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적 지배를 의미하는 “가스라이팅”이 유래한 영화 「가스등」
“서스펜스의 거장” 앨프리드 히치콕이 연출한 영화 「로프」의 원작 희곡
상대방의 정신에 혼란과 불안을 끼쳐 스스로를 불신하고 자주적으로 사유하지 못하도록 하는, 이른바 심리적 지배를 의미하는 “가스라이팅”이라는 단어가 유래한 작품 『가스등』과 선민의식에 사로잡힌 인간의 오만과 자아도취를 극적으로 보여 주며 앨프리드 히치콕에 의해 영화화된 『로프』를 함께 수록한 패트릭 해밀턴의 희곡집 『가스등』이 민음사 쏜살 문고로 출간되었다. 문학의 귀재인 그레이엄 그린이 칭송하고,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도리스 레싱은 “심각하게 무시당해 온 작가”라고 한탄한 패트릭 해밀턴은, 불우한 가정 환경에도 불구하고 19세라는 이른 나이에 소설을 발표하며 뛰어난 예술적 재능을 과시한다. 특히나 인간의 취약성, 비겁하고 악랄한 본성, 날것 그대로의 욕망을 자기만의 고유한 시각과 문장으로 포착할 줄 알았던 해밀턴은, 찰스 디킨스를 방불케 하는 동시대적 감각과 호흡이 담긴 작품을 여럿 남긴다.
그중 그에게 첫 성공을 안긴 작품은 바로 희곡 『로프』(1929)다. 1924년, 미국 시카고에서 일어난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이 작품은, 발표 직후부터 큰 인기를 구가하며 연극 무대 위에 패트릭 해밀턴의 이름을 깊게 각인시킨다. 오직 관객만이 진실을 미리 알고 있는 살인 현장에서 한갓지게 흘러가는 디너파티와 니체적 허무주의에 물든 장광설이 오가는 풍경은 『로프』의 서스펜스를 극한으로 끌어올린다. 당대에 “실존적 스릴러”라고 평가받은 이 작품은, 당연하게도 앨프리드 히치콕을 단번에 매료했고 여전히 그가 연출한 영화 중 가장 “실험적인 작품”으로 남아 있다. 뒤이어 1938년에 발표한 희곡 『가스등』은 해밀턴에게 엄청난 명성을 가져다준다. 오늘날에는 조지 큐커가 감독하고, 세계적인 스타 잉그리드 버그만이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영화 「가스등」(1944)으로 더욱 친숙하지만, 당시(1941~1944) 브로드웨이 무대에서 1295회나 상연되었을 정도로 기록적인 흥행작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세계 각지의 무대 위에 오르고 있는 『가스등』은 20세기 희곡 중 가장 성공적인 작품으로 손꼽힌다.
“최악으로 끔찍한 밤이라고요? 아, 아니에요.
가장 멋진 밤이죠. 다른 무엇과도 비길 수 없는 아주 멋진 밤이었어요.”
『가스등』은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 런던의 한 가정을 배경으로 시작한다. 고급스러운 가구로 가득 찬 아늑한 집 안을 배경으로, 성실한 하인들과 아름답고 점잖은 한 쌍의 부부가 눈에 띈다. 이상적인 디오라마처럼 보이는 이 가정에도 차마 말 못 할 사정이 있다. 잘생긴 외모에 수완이 좋아 보이는 매닝엄 씨에겐 단 한 가지 걱정거리가 있는데, 바로 아내 벨라다. 최근 들어 아내가 자꾸 물건을 숨기거나 기억을 잃고, 심지어 반려 동물을 괴롭히고도 시치미를 뚝 떼는 등 문제가 이만저만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벨라에겐 정신병을 앓다가 돌아가신 어머니도 있으니, 아내 집안에 어떤 내력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벨라 역시 억울하고 당혹스럽기는 마찬가지다. 목숨을 걸고 맹세하건대, 벨라는 남편 몰래 액자를 치운 적도, 강아지를 학대한 적도, 영수증을 잃어버린 적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매닝엄 씨는 그녀더러 미쳤다고 으름장을 놓으며, 하인들 앞에서 망신을 주거나, 자꾸 헛소리를 하면 이젠 벌을 주겠다는 식으로 거짓 자백을 받아 낸다. 그리고 이렇게 남편이 화를 내고 집을 떠나 버리면 어김없이, 방 안을 비추던 가스등이 희미하게 흔들리고, 위층에선 유령 같은 발소리가 들려온다. 이런 끔찍한 나날이 계속 이어지며, 마침내 벨라는 스스로를 의심하고 두려워하게 된다.
“사실은 아주 명확한 동기를 가지고 있지. 허영심.
바로 허영심에서 비롯한 살인이니 말이야.
살인자는 자신이 저지른 일을 입에 올리고 싶어서 안달하게 된다네.
우쭐대고 싶거든.”
영국 런던의 최고급 주택가, 메이페어에 위치한 한 집 안이 짙은 어둠에 잠겨 있다. 기묘한 흥분감과 불안에 사로잡힌 두 사람의 실루엣이 언뜻 보인다. 키가 크고 조각처럼 우아한 생김새의 브랜던은 이제 막 재미있는 게임을 마친 듯 살짝 들떠 있고, 가무잡잡하게 그을린 피부에 아담한 그라닐로는 등불마저 두려워할 정도로 벌벌 떨고 있다. 그렇다, 이 두 사람은 방금 살인을 저질렀다. 젊고 순수하고 건강한 한 청년을 아무 이유도 없이, 단지 허영과 허세를 부리기 위해 밧줄(로프)로 목 졸라 살해한 것이다. 늘 의기양양한 브랜던은 살인쯤은 식은 죽 먹기라며, 누군가의 목숨을 희롱할 수 있다는 사실에 도취해 있다. 그런 반면, 그라닐로는 죄의식에 사로잡힌 채, 그동안 숭배해 온 브랜던에게 휘둘리며 넋이 빠져 있다. 그런데 이들의 기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자기들이 죽인 청년(로널드 켄틀리)을 커다란 궤짝 속에 넣어 두고, 그 위에 만찬을 차린 뒤 사람들을 초대한 것이다. 심지어 그 청년의 아버지까지 불러서 모욕하기로 작심한 브랜던은 완전 범죄에 다가선 스스로에게 감동하는 모습마저 보인다. 그러나 한 손님, 염세적이지만 삶을 사랑할 줄 아는 루퍼트 카델이 등장하면서부터 현장의 기류가 요동치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