겹의 욕망에 우리 모두
깊게 연루되어 있기 때문이다.”
_김윤영, 『창작과비평』
“그는 말과 말, 글과 글, 몸과 몸이 부딪치는
‘마주침의 현장’을 중시한다. (…)
‘개입하면 바뀐다’는 신조로 연구한다.
마주침과 개입은 연루連累/緣累와 이어진다.
‘남이 저지른 범죄에 연관됨’이라는
사전 뜻이 아니라 잇닿고連, 인연을 맺으며緣,
묶어내는累 감각을 확인하는 일이다.”
_김종목, 『경향신문』
제64회 한국출판문화상 수상 저자
『빈곤 과정』 조문영 신작
어떤 세계들은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와 부대끼며 공존한다. 그 부대낌이 불편해 있던 곳을 떠나와도, 그것들은 모습을 바꾸어 끊임없이 재출현한다. 출몰하는 세계는 외면 가능한 타자가 아닌 집단적 삶의 조건이자 현상이 된다. 인류학자에겐 현장이다. 현장에 있기 위해 그는 그/것이 무엇이고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는가를 집요하게 추적해가다, 그 길에서 때로 자기를 마주치고 심문한다. ‘연루됨’은 하필 자기와 맞닿게 된 특정한 세계와 관계 맺는 방편으로서 그에게 체화된다. 복작한 삶의 현장 바깥을 겉돌며 관망하기보다 그 속에 섞여들어 있기. 세계의 모순과 고통을 방관하기보다 공모를 인정하고 연루됨을 자처하여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기. ‘그곳에 있기’라는 인류학자의 체험(클리퍼드 기어츠)은 연루되기를 통해 그만의 고유한 경험이자 삶의 일부가 되고, ‘이곳에 돌아와 쓰기’를 가능케 한다.
한국과 중국의 현장에서 물리적·실존적 빈곤을 연구해온 인류학자 조문영은 생활에서 사회적 고통의 얽힘을 발견하고 바로 그 얽힘의 자리에서 길어 올린 연루의 감각으로 “더 단단한 이해”와 “더 책임 있는 비판”을 시도한다. 『연루됨: 인류학자의 세상 읽기』는 그가 2013년부터 2023년까지 10년간 여러 매체에 발표한 글을 이러한 관점에서 골라 엮은 책이다.
묘한 긴장감, 강렬한 흥미
―세계를 마주치는 순간
이 책의 ‘나’는 인류학자이자 교육자-학습자, 가족 구성원, 동료 시민, 지구생활자다. 팬데믹 시기 거리두기를 뚫고 화면 밖으로 나온 학생들부터 가장 가혹한 형태의 재난을 “뭐 이까짓 것”이라 칭하던 쪽방촌 주민, 기후정의행진에 나와 ‘최전선 당사자’로 발언하는 석탄화력발전소 노동자까지, 그에게 마주쳐 오는 풍경은 낯익고 예사롭기보다 낯설고 기이하다. “긴장감, 강렬한 흥미, 희망과 불안, 조급함……”, 가능성을 예감케 하는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마주침, 거기서 든 생각들이 이 책의 재료다. ‘나’는 그 자신을 포함해 세계와 세계들이 만나는 접점에서 눈을 빛낸다. 그의 눈에는 보통 사람의 고만고만한 일상도 어쩐지 눈이 가는 인물의 눈을 뗄 수 없는 모습으로 비친다. 그는 그냥 지나칠 법한 풍경을 무언가 중요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장면처럼 응시한다. 인류학자가 세상을 만날 때다.
