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제공 책 소개
역사상 가장 참혹하고 거대한 내전의 기록
현대 전쟁사의 거장 앤터니 비버의 역작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제국이 붕괴된 뒤, 최대 1200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 끔찍하고 거대한 내전이 일어났다. 레닌과 트로츠키가 이끄는 볼셰비키의 적군(赤軍), 이에 맞서는 백군(白軍)이 싸워 ‘적백내전’이라고도 불린 이 전쟁은 서쪽으로는 폴란드, 동쪽으로는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유라시아대륙 전역에서 전개되었다. 그간 러시아 혁명에 대한 책은 많았으나, 이후의 내전은 소략하게 다루거나 아예 그 과정을 생략한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러시아 내전은 러시아 혁명과 불가분의 관계로, 이후의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알아야만 하는 20세기의 중요한 사건이다.
러시아 내전은 단순히 한 나라의 ‘내전’이 아니라 러시아 제국의 붕괴 이후 독립하려는 신생 국가 핀란드, 폴란드, 발트 3국에 제1차 세계대전의 적국이었던 독일, 기존의 동맹국이었던 영국, 프랑스를 비롯한 연합국까지 개입한 국제적인 분쟁이었다. 또한 적군(赤軍)과 백군 양측이 모두 학살과 고문을 일삼아 타국과의 전쟁보다도 훨씬 끔찍하게 전개되었는데, 이는 한 국가 내에서 정치적·이념적 갈등이 극단으로 치닫고 상대방의 존재 자체를 무력으로 말살하려 할 때 어떤 비극이 일어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스페인 내전》, 《스탈린그라드》 등을 집필한 앤터니 비버는 복잡하게 전개된 러시아 내전을 놀라울 정도로 명료하게 정리해 냈다. 러시아, 폴란드, 우크라이나를 비롯한 여러 나라의 기록보관소에서 찾아낸 새로운 자료들, 수많은 서적과 기록들을 모아 집필된 이 책에서 러시아 내전은 페트로그라드 거리의 노동자, ‘고요한’ 돈강의 초원을 행군하는 기병, 야전병원의 간호사 등 다양한 인물들의 눈으로 생생하게 재구성된다.
2월 혁명과 10월 혁명, 그리고 내전의 시작
1917년의 러시아 제국은 한계에 달해 있었다. 시대착오적인 러시아의 전제군주정은 1905년 피의 일요일 사건으로 심각한 문제점을 드러낸 지 오래였고, 1914년부터 3년째 계속되고 있는 제1차 세계대전은 여기에 치명타를 날렸다. 도시에는 식량이 부족했고, 병사들의 불만은 쌓여만 가고 있었다. 누가 보아도 제국이 붕괴될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도 차르 니콜라이 2세는 두마(국회) 의원들로 내각을 구성해 민심을 달래야 한다는 조언에 “신민들이 짐의 신임을 얻어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답할 정도로 현실 감각이 없었다. 결국 페트로그라드에서 일어난 2월 혁명의 결과, 니콜라이 2세는 퇴위하고, 동생 미하일 대공도 황위 계승을 포기하면서 제정은 막을 내리게 된다.
하지만 임시정부 또한 독일과의 전쟁을 이어나가면서 시민들의 지지를 잃었고,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는 10월에 적위대와 수병들을 동원한 무장봉기로 임시정부를 전복하고 볼셰비키 지도부(레닌, 트로츠키, 스탈린 등)가 설립한 인민위원평의회를 권력기구로 내세웠다. 이후 11월에 제헌의회 선거가 진행되어 사회혁명당이 가장 많은 표를 얻었으나, 레닌은 제헌의회에 권력을 넘겨줄 생각이 없었고 제헌의회는 단 한 번의 회의를 끝으로 다시는 소집되지 못했다. 제정이 붕괴된 2월 혁명 당시에는 어느 집단에서도 거의 반발이 없었으나 볼셰비키의 10월 혁명 이후에는 각지에서 장교, 카자크, 우파 사회혁명당, 체코 군단(본래 오스트리아군 소속이었으나 포로로 잡힌 후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기로 하고 러시아군에 편입되었다)의 반란이 일어났고, 이때부터 내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광활한 유라시아를 배경으로 한 참혹한 내전
러시아 내전은 20세기의 어느 전쟁과도 무척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전장이 된 러시아는 너무나 거대했기에 철도와 강을 따라 전투가 벌어졌다. 끝없이 뻗은 평원, 침엽수림 한가운데로 수천 킬로미터로 이어지는 시베리아 횡단철도, 유럽에서 가장 긴 강인 볼가강이 주된 전장이 되었고 한 쪽이 기세를 타고 수백 킬로미터를 진격하다가 전투력이 소진되면 반격을 당해 또 수백 킬로미터를 물러나는 일이 반복되었다. 이런 환경에서 기병이 매우 중요한 전력으로 취급되어 백 년 전 나폴레옹 시기를 연상시키는 기병 돌격이 유용한 전술로 활용되었다. 러시아 내전을 상징하는 무기 역시 말이 끄는 수레에 기관총을 실은 타찬카이다. 적군(赤軍)과 백군 모두 체제가 붕괴된 열악한 상황에서 전쟁을 치러야 했기에 후방에서 전방으로의 보급은 사실상 불가능한 경우가 많았고, 가장 중요한 보급 방법은 적 군수물자의 노획이었다.
