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강한 여자야. 난 남자들도 못 하는 일을 해냈단 말이야.”
세상을 놀라게 한 끔찍하고 오싹하고, 으스스하고, 유머러스하고, 위트에 넘치는 여성 연쇄살인범들의 이야기!
여성 연쇄살인자들, 역사로 복귀하다
2020년 여름에 도서출판 눌민에서 출간한『여성 연쇄살인범의 초상』은 어린이책 편집자, 영화 제작자 및 감독, 프리랜서 기고가로 활동하고 있는 토리 텔퍼Tori Telferrk가 미국의 온라인 잡지《헤어핀The Hairpin》과 《제저벨Jezebel》 에 기고했던 여성 연쇄살인자들에 대한 글들을 모아 2017년에 펴낸 『레이디 킬러Lady Killers: Deadly Women Throughout History』를 완역한 책이다.
저자 토리 텔퍼는 유럽 중세 시대 헝가리의 백작 부인 바토리 에르제베트를 비롯하여 내니 도스, 매리 앤 코튼, 다리야 니콜라예브나 살티코바, 안나 마리 한, 틸리 클래맥 등 역사에 실존했으나 거의 잊혀지다시피한 여성 연쇄살인범들을 풍부한 사료 조사와 최신 연구를 바탕으로 수천 가지의 작은 사실들을 발굴하고 검증함으로써 완성도 높은 논픽션을 만들어 냈다.
여성 연쇄살인범 이야기, 인간 본성의 심연을 들여다보다
저자가 이 책을 쓰면서 특히 경계했던 것은 살인을 미화하거나 즐거운 어떤 것으로 표현하지 않으려 한 점이다. 저자에 따르면, 연쇄살인범 이야기를 즐기는 이유는 인간 본성에 폭력적 판타지가 숨어 있어서 그 판타지를 자극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야기가 주는 치유와 깨달음의 힘을 믿으며, 악행을 들춰보면서 그것을 이해하고 사회의 책임은 없는지 따져보는 것에 있다. 인간 본성은 무엇인가가 저자가 궁극적으로 묻는 질문인 것이다.
이 책에 인용된 조이스 캐럴 오츠의 표현대로 “연쇄살인범들의 정신을 탐구하는 것은 곧 인간 정신의 극단을 탐구하는 것이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영역에 속한다. 어디까지가 ‘인간적’이고 어디서부터가 ‘비인간적’인지는 결국 법률이나 신학, 혹은 미학적 관점의 문제”이다. 또한 “사악한 사람들이 따로 있어서 몰래 음험하게 악행을 저지르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 사람들을 따로 격리해 쳐부수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선과 악의 구분선은 모든 인간의 심장을 관통한다. 누구도 자기 심장을 파괴하고 싶지 않을 것”이라는 솔제니친의 말처럼 이 책은 우리에게 쉽게 단정할 수 없는 인간 본성의 심연을 탐구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여성 연쇄살인범, 어째서 나타날 때마다 언제나 최초로 불리는가?
다른 하나는 여성을, 흔히 지금껏 남성 중심의 주류 사회에서 표현하듯이, “비사회적이고 불안정한 성격과 열등한 신체를 지녔으며 남성에 종속된 존재”로 그리지 않으려 한 점이다. 물론 여성 연쇄살인자들은 성격이 나쁘고, 교활하고, 이기적이고, 망상에 차 있고, 당장의 이익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이코패스들이었지만, 이 책에서 그들은 결코 “배신한 남성에 복수하기 위해서거나 떠나버린 남성을 붙잡기 위해서거나 남성에 더 잘 보이기 위해서거나 남성의 명령을 받아서거나 남성에 대한 에로티시즘을 충족하기 위해서” 또는 “호르몬의 불균형이나 히스테리 발작으로” 반응적 살인을 저지르는 “열등한 신체를 지닌 남성 의존적 인물들”이 아니라는 점을 피력하고 있다.