현장연구를 시작할 때마다 엄습했던 설렘과 두려움이 불쑥 되살아난다. 연구실, 건물 복도, 신촌 거리 같은 지극히 평범한 장소에서. 익숙했던 게 불현듯 낯설어지자 감각이 예민해졌다. … 묘한 긴장감이 익숙한 풍경을 뒤집고 관행을 들쑤시면서 새로운 자극을 주었다.(22-23)
이러한 긴장 속에서 쓰인 예순네 편의 글에서 저자가 주로 등장시킨 세계는 빈민, 노동자, 청년, 노인, 여성, 장애인, 원주민, 이주민, 지방, 비인간 등 이른바 ‘주변화’되고 ‘비가시화’되어온 ‘취약한’ 존재들의 세계다. 그런데 한 편 한 편 그의 시선을 따라 “그들이 품고 온 세계”를 읽어나가다 보면, ‘세계’ 앞에 어떤 수식어를 붙일 것인가 하는 문제란 그리 간단한 얘기가 아님을 알아차리게 된다. 너를 알려고 시작한 질문은 깊어질수록 ‘나’를 불러들인다. 단편적이고 편협한 경험의 교훈과 선험의 프레임, 구조와 개인이라는 모호하고 이분법적인 관계 설정이 통하지 않는 지점까지 밀착해갔을 때에야 접속 가능한 세계―저자는 그것을 이해해보려고, 이해해보자고 한다. 전작 『빈곤 과정: 빈곤의 배치와 취약한 삶들의 인류학』에서 빈곤이 어디에나 있으면서 어디에도 없는 것이었듯이, 이 책의 세계들도 어느 하나 전형이 아니며 손쉽게 정의되지 않는다. 그리하여 빈자의 일상에 깃든 관계의 풍요가, “막장이 된 청년 논의” 바깥에서 청년들이 벌이는 논의가, ‘중국 국가’와 동의어가 아닌 중국인의 다채로운 삶이, ‘페미’로 싸잡히지 않는 페미니스트들의 전망이 눈에 들어온다. 복수複數의 세계는 끊임없이 재인식되고 확장되며 서로 연결된다.
‘수사적 고향’과 ‘거부의 정치’를 벗어나
홀연히 작별할 수 없는 세계와 재회하기
그러한 마주침이 가능해지기 전에, 그가 떠나온 세계가 있었다. 저자는 「서문」에서 “같은 고향에 좀체 머무르지 못”한 부친과의 관계를 짧게 회고한다. “‘우리가 남이가’ 세계의 암묵지가 내 상식을 거스르는 일이 잦아지자, 나는 조금씩 집을 떠날 채비를 했다. 내가 애써 설득하지 않아도 되는, 공감하고 위로받는 수사적 고향을 찾아 더 멀리.”(10) 공존하기 어려운 세계를 상징하는 ‘아버지’는, 인류학을 만난 후 그의 앞에 거듭 나타난다.
그런데 인류학에 입문하면서 타자를 연구하겠다고 발품을 팔기 시작하니 이곳저곳에서 ‘아버지’가 나타났다. 나를 반기면서도 불편해하는 사람들, 내 믿음을 수상쩍어하는 시선들, 내 감정을 휘저은 사회적 고통을 별것 아닌 듯 만드는 제도와 미디어. 고심하다 늦게 시작한 학문에 최선을 다하고 싶었던 걸까. 나는 내 아버지를 떠나듯 ‘아버지들’의 세계와 홀연히 작별하지 못했다. 그/것이 저 자신과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무엇이 그/것을 꿈꾸거나 좌절하게 만드는지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싶었다. 그렇게 타자의 수사적 고향에서 비비적거리다 보면, 때로 차이들 심연의 공통성이 보였고, 이전의 내가 내뱉었던 독단에 부끄러움이 밀려왔다.(10)
그 세계는 20년 가까이 노동운동에 몸담은 중국인 왕더즈로 등장해 말한다. “우리가 뭔가 잘못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비판하기에 앞서 상황에 대한 이해부터 했으면 좋겠다.”(161) 중국 노동운동이 여성과 성소수자 문제를 충분히 다루고 있지 않다는 지적에 대한 대꾸였다. 왕더즈의 말이 불러일으키는 긴장은, 「서문」에서 자기 세계의 미완성未完性을 통감한 저자의 인식과 공명한다. “이해의 밀도를 높인 뒤에 내놓는 비판은 달라져야 했다. 비판은 연구자인 나만의 몫이 아니다. 그/것도 세계를 해석하고 비판한다.”(10) 그 상호성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책은 독자의 ‘수사적 고향’을 묻는 질문으로 문을 연다.
당신의 ‘수사적 고향’은 어디인가? 당신은 누구와 이야기할 때 편안함을 느끼는가? 철학자 뱅상 데콩브에 따르면, 어떤 인물의 수사적 고향은
예 인
3.5
한국 사회의 문제를 알면서도 비판하거나 행동하지 않고 그 흐름에 무심하게 따라가고 있다면, 나도 결국 연루자다. - “빈곤의 낙인화가 생산성을 최상의 가치로 받든 자본주의 세계의 당연한 귀결이라면, 이 세계의 다수는 사실상 연루자이고 공모자다.”(92p)
heyyun
3.5
단순하게 바라보는 일, 뻔하게 말하는 일이 싫어진다. 좋은 글의 효과.
