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제공 책 소개

고독의 목소리로 묻고 허무의 걸음을 걷는 망명하고 방랑하는 예술가에게 닿은 눈송이의 대답, 시의 결정 1990년 《문학사상》으로 등단하여 『단편들』,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엔 아직도 음악 같은 눈이 내리지』, 『아무르 기타』, 『사랑과 열병의 화학적 근원』, 『삶이라는 직업』, 『모든 가능성의 거리』, 『체 게바라 만세』, 『그녀에서 영원까지』, 『불란서 고아의 지도』 등의 시집을 펴낸 박정대 시인의 신작 시집이 민음의 시 293번으로 출간되었다. 이번 시집 『라흐 뒤 프루콩 드 네주 말하자면 눈송이의 예술』은 시인 박정대의 시작(詩作) 시간 30년을 채우고 펴내는 그의 열 번째 시집이다. 그 시간과 무게를 몸소 보여 주는 것처럼 두텁고 묵직한 이 시집에는 시와 노래, 영화와 사진, 친구와 고향 등, 시인 박정대를 이루는 모든 것이 담겨 있다. 시인은 어디에도 결속되고자 하지 않는 방랑자 혹은 망명자처럼 자신을 숨긴다. 다른 언어 속에, 흐르는 노래 속에, 감상한 영화 속에 시를 숨기듯. 그러나 시인은 숨는 동시에 존재감을 드러낸다. 우리에게 기억되는 수많은 예술가들 사이에서 하나의 얼굴로. 그는 노래 부르듯 시를 쓰고 토론하듯 시를 쓰며, 그렇게 쓰인 수많은 시들과 함께 어디론가 유유히 흘러가는 듯하다. 그곳은 바로 어디에도 없지만 시인이 마련한 시의 자리, 시인의 고향이다. ■시, 그것은 눈송이의 예술 걸어가는 쪽으로 내리던 눈은 다시 돌아오는 쪽으로도 내린다 지금은 귀환의 시간 먼 곳에서 절뚝이며 걸어오던 시간이 고개를 들어 눈의 영토를 바라보는 시간 눈 속으로 내리는 또 다른 눈이 하염없이 삶의 속살을 고백하는 시간 걸어가는 쪽으로 눈은 내린다 -「눈의 이름」에서 시의 시간을 30여 년이나 보내고도, 시인은 여전히 시를 쥔 채 걷고 부르고 묻고 쓰는 일에 질리지 않는 사람처럼 보인다. 여전한 에너지로 혁명에 분노하고 세상에 슬퍼하며 허무에서 낭만을 본다. 언제나 흥얼거리며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걷는 사람처럼, “한걸음 걸어갈 때마다/ 발끝에 차이는 것들”(「나의 슬픔은 세상과 무관하고 그대의 슬픔은 나를 울리지 못하니」)을 생각한다. 꿈인지 사랑인지, 혁명인지 예술인지 하는 것들을 발끝으로 차며, 줍기도 하며, 시인으로 사는 것이다. 그러다가 문득 그는 고개를 든 것 같다. 아마도 “밤새 눈이 내”려서였을 테고, “거리의 추위도 눈발에 묻혀 갈 즈음” “우리가 밤새 찾으려고 했던 것은 생의 어떤 실마리였을까” 하고 묻는다. 그리고 곧장 알게 된다. “움직이는 모든 것들이 시였고 움직이지 않는 모든 것들의 내면도 결국은 시”(「톰 웨이츠를 듣는 좌파적 저녁」)였다는 것을. 눈송이가 천천히 머리에 내려앉듯, 그 사실을 받아들인다. 눈송이의 결정이 모두 다르듯 쏟아지는 언어들이 모두 다른 것에 다른 어느 때보다 눈을 반짝이며, 그의 열 번째 시집에서 ‘눈송이의 예술’을 계속해 나간다. 모두 다른 그 언어들을 뭉치고 흐트러뜨리며, 계속해서 쓴다. ■발걸음이 멈추는 곳 이절에 조그만 오두막을 짓기로 생각한 후 마음은 숭어처럼 뛴다 산다는 것은 뭔가 심장이 뛴다는 것이고 이제 나는 조금씩 살아가려나 보다 -「이절극장」에서 정처를 모르겠다고 작정한 것만 같고 그래서 더욱 거침없던 리듬으로 나아갔던 시는 종종 멈춰 서서 그 자리를 돌아보곤 한다. 구르던 발과 내딛던 걸음을 멈추는 순간은 시인이 폭설에 묻힌 듯 고독을 느끼는 순간이다. 걸어온 것들을 더듬는 시간. “물끄러미 낮달을 보고 있”는 것 같은, “낮달 속으로 걸어 들어가 망명 정부 하나 세우고 싶어”지는 순간이며 그곳에서 시인은 “외롭고 쓸쓸한 사람들 모두 불러서 촛불이라도 밝히고, 함께 조촐한 저녁이라도 먹고 싶”(「음악들」)다. 이때 쓸쓸함과 외로움을 생각하느라 시인의 발걸음은 제자리를 맴돈다. 눈 내리는 거리를 홀로 걷는 차가운 걸음들을 생각하다가, 푹푹 쌓이는 눈송이 같은 시들을 생각하다가 시인은 슬몃 정착에의, 도착에의 의지를 내보인다. 시인이 닿고자 하는 곳은 바로 그의 작업실이자 고향인 이절이다. “첫눈의 언어를 찾아 말을 타고 떠났다가 (……) 이제사 이곳에 당도했으니/ 여기는 이절, / 불꽃과 눈송이로 이루어진 단 한 편의 시”(「오랑캐략사 리절 외전」)로 설명되는 곳. 그곳에서 시인은 오래도록 맞아온 눈발을 털어내고, 언 발을 녹이는 난로를 켜고, 눈이 녹은 물을 끓여 훈기를 퍼뜨리고, 다시 노래를 시작할 것이다. 발걸음이 멈추어 따뜻해지는 곳에서 다시, 시가 탄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