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 자본론』 옮긴이 인터뷰
1. ‘녹색 자본론’은 어떤 의미인가요? 자본주의와 다른 이슬람의 특징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이 책에는 네 편의 글이 실려 있는데요, 글마다 다른 시각에서 우리가 사는 자본주의 세계를 조망합니다. 그중 ‘녹색 자본론’이 표제작이 된 이유는 이 글들을 쓴 계기가 된 사건과 관련이 있을 것 같습니다. 바로 2001년 9/11 테러 사건입니다. 자본주의의 상징과도 같은 세계무역센터가 무너졌을 때 저자는 자본주의의 ‘거울’을 목격했다고 합니다. 서구 자본주의와 그 ‘타자’의 마주침을 본 게 아닐까 싶어요. 그것은 바로 당시 ‘악의 축’ 취급을 받았던 이슬람 문명이었죠. 같은 일신교를 베이스로 하면서도 전혀 다른 문명을 구축한 이슬람을 통해 자본주의의 원리를 탐색하려 했던 것이죠. 그래서 자본의 원리를 분석한 마르크스의 책 제목인 ‘자본론’에 이슬람을 상징하는 색인 ‘녹색’을 붙여 글의 제목으로 삼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녹색은 이슬람만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타자 모두를 상징하는 것 같습니다. ‘압도적 비대칭’에서는 자연이, ‘슈토크하우젠 사건’에서는 예술이, ‘모노와의 동맹’에서는 고대로부터 인간이 느낀 어떤 영적인 힘이 자본주의의 타자입니다. 이 타자들의 공통점은 양적으로 환원할 수 없는 생명력인데 그 생명의 색을 ‘녹색’으로 표현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이 책의 표제이기도 한 ‘녹색 자본론’에서 언급하는 이슬람 경제의 특징은 증식에 대한 경계, 더 구체적으로 말해 이자와 화폐 축적을 금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큰 돈만 있으면 그걸로 이자를 벌거나 어딘가에 투자해 놀고먹고 싶다는 망상에 빠지곤 하죠. 돈이 돈을 낳는다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이슬람에서는 ‘증식’에 기반한 부의 축적을 금지합니다. 『쿠란』을 보면 축적과 이자를 금지하는 구절들이 심심찮게 나오죠. 왜일까요? 그 이유는 이슬람이 철저한 유일신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은 신의 표현이기에 ‘지금 표현되는 것 외 다른 것이 생겨날 수는 없다’는 것이죠. 기본적으로 인간이 필요한 것을 교환할 수는 있어도 거기서 이윤을 얻고 축적하는 일은 불경이라는 생각이 깔려 있습니다. 특히 사물의 대용일 뿐인 화폐가 새끼를 쳐서 생기는 이자는 말도 안 되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책을 읽다 보면 결국 질문의 방향은 우리 자신을 향하게 됩니다. 우리는 왜 돈을 빌려주거나 은행에 맡기면서 이자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할까요? 왜 화폐는 더 많은 증식과 성장을 불러와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을까요? 그동안 공기처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던 것들이 낯설어지게 됩니다.
2. 나카자와 신이치는 신화학과 대칭성 인류학 등으로 알려져 있는 학자입니다. 이 책에서 지은이는 어떤 관점을 갖고 있을까요? 또 독자에게 어떤 변화를 원하는지, 있다면 알려주세요.
나카자와 신이치는 문제의 대안이나 해결책을 찾아 헤매기보다는 그것의 근본적인 차원, 그러니까 인간 마음의 원리에서 생각하기를 촉구합니다. 제도적으로 보완하고 해결하기 이전에 인간의 무의식 차원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보는 것이죠. 나카자와 신이치의 책을 읽으면 그렇게 한 번 멈춰 생각하게 됩니다. 이 책에서도 그런 특징이 충분히 두드러집니다. ‘녹색 자본론’은 일신교를 낳은 인간의 무의식을 분석하고, 그것이 어떻게 이슬람과 그리스도교로 분화했는지, 그리스도교는 어떻게 자본주의와 결합했는지를 풀어낸 글이죠. 자본주의를 비판하기 이전에 우리 욕망이 어떻게 생산되는지를 돌아보고, 또 그걸 흥미로운 신화나 인류학적 지식과 함께 풀어주는 것이 저자의 매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처음에는 재미있는 신화와 종교 이야기를 하는가보다, 하고 따라가면 어느새 마르크스까지 만나고 있거든요.
