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가 태어나 자란
우리 마을이 좋아”
일곱 살 때부터 밥 짓고, 나물 뜯고, 모시 삼고, 빨래하며 동생들을 키워 내던 아이는 주름 가득한 얼굴로 마당 한쪽에서 나물을 다듬는 어르신이 되었습니다. 밥 먹으면 들에 가고 밥 먹으면 논에 갔고, 누가 먹든 심고 가꾸는 것이 농부의 일이라 생각하고 열심히 일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래도 짬을 내어 뱁새의 둥지를 돌보고, 소와 염소, 돼지와 닭을 키우며, 비 오는 날이면 냇가에서 고기를 잡고, 밤이면 참게를 건져 올렸습니다. 그렇게 어르신은 정든 마을을 지키며 살아갑니다. 마을 초입에 서 있는 500년도 넘은 커다란 도토리나무와 은행나무 아래에는 오늘도 삼삼오오 모여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어르신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 우리 동네
‘사람과 동물이 주어진 자연환경 안에서 어우러져 살아가는 마을.’ 작가가 본 송정마을은 “자연 속에서 작은 규모의 농사를 지으며 살고, 그러한 삶에서 얻은 이야기를 그림으로 담고 싶다”는 작가의 이상향과 꼭 들어맞는 곳이었습니다.
작가는 농촌 마을 전체의 삶을 한 장면, 한 장면 에피소드를 나열하는 방식으로 풀어갑니다. 차곡차곡 쌓이는 시간의 서사 속에는 일곱 살 어린 나이부터 살림을 도맡아 하던 맏딸도, 오랜 세월 농사지으며 고생스럽게 자식들을 키워 낸 부모도, 고향을 떠난 이들이 마음 한편에 쌓아 둔 그리움도, 풀 한 포기, 새 한 마리도 소중하게 아끼고 사랑하는 자연 사랑의 마음 들도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작가는 “우리 동네, 우리 가족을 떠올리며 송정마을을 그려냈다”고 말합니다. 사철나무를 이고 있는 돌담, 처마 곳곳에 자리한 새들의 둥지, 집집마다 소와 돼지, 닭과 토끼를 키우고, 나무 그늘에서 주전부리를 나누어 먹으며 서로의 일상을 얘기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우리 모두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 우리 동네의 정서와도 맞닿아 있습니다.
가장 날카로운 도구로 가장 부드럽게 표현한 마을 이야기
직접 발로 뛰며 누구보다 사실적이고 섬세하게 현실을 담아내는 것으로 정평이 난 김병하 작가는 《우리 마을이 좋아》에서 등단 이래 처음으로 펜화 작품을 선보입니다. “가장 날카로운 도구로 가장 섬세하고도 부드럽게 이 마을을 표현하고 싶었다”는 작가는, 씨실과 날실처럼 촘촘하게 펜선을 교차시키며 송정마을의 과거와 현재, 자연과 사람을 연결합니다. 또한 작가는 10여 가지 색 잉크를 번갈아 사용하며 사물 하나, 장면 하나의 의미를 따뜻하고 세련된 색감으로 표현합니다.
작가는 말합니다. “펜화는 나 스스로도 두려운 선택이었다. 펜은 이 작품을 담아내기에 가장 이상적인 도구였지만, 그림책 한 권을 펜화로 완성하는 일은 낯설고도 어려웠다”라고 말입니다. 한 달 반여의 시간 동안 하루도 빼놓지 않고 12시간씩 채색을 진행했다는 작가는 아침이면 곱아 버린 손가락에 펜을 끼우고 손을 테이프로 감아 고정한 채 손목의 통증을 참으며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조금이라도 선이 빗나가면 처음부터 다시 그려야 하는 펜화이기에, 그 어느 때보다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해야 했습니다. 따뜻하고 선명한 색을 위해 선택한 아크릴 잉크는 금세 굳어 버리는 성질이 있어서, 펜을 여러 자루 준비해 두고 닦아 가면서 작업해야 하는 어려움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완성된 《우리 마을이 좋아》는 매 장면마다, 선 하나, 점 하나에도 감탄을 자아내는 아름다운 작품으로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섬세한 배려로 완성된 생동감과 서정성
작가가 묘사한 인물들은 눈을 감으면 금방이라도 떠오를 듯한 우리네 어린 시절, 우리 부모님의 추억 한 자락을 소환합니다. 고무신 신고 보자기 가방을 둘러멘 채 상장을 휘날리며 달려오는 아이, 갓난아이를 들쳐 업고 탈곡하는 아낙네, 평상에 누워 부채질을 하고 장독대 옆에서 나물을 다듬는 어르신, 청설모가 따 내린 잣을 몰래 주워 담는 중년 남자의 장난기 어린 표정까지, 각각의 장면에는 현실에서 우연히 일어나는 상황 하나까지 고려한 작가의 섬세한 배려가 담겨 있습니다.
작가는 여기에 상징적인 오브제들을 배치하며 감동을 배가합니다. 가족의 모습 옆에는 찔레꽃을, 떠나간 자식들을 그리며 눈물짓는 아버지 옆에는 보랏빛 도라지꽃으로 슬픔과 기품, 애정을 함축적으로 그려 넣습니다. 첫 장면에는 두 마리이던 새가 중간에는 다섯 마리 아기 새를 데리고 날아가고, 마지막 장면에는 어느새 부모만큼 자라 일곱 마리 새 가족이 마을 위를 나는 모습은, 노부부가 키워 낸 다섯 남매, 일곱 가족의 화목한 모습을 상징적으로 담아냅니다.
작가는 말합니다. “《우리 마을이 좋아》에 담긴 이야기는 송정마을 어르신들의 이야기이자 나 자신의 이야기이며, 보편적인 우리네 농촌마을과 사람, 동물들이 어우러져 살아가는 이야기”라고 말입니다. 이 책에 담긴 이야기는 한 마을의 이야기이자 이 글을 읽는 모두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끌어내는 우리 모두의 인생 이야기입니다.
‘이야기의 힘’으로 완성한 세 권의 그림책
<송정마을 그림책> 시리즈는 3년 반의 시간 동안 진행되어 온 부여 송정마을 그림책 마을 사업의 일환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사단법인 그림책미술관시민모임은 부여 송정마을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채록해 《하냥 살응게 이냥 좋아》를 펴내는 한편, 마을 어르신들이 직접 자신의 이야기를 쓰고 그린 ‘내 인생의 그림책’ 23권을 만들어 낸 바 있습니다. <송정마을 그림책> 시리즈는 마을이 품고 있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그림책 작가들이 새롭게 구성하여 창작한 그림책입니다. 세 권의 책에는 할머니의 삶을 되돌아보는 형식으로 펼쳐낸 마을의 이야기, 어르신들의 어린 시절을 함께해 온 도깨비 이야기, 치열하게 일하고 놀고 배우던 공간인 야학당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평범한 사람들이 간직한 ‘이야기의 힘’으로 완성된 <송정마을 그림책> 시리즈는 한 마을의 이야기이자 오늘을 사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