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제공 책 소개

하나의 깃발 아래 선 기독교와 이슬람 군대 “문명의 충돌”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기독교-이슬람의 800년 역사 『십자가 초승달 동맹: 우리가 알지 못했던 기독교-이슬람 연합 전쟁사』는 지난 800년 동안 유럽에서 광범위하게 존재했으나 까마득히 잊혀진 기독교도와 무슬림의 군사 동맹을 다룬다. 이언 아몬드는 11세기 에스파냐, 13세기 이탈리아, 14세기 그리스, 16세기 헝가리, 19세기 러시아를 넘나들며 유럽의 전장에서 하나의 깃발 아래 싸웠던 수많은 기독교도와 무슬림 병사들을 드라마와도 같은 5개의 생생한 에피소드로 소개한다. 이를 통해 기독교 유럽과 이슬람의 대립이라는 “문명의 충돌” 테제를 반박하고 종교간 공존과 화합의 역사를 새롭게 복원했다. 시공을 초월하는 종교간 동맹의 역사 우리에게도 친숙한 십자군 원정과 살라딘의 역공, 콘스탄티노플 함락과 레판토 해전으로 표상되는 기독교와 이슬람의 장구한 대립의 역사는 “문명의 충돌”이나 “지하드〔聖戰〕” 등의 이름으로 현대에도 동일하게 반복되고 있다. 기독교 유럽과 이슬람 세계의 충돌이라는 관념은 이데올로기적 타당성 여부를 떠나서 과연 역사적 사실에도 부합하는 이야기일까? 『십자가 초승달 동맹』은 정확히 이러한 질문에 대답하는 책이다. 참혹한 전투와 고통스러운 포위전, 수많은 개인들의 영웅적 행위라는 역사의 표피를 걷어내면 우리는 이탈리아 밀라노 성 밖에서 기독교 황제의 깃발 아래로 모여든 아랍 병사들을 만나게 된다. 에스파냐에서 기독교도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 무슬림들, 견고한 동맹의 보루를 세운 그리스 황제와 투르크 술탄, 기독교 세계의 심장부 빈을 향해 진군을 멈추지 않은 무수한 헝가리 프로테스탄트들도 알게 된다. 또한 크림 반도의 살육장에는 영국인 병사뿐만 아니라 투르크인 전우도 함께 했음을 알게 될 것이다. 토마스 옆의 압둘라, 드미트리 옆의 알리 에스파냐와 이탈리아, 그리스의 바다와 헝가리의 대평원, 크림반도와 터키 북동부의 험준한 산악 지대를 오가는 수많은 전장에서 두 종교의 병사들은 공동의 적에 맞서 함께 싸웠다. 그들을 위협하는 적도 마찬가지로 기독교-이슬람 연합군이었다. 이러한 기독교-이슬람 동맹들은 적대적인 두 공동체가 공동의 적에 맞서기 위해 서로를 의심하며 맺은 일시적인 동맹이 아니었다. 이 동맹은 기본적으로 현실 정치와 이해관계에 따른 것이긴 했지만, 때로는 엘리트들 간의 진정한 우정과 따뜻한 인간애를 바탕으로 하거나, 때로는 오랫동안 같이 살아오면서 동일한 문화를 공유하게 된 집단의 역사적 일체감에 의한 것이기도 했다. 또한 기독교 병사와 이슬람 병사가 전장의 양쪽 귀퉁이에서 멀찍이 떨어져 어슬렁거리는 그런 어색한 그림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작은 부대 단위에서 함께 복무하기도 했는데, “토마스 옆에 압둘라가, 드미트리 옆에 알리가, 슈테판 옆에 무스타파의 아들, 다우드”가 있는 식이었다. 실로 종교 간 동맹은 유럽 역사에서 이례적인 것이 아니라 매우 흔한 일이었던 것이다. 역사는 “문명의 충돌” 신화를 가장 강력하게 파괴한다! 왜 그들은 서로 다른 신앙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깃발 아래 싸웠던 것일까? 저자 이언 아몬드는 남부 유럽이 다종교-다문화의 통합된 역사 공간인 지중해 세계의 일부임을 깨닫는다면, 무수히 등장하는 기독교-이슬람 동맹이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고 말한다. 수세기 동안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유럽’이라는 관념은 존재하지 않았다. 기독교도, 무슬림, 유대인은 지중해라는 하나의 무대에서 서로 뒤섞여 살았으며, 베네치아, 제노바 같은 서구 도시들은 동방의 콘스탄티노플, 알렉산드리아와 동일한 공간을 공유했다. 에스파냐, 이탈리아, 그리스, 터키에서 무슬림과 기독교도들은 같은 도시에서 서로 이웃해 살면서 같은 언어를 쓰고, 같은 식료품점을 이용하고, 같은 문화와 가치를 공유하며, 공동의 적에 맞서 단결했다. 