이 책을 읽으며 개인적으로 느낀 변화는 풍요로움에 대한 이미지였던 것 같습니다. ‘녹색 자본론’에는 크리스마스와 라마단을 비교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욕망을 있는 대로 펼치는 것을 풍요로움이라고 생각하는 문화권과, 욕망을 줄이고 절식하는 가운데 다른 풍요로움이 있다고 하는 문화권이 나란히 놓이지요. 이중 어느 한쪽은 탐욕적이고 다른 한쪽은 금욕적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무의식적 차원에서부터 풍요로움에 대한 감각이 다른 것이니까요. 하지만 욕망의 무한성과 부의 축적을 당연시하는 사고는 분명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연유는 제가 공부하는 공간인 고전비평공간 규문에서 추진했던 이란 여행 프로젝트와도 연관이 있습니다. 이란 여행을 가기로 한 저와 친구들은 이슬람의 역사, 문화, 정치를 공부했고, 이 책도 읽어 보기로 했죠. 일본어를 조금 안다는 이유로 제가 번역자로 당첨(?)되었고요. 그중에는 『천일야화』도 있었어요. 잘 아시는 ‘신드바드의 모험’을 보면 신드바드는 일곱 번의 모험을 하면서 부자가 되지요. 보물을 가득 싣고 귀향한 신드바드는 매일 낯선 손님들을 초대해서 잔치를 벌여요. 죽을 고생을 해서 얻은 보물인데 아쉬움 없이 가진 것을 베풀고 나눕니다. 그러다가 그런 생활에 질리면 산더미 같은 재산을 내버려두고 다시 훌쩍 목숨을 건 모험을 떠나고요.
‘부자’ 하면 수전노인 스크루지나 재산 불리기에만 혈안이 된 재벌 이미지밖에 없었던 제게 신드바드는 정말 흥미로웠어요. 공부를 더 하고 보니까 신드바드의 삶은 이자를 금지하고, 가진 것을 나누는 희사(喜捨)의 의무가 있는 이슬람 영성과 부합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이자도 없고 가진 것을 나누는데 풍요롭다? 이건 어떤 부(富)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런 질문을 하면서 ‘녹색 자본론’을 번역했던 것 같아요. 그에 비하면 제가 가진 풍요의 이미지는 정말 제한적이고 볼품없다는 생각을 했고요. 무엇이 진정한 풍요로움일지를 질문하면서 좀 더 다양한 방식으로 함께 누리면서 살아갈 수 있는 길을 고민해 보기. 이것이 제가 독자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부분입니다.
3. 테러와 광우병을 예로 들면서 오늘날 비대칭의 문제를 지적하는데, 지은이는 무엇을 말하려는 걸까요? 이것이 자본주의의 문제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궁금합니다.
이 책의 첫번째 챕터는 ‘압도적 비대칭’인데요, 나카자와 신이치는 이 글에서 테러가 왜 하필 고도로 이익을 추구하는 자본주의 시대에 두드러지게 되었는지를 설명합니다. 테러는 무한증식을 본질로 하는 자본주의 체제의 산물이라는 거죠. 어떤 점에서 그럴까요?
생명이나 존재는 대칭성에 기반합니다. 서로 연결되고 의존하는, 수량화될 수 없는 관계 속에 있지요. 이와 달리 자본주의는 수량화하고, 구분 짓고, 위계화하는 비대칭성에 기반해 있습니다. 그 비대칭성이 대칭성을 압도할 때, 그러니까 연결과 관계에 기반한 생명에 위계와 차별과 이윤의 증식을 요구할 때 괴리가 생기고 폭발하는 순간이 옵니다. 테러는 그 괴리의 순간으로부터 발생하는 폭력입니다. 무자비한 공장식 축산으로 인해 소의 뇌 안에서 일어난 폭발이 광우병이고, 독점과 증식의 욕망을 인간 사회가 담아낼 수 없을 때 일어나는 폭발이 테러인 것이죠.
압도적으로 비대칭적인 관계 안에서, 존재를 부정당하는 동시에 계속 착취당하는 대칭성 세계의 주민들이 하는 마지막 선택이 바로 테러입니다. 그렇다면 테러에는 어떤 태도가 깔려 있을까요? 생각해 보면, 테러는 강도 행위처럼 누군가를 공격해서 이익을 갈취하는 게 아닙니다. 그보다는 ‘너 죽고 나 죽자’는 공멸의 태도라 할 수 있습니다. 광우병이 대표적이죠. 뇌의 구멍이 난 소도 죽고, 그걸 먹는 사람도 죽죠. 그렇게 공멸의 구멍들이 자본주의 사회 곳곳에도 뚫립니다.
나카자와 신이치는 이 예견된 공멸을 무겁게 받아들이고 지금이라도 ‘자연계약’을 새로 맺어야 한다고 경고합니다. ‘사회계약’에서 비롯된 이 용어는 인간과 자연이 다시 대칭성에 기반한 관계를 맺는 것을 말합니다. 이 ‘자연계약’이란 말이 저는 참 현실적인 제안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코로나 팬데믹 당시, 우리는 인간이 움직임을 멈추자 단기간에 자연이 회복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즉 자연은 아직 ‘계약’을 맺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