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제공 책 소개

유럽에 대항해 시대가 있다면 중국에는 대운하 시대가 있다 저서 『대운하와 중국 상인』으로 중국 근세사 연구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 조영헌 교수가 10년 만에 주저를 선보인다. 중국의 ‘명·청 시대’를 ‘대운하 시대’라는 획기적 개념으로 포착해 낸 책이다.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고 강력한 제국이었던 중국은 15세기에서 18세기까지 약 1800킬로미터에 달하는 대운하를 통해 물자와 인력, 정보를 실어 나르며 번영을 누렸다. 하지만 대운하 시대는 중국의 ‘바다 공포증’을 더욱 강화해 제국의 쇠퇴를 불러온 역설의 시대이기도 했다. 저자는 황제와 관리, 상인, 해적, 선교사 등 다양한 인물이 등장하는 생생한 에피소드들을 통해 대운하 시대를 대항해시대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세계사적 시간으로 끌어올린다. 세계 최대의 내륙 수상 운송 네트워크 대운하, 변방의 도시 북경을 제국의 수도로 만들다 중국의 대운하라고 하면 우리는 보통 수나라의 대운하를 떠올린다. 그러나 이 책에서 다루는 대운하는 수나라의 대운하보다 약 800년 뒤의 것으로, 명나라 제3대 황제인 영락제가 완성했다. 영락제는 즉위 직후부터 수도 이전을 추진했다. 남경(난징)을 떠나 북경(베이징)으로 옮길 생각이었다. 많은 역사가가 북경 천도의 ‘이유’를 설명하려고 했다. 북경은 몽골과 너무 가까웠고, 땅은 척박했다. 게다가 경제 중심지인 강남 지방과 지나치게 멀었다. 명은 금이나 원처럼 북방에 기원을 둔 정복 왕조도 아니었다. 저자는 북경 천도의 ‘과정’에 주목한다. 천도에 앞서 영락제는 대운하를 대대적으로 정비하는 사업에 착수했다. 고도가 다른 지역의 수심을 고르게 했고, 방죽을 쌓아 범람을 막았으며, 갑문을 설치해 물줄기를 돌림으로써 막혔던 구간을 새로 개통했다. 이렇게 완성된 물길은 이전 시대의 대운하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많은 양의 물자를 실어 나를 수 있었다. 대운하가 북경 천도의 필요조건을 충족시킨 것이다. 공급 문제가 해결되자 영락제는 천도를 공식화했고, 이때 확립된 정치 중심지 북경, 경제 중심지 강남이라는 구도는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번영도 쇠퇴도 모두 대운하에서 시작되었다 중국은 왜 문을 닫아걸었는가? 앞서 보았듯이 수도 북경은 몽골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었는데, 이때 안보 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대운하의 염상(소금 상인)들이었다. 대운하가 재정비되면서 원대에 쇠퇴했던 소금의 생산과 유통도 다시 활발해졌다. 중국의 역대 왕조는 소금 전매권을 쥐고 있었는데, 이는 명대에도 마찬가지였다. 염상들은 조정으로부터 소금을 판매할 권리를 얻는 대신에 북변으로 군향(군량)을 직접 조달했고, 제도가 바뀐 뒤에는 은을 납부하는 방식으로 국방에 기여했다. 대운하를 무대로 활동했던 청 초기의 상인 정유용은 눈여겨볼 만한 사례 한 가지를 제공한다. 정유용은 동료 상인들과 함께 사비를 들여 대운하의 도시 양주에 천비궁을 재건했는데, 천비는 항해신 마조를 가리킨다. 바다의 여신이 이 시기에 이르러서는 내륙에서 운하의 여신으로 모셔질 정도로 대운하는 번영하고 있었던 것이다. 관리도 아닌 일개 상인이 지역사회의 공익사업을 주도할 정도로 위상이 높았다는 점도 짚고 넘어갈 대목이다. 하지만 대운하의 번영에는 이면도 있었다. 영락제는 대운하를 개통한 후 바닷길을 통한 조운(漕運)을 금지했다. 