키요땅
4.0
사려깊게 길어낸 언어들은 오늘날의 공론장에서는 흔치 않기에 시대와 불화하는 소수는 한국에서도, 중국에서도 외롭지만, 결국엔 이들이 역사의 경로를 비틀고, 새로운 역사를 만든다. - 314p
장윤석
3.5
<빈곤 과정>보다 깊이는 얕지만, 중요한 메시지를 던진다. (깊이가 얕은 것은 책에 실린 글 대부분이 신문 <한겨레>에 실린 글이기 때문일 것으로 생각한다.) 조문영 교수는 자신의 위치, "수도권 유명 대학의 정규직 교수"라는 직위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그로 인해 가닿지 못하거나 외면하기 쉬운 '것'에 - 예컨대 동자동에서 나타난 빈곤, 용산 남일당에서 불타던 컨테이너 - 어떻게든 손을 뻗고 모아 학생에게 전달하려는 모습을 전작 <빈곤 과정>과 이 책에서 보여 왔다. (나는 현대 한국 사회에서 이런 미덕을 갖춘 사람이 몇 없다고 생각한다.) 이 점은, 책의 제목처럼 나, 수도권에서 유명 대학을 졸업해 한국 사회가 바람직하다고 여기는 라이프코스를 걸어 온 사람에게, 우리는 재앙에 연루되어 있고 일정한 부채를 지고 있음을 주지시킨다. 과거 <서울리뷰오브북스>에 실었던 서평도 실려 있으며 깊이가 다른 글보다 두드러진다. <가난 사파리>, <절멸과 갱생 사이>, <세계 끝의 버섯> 세 작품 모두 조 교수가 천착하던 주제와 밀착해 있으면서 그의 사려깊은 시선이 더해져 읽고 싶게 하는 마법을 발휘한다.
고은민
3.0
서문 너무 좋다. 당신의 ‘수사적 고향’은 어디인가? 당신은 누구와 이야기할 때 편안함을 느끼는가? 철학자 뱅상 데콩브에 따르면, 어떤 인물의 수사적 고향은 “그가 자기 활동과 행적에 부여하는 이유라든지 그가 표명하는 불만, 혹은 그가 표현하는 찬사를 대화상대자들이 더 이상 이해하지 못하는 곳에서” 멈춘다. (9) 나에게 인류학적 세계 읽기란 단단한 이해를 거쳐 책임 있는 비판을 길어내는 과정이었다. 이해가 모든 앎의 가능성을
강지원
2.5
기본 지식이 상당해야 편하게 볼 수 있는 책. 한 문장, 한 문단의 밀도가 높고 정보량이 많아 꽤 빨리 지치는 편이다. 두고두고 찬찬히 곱씹으면서 읽는 걸 추천한다.
치원
3.5
우리는 모두 기후재난의 연루자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환경철학을 논하는 일이 위선이 되지않도록, 부끄러운 일이 되지 않도록 더 열심히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호의가 동정의 시선에서 출발하지 않길, 환대를 통한 따뜻한 공동체가 되길, 불평등과 모순 사이 연대를 통해 이겨내는 사회가 되길 희망한다. “알아차림'의 기술, '감지‘의 실천을 통해 자본주의의 폐허에서 살아갈 가능성을 발견하자는 제안이 기후위기와 불평등의 최전선에서 싸우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호소력이 있을지도 고민해봄 직하다.“(354) “지구가 무너지는 시대에도 건설과 발전이 당위로 여겨지는 나라에서 돌봄과 수선의 삶이 정당한 대접을 받기란 요원하다.”(201) “미래의 휘황찬란함을 포기한 시대의 지구 돌봄도 노인 돌봄과 크게 다르지 않다. 지구든 노인이든, 취약한 생명을 보듬는 시간을 버림의 시간으로 취급해온 오랜 역사에서 우리 다수는 공모자다.”(214) “가난한 사람들에게 연명 정도만 허하고 다른 세계를 상상할 기회를 주지 않는 사회에서 대안은 여전히 신분의 언어다. 그렇게 좋은 대안이, 조금 더 평등의 혜안을 품길 바라본다.“(227)
예진
2.5
빈곤 과정이 100배 좋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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