러시아 내전의 또 다른 큰 특징은 그 잔혹함이다. 억압적인 체제를 고수한 지배계급에 대한 분노를 품은 적군(赤軍), 혁명으로 모든 것을 잃은 백군 양측 모두 서로에 대한 증오를 키워가며 잔혹 행위를 일삼았다. 볼셰비키의 비밀경찰이자 무장집단인 체카(KGB의 전신)의 고위직으로 있던 마르틴 라치스는 1918년 8월 《이즈베스티야》에 기고한 글에서 “확립된 전쟁 관행”은 쓸모없다고 밝혔다. “당신과 싸운 모든 부상자를 학살하는 것. 이것이 바로 내전의 법칙이다.” 처형 및 고문 방식도 유달리 잔혹한 경우가 많았다. 백군은 포로로 잡은 공산당 정치위원(commissar)을 산 채로 불에 태우곤 했고, 적군(赤軍)이 점령한 지역에 투입된 체카 요원들은 반대자들을 체포한 후 끓는 물에 손을 집어넣어 손의 가죽을 그대로 벗겨 내거나, 어깨에 견장을 못으로 박는 등 글로만 읽어도 끔찍한 고문을 자행했다. 포로로 잡은 적 병사들에게 직접 구덩이를 파게 한 뒤 죽이고 그대로 파묻는, 20년 뒤 나치의 인종 청소와 똑같은 양상의 학살도 벌어졌다.
이러한 혼란의 와중에 본래부터 박해를 받아온 유대인들은 다시 한번 피해자가 되었다. 본래도 러시아 제국은 차르 니콜라이 2세가 직접 반유대 조직 ‘검은 백인대’를 후원했을 정도로 유대인에 적대적이었는데, 그 뒤를 이은 백군 세력은 볼셰비키 중 유대인 출신 지식인이 다수 있다는 이유로 그들에 대한 탄압에 더 열을 올렸고, 정도는 덜했지만 적군(赤軍) 역시 유대인에 호의적이지 않았다. 내전 기간 중 대규모 포그롬(유대인을 겨냥한 약탈과 폭동)이 수없이 일어나 우크라이나에서만 5만에서 6만 명의 유대인이 살해당한 것으로 추산된다.
러시아 내전의 본격화와 그 결말
러시아 내전 당시 적군(赤軍)의 수뇌부가 레닌과 트로츠키가 이끄는 볼셰비키임은 명료하다. 그에 반해 백군은 가장 그 규모가 컸던 시기를 기준으로 세 개의 세력(동부의 백군 ‘최고지도자’ 콜차크, 남부의 데니킨, 서북부의 유데니치)으로 나뉘어 있었다. 얼핏 보기에는 볼셰비키가 사방에서 포위당해 위기에 빠진 듯 보였지만, 실제로는 적군(赤軍)은 러시아의 인구와 산업이 집중된 핵심부를 차지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한 전선에 전력을 집중해 적을 무찌른 뒤 또 다른 전선으로 병력을 이동시키는 식의 전략을 구사해 우세를 점할 수 있었다. 또한 볼셰비키 정권의 군사인민위원 트로츠키는 이전까지 철저히 배척했던 구 러시아 제국군의 장교들을 ‘군사 전문가’란 명목으로 기용하고, 부사관 중 유능한 이들을 선발해 지휘관으로 발탁하면서 적군(赤軍)의 전반적인 역량을 향상시켰다. 트로츠키는 심지어 위기에 빠진 전선 각지로 직접 장갑열차를 끌고 나가 반격을 이끄는 영웅적인 면모를 보였다.
적군(赤軍)의 반격에 가장 먼저 붕괴된 것은 서부 시베리아의 콜차크 군이었다. 교통의 요지인 우파와 옴스크를 차례로 빼앗긴 콜차크 군은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따라 끝없이 동쪽으로 물러나야 했고, 결국 콜차크는 이르쿠츠크 인근에서 우파 사회혁명당, 체코 군단과의 불화 끝에 볼셰비키 측에 넘겨져 처형당했다. 러시아 남부에서는 한때 데니킨이 이끄는 백군이 오룔을 점령한 뒤 모스크바로 가는 관문인 툴라를 위협하고, 북서부에서는 유데니치가 페트로그라드 바로 앞까지 진격하기도 했지만 결국에는 모두 패퇴하였다. 1919년 겨울이 되자 실질적으로 남은 백군 세력은 러시아 남쪽 끝 크림반도에 갇힌 브란겔의 군대뿐이었다. 동부 시베리아에는 부패와 잔혹성으로 악명이 높은 백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