그들은 멀리서 온 신앙의 형제보다는 가까이서 함께 살아온 이교도 이웃을 더 신뢰했던 것이다. 역사의 복잡한 날실과 씨실은 종교적 정체성이란 인간을 규정짓는 여러 정체성 중 하나일 뿐임을 보여준다. 『십자가 초승달 동맹』은 11세기 에스파냐에서 19세기 러시아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기독교-이슬람 연합 전쟁사를 통해 ‘문명화된 기독교 유럽’이라는 관념을 해체하고 대안적인 유럽사를 서술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오늘날 미디어에서 반복적으로 생산하는 ‘이슬람’이라는 생소한 타자의 이미지와 “문명의 충돌”이라는 이데올로기적 주장과는 반대로, 유럽 문명은 이슬람과의 경계 없는 교류 속에서 배태되었다. 역사야말로 “문명의 충돌” 신화를 그 무엇보다 가장 강력하게 파괴한다. 두 종교의 황제: 11세기 에스파냐의 알폰소 6세 11세기 에스파냐는 다문화-다민족의 용광로였다. 4백 년간 지속되었던 무슬림 칼리프 체제가 붕괴하자 이베리아 반도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아랍인들의 영역은 스물세 개의 군소 국가들(타이파: ‘분파’라는 뜻의 아랍어)로 쪼개졌다. 작은 타이파들은 서로를 적대하며 북부의 기독교 동맹 세력을 필사적으로 찾았다. 칼리프 시절 이베리아 북부에서 겨우 생존하던 기독교 왕국들은 이러한 정세를 잘 이용하여 처음에는 지원군으로 나중에는 정복자로 성장하게 되었다. 카스티야의 알폰소 6세는 1086년 살라카 전투에서 북아프리카의 이슬람 세력에게 결정적으로 패배하기 전까지만 해도 에스파냐에서 가장 강력한 군주였다. 그는 “두 종교의 황제”라고 불리기도 했다. 에스파냐 중부의 중심 도시였던 톨레도를 점령했으나 무슬림에게 관대한 정책을 펼쳤고, 타이파의 무슬림 통치자들과 개인적으로 매우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또한 사라고사나 세비야와 같은 이슬람 맹방들을 도와 같은 기독교 왕국인 카탈루냐와 오랜 시간 대립했다. 11세기 에스파냐에서 기독교-무슬림 동맹은 매우 흔하고 예사로운 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점점 강성해진 알폰소 6세는 무슬림 타이파들에게서 막대한 금액의 보호금(파리아스)을 뜯어냈다. 이 자금을 바탕으로 알폰소는 거대한 상비군을 유지하고 파리아스를 바치는 데 소흘한 타이파들을 협박할 수 있었다. 무슬림 도시에서는 자신들이 낸 세금으로 기독교 군대를 먹여살리는 것에 분노한 반란이 빈발했다. 알폰소의 금전적 요구가 가혹해지자 타이파들은 “카스티야의 돼지치기가 되느니 차라리 모로코의 낙타 몰이꾼이 되겠노라”며 북아프리카에서 급성장하던 알모라비드 세력에 의탁하기로 했다. 알모라비드는 알폰스 6세를 살라카에서 격파하여 순식간에 에스파냐의 절반을 장악했다. 타이파들의 요청에 상륙한 알모라비드는 아이러니하게도 타이파 체제를 없애고 에스파냐를 직접 통치했다. 새로이 등장한 무슬림 세력의 위세에 눌린 기독교 왕국들은 그간의 반목을 뒤로 하고 그제서야 진지하게 연합을 도모하기 시작한 것이다. 황제의 보물, 교황의 악몽: 13세기 이탈리아 무슬림 도시 루체라의 운명 이탈리아와 독일을 아우르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제6차 십자군의 총사령관이자 교황으로부터 두 번이나 파문당한 “세례 받은 술탄”, 무자비한 기독교 군주이자 이슬람 문화의 보호자였던 프리드리히 2세. 이 흥미로운 인물은 가톨릭의 본산이자 유럽 문화의 정수인 이탈리아 한복판에 무슬림 군사 도시 루체라를 건설했다. 루체라의 주민들은 원래 시칠리아에 살던 무슬림들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무자비하게 진압된 후 황제에 의해 루체라로 강제 이주 된 사람들이다. 프리드리히 2세는 이들에게 이슬람 신앙과 자치를 허용하는 대신 충성스럽고 유능한 궁수와 기병대를 공급받았다. 루체라의 무슬림 병사들은 황제를 위해 북부 이탈리아 도시들(롬바르디아 동맹)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복무했고, 심지어 십자군 원정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