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세대가 그려내는 오늘의 소설적 풍경
새봄을 맞아 『소설 보다: 봄 2020』이 출간되었다. <소설 보다>는 문학과지성사가 분기마다 ‘이 계절의 소설’을 선정, 홈페이지에 그 결과를 공개하고 이를 계절마다 엮어 출간하는 단행본 프로젝트로 2018년에 시작되었다. 선정된 작품은 문지문학상 후보로 삼는다.
지난 2년간 꾸준히 출간된 <소설 보다> 시리즈는 젊은 작가들의 소설은 물론 선정위원이 직접 참여한 작가와의 인터뷰를 수록하여 독자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앞으로도 매 계절 간행되는 <소설 보다>는 주목받는 젊은 작가와 독자를 가장 신속하고 긴밀하게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충실히 해낼 것이다.
『소설 보다: 봄 2020』에는 2019년 겨울 ‘이 계절의 소설’ 선정작인 김혜진의 「3구역, 1구역」, 장류진의 「펀펀 페스티벌」, 한정현의 「오늘의 일기예보」, 총 3편과 작가 인터뷰가 실렸다. 선정위원(강동호, 김형중, 우찬제, 이광호, 이수형, 조연정, 조효원)은 문지문학상 심사와 동일한 구성원이며 매번 자유로운 토론을 거쳐 작품을 선정한다. 심사평은 문학과지성사 웹사이트에서 확인 가능하다.
* 『소설 보다: 겨울 2019』 없이 『소설 보다: 봄 2020』이 출간된 사정은?
: 제목만 앞당겨 바꾼 것이다. ‘이 계절의 소설’ 심사는 문예지(주로 계간지) 발간 이후에 진행된다. 때문에 기존 <소설 보다>는 이미 지나간 계절의 이름을 붙여 출간되었다. 신속함과 긴밀한 현재성을 강조하는 시리즈인 만큼, 2019년 겨울 ‘이 계절의 소설’ 선정작부터는 계절에 발맞추어 제목만 한 계절씩 당겨 출간하니 참고하길 바란다.
* 도서는 1년 동안 한정 판매될 예정이다.
봄, 이 계절의 소설
김혜진의 「3구역, 1구역」은 재개발 지역을 둘러싼 이야기다. 그동안 “그쪽은 어느 쪽이에요?”라는 무자비한 질문 앞에서 쉽게 대답하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써온 작가답게, 김혜진은 이 작품에서도 선과 악으로 특정할 수 없는 개인 안의 다양한 ‘입장들’을 드러낸다. 재개발 지역의 세입자인 ‘나’가 길고양이를 챙기다 만난 ‘너’는 길고양이에 무조건적인 선의를 보이지만 재개발 사업으로 삶에서 밀려나는 사람들에게는 놀랄 만큼 비정하다. “아무것도 모르는 고양이들만 불쌍하지. [……] 얘네가 무슨 죄예요”와 “3구역 사람들이 다 이렇게 군말 없이 빨리 나가주면 참 좋을 텐데”를 함께 말할 수 있는 ‘너’의 모순적인 모습은 인간의 복잡함에 대해 깊이 고찰하게 한다.
“한 사람 안에는 다양한 모습이 있고, 거기엔 모순되거나 충돌하는 지점이 있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말해도 좋다면 모든 사람 안에는 자신이 상상하기 힘든 모습들이 잠재되어 있는 셈일 텐데요. 물론 제 안에도 저 스스로 이해할 수 없고, 감당하기 힘든 면면이 있습니다. 거기에 대해서라면 원래 사람이란 그런 존재가 아닌가 좀 당연하게 받아들여왔던 것 같습니다. 당연하다고 말은 하지만 이 문제에 대해선 늘 얼마간은 체념하게 되는 것도 같고요.”