이에 명의 만력제 때 조운총독을 지낸 왕종목은 남쪽에서 수도로 곡물을 운반할 때 대운하뿐만 아니라 바다도 이용하자고 제안했다. 일리 있는 주장이었다. 황하의 범람은 대운하의 원활한 통행을 주기적으로 위협했고, 훗날 중국을 방문한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가 증언했듯이 대운하는 지나갈 차례를 기다리는 선박들로 교통 체증이 일어날 정도로 미어터지는 상황이었다. 왕종목의 제안은 어찌 되었을까? 왕종목은 실각했고, 중국은 바다로 나아갈 기회를 또다시 포기했다. 표면적 원인은 정치적 갈등이었지만, 저자는 그 진정한 원인을 마테오 리치가 제기한 “바다와 해안을 침범하는 해적에 대한 두려움”에서 찾는다. 명과 청은 모두 바다로 나아가는 것을 금지하는 ‘해금’을 기본 정책으로 삼았는데, 동남 해안에서 창궐한 왜구나 임진왜란의 발발, 유럽 무장 세력의 진출 등으로 이러한 기조는 더욱 강화되었다는 것이다. 중국은 왜 해양 진출을 ‘주저’했는가? 21세기 중국의 ‘해양 굴기’를 어떻게 볼 것인가? 1684년, 청의 강희제는 상해(상하이), 영파(닝보), 하문(샤먼), 광주(광저우)에 각각 해양 무역을 담당할 해관을 설치하도록 허용했다. 전례가 없는 수준의 개방적 조치였는데, 전해에 대만의 정씨 세력을 무너뜨린 자신감의 발로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동아시아까지 진출한 서양인들은 지속해서 추가로 문호를 개방하라고 요구했고, 강희제의 손자 건륭제는 네 곳의 해관 중 세 곳의 문을 닫는 것으로 응수했다. 건륭제에게는 통상에서 이익을 얻는 것보다 바다에서 오는 위협을 막는 것이 더 중요했다. 당시에 청은 굳이 해양으로 진출할 필요를 느끼지 못할 만큼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조부 강희제가 강남으로 여섯 차례 순행한 것처럼 건륭제도 강남을 여섯 차례 방문했다. 강희제의 남순이 민심을 달래고 치수의 상황을 살피는 데 집중했다면, 건륭제의 남순은 대운하를 따라 내려오는 유람의 성격이 강했다. 건륭제의 강남 순행은 대운하의 상인들에게 좋은 기회였다. 그들은 황제를 융숭하게 대접함으로써 명예와 특권을 얻었다. 건륭제 또한 남순을 통해 강남의 유력자들과 유대를 다지면서 안정되고 통합된 제국의 위세를 과시할 수 있었다. 대운하 시대는 절정에 달해 있었고, 그 무엇도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저자는 중국이 해양 진출을 ‘주저’한 이유로 흔히 꼽히곤 하는 ‘지대물박(地大物博)’의 논리, 즉 땅이 넓고 물자가 풍부했기에 해양으로 진출하지 않았다는 논리가 지닌 부족한 설득력이 대운하를 통해 높아질 수 있다고 본다. 대운하가 광대한 제국 내에서 남북 간의 유통을 원활하게 하고 물자를 효율적으로 이전함으로써 균형 발전을 유도해 ‘결핍’을 못 느끼게 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중국이 과거와는 전혀 다른 방향의 해양 정책을 추진하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 중국은 근래에 들어 영락제 시절에 아프리카까지 도달했다는 정화 함대의 원정을 재조명하는가 하면, 일대일로(一帶一路) 정책을 통해 육상 실크로드와 나란히 해상 실크로드를 강조하고 있는데, 이는 남중국해의 영유권 주장 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처럼 신중화주의적 프로파간다로 역사를 재해석하는 상황에서 대운하 시대의 흥망성쇠를 되돌아보고 중국은 왜 해양 진출을 주저했는지 생각해 보는 것은 해양 대국으로 거듭나려는 21세기 중국의 ‘해양 굴기’를 이해하는 데 좋은 실마리가 되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