또한 저자는 여성이 저지르는 폭력에 대한 주류 사회의 선입견에 저항한다. 여태껏 주류 사회는 여성의 폭력에 대해서 “집단적 기억상실증”에 걸린 듯한 경향을 보여왔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자신에게 성폭력을 저질렀다는 이유로 남성 일곱 명을 죽인 에일린 워노스가 1992년에 기소되었을 때에 미국 언론들은 그녀를 두고 “미국 최초의 여성 연쇄살인범”이라 불렀다. 또한 1998년에 미국 FBI 프로파일러 로이 헤이즐우드는 “여성 연쇄살인자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선언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 책에서 증명하듯이 에일린 워노스는 미국 최초의 여성 연쇄살인범도이 아니다.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여성 연쇄살인자는 존재하며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있다.
망각되고 왜곡된 여성 연쇄살인범들
여성 연쇄살인범들이 다른 남성 연쇄살인범들과 달리 역사의 안개 속으로 흐지부지 사라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구미의 역사학자들은 아직도 악명 높은 잭 더 리퍼의 정체를 연구하지만, 그보다 세 배에서 네 배에 달하는 사람을 살해한 시골 여자 매리 앤 코튼에 대해선 그 정도의 관심을 두지 않는다. 저자는, 사회는 여성들에 대해, 특히 나쁜 짓을 저지르는 여성들에 대해 빨리 잊으려 하거나 환상 속에서만 존재한다고 믿고 싶어 하는 경향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남성들은) 실제로 여성 연쇄살인범이 검거되어 재판을 받기 시작할 때엔 극도로 경악하는 반응을 보이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마치 볼썽사납게 문제 행동을 보이는 애완견을 대하듯이 동정 여론이 이는 한편) 범죄자가 반성의 기미를 보이는 데에 곧 안도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다.
저자는, 주류 사회가 여성의 범죄를 에로틱한 이미지로 소비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즉 범죄를 저지른 여성을 최대한 성적 매력과 결부시켜 보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예쁜 여성 연쇄살인범들은 때로는 “섹시한 뱀파이어로 묘사”되기도 하고, 때로는 “집에 데려갈 만한 매력적인 여성”으로 취급하기도 한다. 그러나 못생긴 여자에겐 바보 같은 별명을 붙여주어 조롱하기도 한다. 저자에 따르면, 이러한 분류법은 여성을 두려운 존재가 아니라 덜 위협적이고 부드럽고 나약한 존재로 만들고 안도하려는, 또는 회피하려는 시도라는 것이다.
잘 짜여진 구성과 유머러스한 문체로 읽는 즐거움과 긴장감이 넘치는 책
이 책의 매력은 무엇보다도 소설처럼 읽히는 잘 짜여진 구성과 더불어 사건을 유머러스하게 표현한 문체에 있다. 저자는, 때로는 섬뜩하고 때로는 오싹하기도 한 이야기들을 저자 특유의 유머 감각으로 지루하지 않게 성공적으로 풀어낸다. 여성의 범죄에 대해 엄숙한 얼굴로 무거운 심판을 하며 사건과 인물에 숨이 막힐 정도로 도덕적인 판단을 하기 보다는, 무시무시한 등장인물들이 보여주는 블랙코미디 같은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드러냄으로써 그들에 대한 애정과 균형 감각을 유지하고 그들의 마음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다.
“그 이유가 무엇이건, 읽는 사람의 성향에 따라 전혀 다른 느낌을 준다는 점이 이 책의 묘미다. 여성을 남성보다 부드럽고 평화로운 존재로 생각하는 고정관념론자들에게는 ‘여자도 똑같은 인간이구나.’라는 새로운 인식을, 여성을 무시하는 비하론자들에게는 ‘역시 여자들의 살인 방법은 한심하군.’이라는 확신을, 반대로 여성의 힘을 응원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래, 여자들도 이런 거 할 수 있어.’라는 은밀한 쾌감을 준다.”는 옮긴이의 말은 이 책의 진가를 유감없이 드러낸다.
때로는 깔깔 웃으며 때로는 눈물을 흘리며 여성이 여성에 공감하며 쓴 이 책을 통해 고의로 망각되거나 왜곡된 이미지로 포장된 여성 연쇄살인범들의 실제 이야기를 읽으며 인간과 인간 본성에 대한 새로운 입구를 발견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