「인터뷰 김혜진 × 강동호」에서
“어떤 사람은 전부 알아도 쉽게 나서지 못하는데 왜 어떤 사람은 조금만 알아도 다 아는 것처럼 나설 수 있는 걸까.” 장류진의 「펀펀 페스티벌」은 사회생활을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질문을 품고 있다. 대기업 합숙 면접의 일환인 조별 공연 ‘펀펀 페스티벌’ 전후에 겪은 에피소드를 5년 뒤 송년회 자리에서 회상하며 이야기는 시작한다. 장류진이 마련한 일의 기쁨과 슬픔이 담긴 디테일은 언제나처럼 생생하고 재미있지만 웃음의 뒷맛은 꽤나 쓰다. “이 과정을 통해 선발되면 더더욱 나 자신의 쓸모를 증명할 수 있을 거라고” 믿으며 출제 의도를 고려한 최선의 답을 내놓으려 했던 성실한 주인공 ‘유지원’은 누구도 즐겁지 않은 ‘펀, Fun’ 페스티벌을 거쳐 어느덧 사회생활의 맹점을 꿰뚫어볼 수 있는 산업 역군이 되었다. 한편, 작품 속 ‘빌런’으로 등장하는 허세 가득한 미모의 남성 ‘이찬휘’ 캐릭터와 이 “좀처럼 볼 수 없는 껍데기”의 예쁨을 소비하는 여성 화자 사이의 전복된 구도를 지켜보는 것도 통쾌한 재미를 선사한다.
“잘못한 건 남 탓, 잘한 건 내 덕분. 못 나가는 건 니가 해, 잘나가는 건 다 내 거. [……] 그런 걸 잘하는 사람은 따로 있는데 나는 아닐 것 같다는 예감. 비단 승진의 문제뿐 아니라 조직 생활, 나아가서는 사회생활의 모든 것이 그런 식의 엉뚱한 원리로 굴러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인터뷰 장류진 × 조연정」에서
마지막 선정작은 2019년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한 한정현의 「오늘의 일기예보」다. ‘보나’라는 인물의 삶을 구성하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 정치적 사건을 ‘일기예보’처럼 일상적으로 다루는 이 소설은, 동아시아의 운동?시위 양상과 국가폭력 피해자들에 대해 관심을 가져온 작가의 기존 단편과 연작처럼 이어 읽힌다. 사랑과 혁명을, 일상과 정치를 대결 구도로 설정했던 과거와 달리, 일상 속에 스며든 정치적 논쟁을 체화해온 이 세대에게는 이제 가치의 양자택일보다는 공존이 더 자연스럽다. “폭력에 대한 근원을 하나의 사건으로 규정하는 순간 배제되는 무언가가 발생할 것이고 그것은 또 다른 폭력을 낳을 것이란 생각”(작가 인터뷰)을 거쳐 조심스럽게 탄생된 한정현의 일상을 통해 독자는 오늘의 정치와 이어진다. “‘고모’가 사랑과 혁명의 나날들을 회고할 때도, ‘복수’가 성평등 화장실의 필요성을 주장할 때도, ‘보나’가 광화문에 휘날리는 성조기의 물결 곁을 지나갈 때도, 한정현은 일상적인 어투를 굳이 바꾸지 않는다. 정치에 무관심해서가 아니라 일상의 매 순간이 실은 정치적이니까”(문학평론가 김형중).
“네, 저는 그렇게 믿어요. 사랑이냐 혁명이냐가 아니고 사랑과 혁명. 어쩌면 조금 간절히요. [……]
이런 이야기들을 계속해보려고 해요. 오해와 진실에도 ‘사이’가 존재하고 그곳에 더한 진실이 숨어 있을 수 있는 것처럼, 거대한 역사의 ‘사이’에서 삶을 꾸려나가며 단순히 ‘불행’하거나 ‘불쌍’하거나 ‘착한’ 사람들이 아닌 웃기도 울기도 행복하기도 슬프기도 했던 분명한 존재들에 대해서요.”
「인터뷰 한정현 × 조효원」에서